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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사람들 (벧전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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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새해가 되면 누구나 미래에 대한 꿈을 설계합니다. 직장인들은 승진을 위하여, 사업가들은 더 많은 자산의 증식을 위하여, 주부들은 가계의 안정을 위하여, 학생들은 성적 향상과 진학을 위하여, 적령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은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위해 나름대로의 꿈을 꾸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때 테니스계에서 정상을 차지했던 보리스 벡커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윔블던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중 한번은 테니스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우승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물질을 차지했지만 아주 불행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마음 졸인 채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중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는 마오둔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굉장하고 꿈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무지개처럼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오늘날 인간의 유전자 구조를 연구하여 불치병에 대한 치료의 길을 열었다 해도, 인터넷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어서 일반인들도 세계 구석구석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해도, 이로써 우리가 소망하는 진정한 행복과 참된 자유, 그리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2005년 한해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언제 한번' 이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약속 지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제 한번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언제 한번 술이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차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만납시다. 언제 한번 모시겠습니다. 언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언제 한번 다시 오겠습니다. 언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말 '언제 한번' 오늘은 또 몇 번이나 그런 인사를 하셨습니까? 악수를 하면서, 아들딸에게, 부모님께, 선생님께, 친구에게, 선배에게, 후배에게 직장 동료에게, 거래처 파트너에....

'언제 한번'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약속'이 있느냐고 물어보든가, '이번 주말'이 한가한지 알아보든가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진심'이 담긴 인사라면. '언제 한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나 희망이 담긴 약속은 막연히 먼 미래를 말하면서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는 것도 언젠가 먼 미래에 있는 막연한 명제가 아니라 오늘 현재 이 시대에 마땅한 역할을 감당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만이 유일한 세상의 소망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망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소망으로 이겨내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소망의 절정이란 바로 역사 속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심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분의 인격과 삶 안에서 “예”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취를 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소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약속을 교회에 위임하시고 세상의 소망이 되라고 세상을 향해 내 보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을 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소망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생명과 소망의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상을 역전시키는 교회: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은 베드로전서를 소망의 서신이라 부릅니다(1:3,13,21; 3:15). 이방인들로부터 멸시받으며, 계속적인 적대감으로 시달리고 있는 교인들에게 소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1:1,17; 2:11)로 살지만, 그러나 미래의 약속을 향해 출발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참된 고향은 바로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세상의 권위와 제도에 순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1:17; 2:17; 3:16) 이 세상에서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 고난은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1:8; 4:13).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러나 너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역전을 뜻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이전에 말씀한 내용을 뒤집는 강력한 대조입니다. 이 역전을 통해서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모퉁이돌이 되셨음을 증거하는데(2:4, 6, 7). 세상은 그 보배로운 모퉁이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2:4),”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2:7),”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2:8)” 위의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 지닌 완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세상은 모퉁이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불순종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8).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할 뿐만 아니라, 그의 몸 된 교회도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시험과 치욕과 고난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전서의 여러 권면들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렇게 거부당하고 그로 인해서 고난과 핍박의 자리에 들게 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1:6)”,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4:14)”,“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4:16).”

문제는 성도들에 대한 이러한 핍박과 고난이 연속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어디에도 이 고난이 곧 종식되고 편안해질 것이라고 약속해주는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고난을 주는 세상과 첨예하게 마주서 있는 교회가 당면한 상황이 2장 9절의 시작인 “그러나 너희는”이라는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이러한 처절한 상황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거부와 거절은 고난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유혹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유혹은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 대한 사탄의 접근 방식으로서 더욱 은근하고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유혹하여 자신과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변질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본래 이방인이었습니다. 옛 이방인으로 살 때 몸에 익숙해 있었던 삶의 방식이 다시금 그대로 되살아나도록 세상이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유혹 앞에서 영적인 전쟁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그러나 너희는”라는 말로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기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박해하며 유혹하는데 교회는 그 박해와 유혹을 이겨 나갑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참 소망을 알지 못하는 이 땅에서 세상의 소망으로 서고자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탁월성이며, 놀라운 비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어떤 존재이며, 또한 이 교회가 어떤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요?

교회, 곧 세상의 소망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의 존재가 네 가지 개념으로 나타납니다(벧전 2:9).

첫째는 “택하신 족속”, 둘째는 “왕 같은 제사장들”, 셋째는 “거룩한 나라”, 넷째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택하신 족속”

베드로전서는 첫머리에서 그 수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공동체라는 자기 정체성을 명백히 제시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1:2).”

그들은 구약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과 상응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지녔습니다(참조 사 43:20: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말은 친히 불러 내셨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시는 부르심과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탄생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2:9b)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2:20; 3:9)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 소망으로 설 수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공동체로서 세상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박해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근거도 하나님의 택하심이고, 세상의 유혹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자기 힘으로는 이러한 고난과 유혹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도, 또한 완전하지도 못한 존재입니다. 사회 속의 많은 조직들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강한 조직체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자기 힘으로 박해나 유혹을 극복하려 할 때에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선택받았다는 것이 교회가 자기 힘으로 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공동체로서, 선택하신 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놀라운 것은, 이 택하심을 입은 공동체가 유대인들이 아니라, 본래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긍휼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2:10)

우리는 “선택”이라는 개념을 종종 배타적인 뜻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족속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온 세계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자기를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배타적인 공동체의 성격을 자랑하려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선택 자체가 결코 배타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열려진 선택임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이 “택하신 족속”이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기 위한 사역을 감당하는 사명자로서의 선택을 뜻하는 것입니다(참조 2:9, 2:21: 3:9).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선택하심은 이방인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며(2:9), 이 세상에서 고난을 이기며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2:21), 세상을 향하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3:9). 교회가 이렇게 세상을 향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았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5:4), 죄와 거짓으로 더럽혀지지 않은(1:19) 산 소망을(1:3) 갖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가 때로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긴 하나,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빌고, 구원을 선포하는 공동체라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한, 교회는 변함없는 세상의 소망인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왕 같은”이라고 번역하면 교회가 곧 왕인 것처럼 여겨지나 왕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즉 교회는 왕이신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자 책무입니다. 제사장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제사로써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제사장적 사명을 받아 사역하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신 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 역할을 위임받아 이 땅의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공동체인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런 고난의 삶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니다.

“거룩한 나라”

“거룩한 나라”라는 표현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처럼 출애굽기 19장 6절(“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의 말씀에서 연유합니다. 거룩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교회가 지닌 자발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적적인 은혜 때문에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은혜로 택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시 2:25). 이 거룩함이란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서 살아 나갈 때에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됩니다. 세상이 비록 악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보며 오히려 소망을 갖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으라고 요청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인 교회는 바로 “거룩한 나라”의 영역을 세상에서 확장해 나갈 책임을 부여받습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은 교회가 지금 하나님에게 소속된 된 존재인 동시에 미래에 하나님의 소유가 될 구원받은 영광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당신의 소유된 기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상응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자의식은 교회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 비결이며, 동시에 미래의 약속을 담대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이 땅의 고난, 이 땅의 영광, 이 땅의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영원한 곳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부와 영광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투고, 그것을 얻으면 기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면 절망합니다. 그런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소망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지만 교회가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감당하는 사역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빛, 곧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고 둘째는 육체의 정욕과 악한 행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해 나가야 하는 사역입니다. 교회가 침묵하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 속에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사역을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택하신 족속, 왕의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받은 사명을 이 세상 속에서 행하는 첫째 모습은 교회의 선포입니다. 택함 받지 못할 만한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종말의 때를 향해 예정된 구원의 확실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이것을 선포하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방 받고 있는 현장에서 살고 있지만 교회가 거룩한 삶, 선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본 세상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전진하는 삶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앞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특수한 자전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자전거가 후진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전거가 전진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달리던 중이었다 해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만 쉬고 싶다고 주저앉는다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힘든 상황에 부딪힐 때도 있고, 슬픔과 좌절의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쉬어 버린다면 나중에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소망을 주는 손짓

삶의 소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뇌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해도 살 확률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좌절해 있는 아내를 위해 남편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친구 한 사람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수술 당일, 남편은 아내를 차에 태우고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리 양쪽에 모든 집의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병든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며 키스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아내는 “나는 사랑받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녀의 가슴 가득히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의 따뜻한 웃음과 격려의 손짓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요? 삶의 소망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여러분의 작고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소망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전적인 의뢰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또한 우리를 의지하고 기대하는 세상의 누군가의 소망이 되어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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