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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삼상 1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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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왕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근심하게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충만한 했던 사람이었고,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는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 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가 자신을 높이고 교만하게 되자 그를 세우신 하나님이 보지 않고 자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힘이나 권력이나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12절에는 그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갈멜에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기념비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좋아 합니다. 자서전을 내고 회고록을 내고, 동상을 세우고, 무슨 기념관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념비는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념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그는 분명히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기념비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세상에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한다면 겸손함이 기념비, 순종과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요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기념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라면서 그분을 찬양는 믿음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통해 믿음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기념비, 섬김의 기념비, 헌신의 기념비, 사랑의 기념비, 전도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늘의 기념비, 십자가의 정신으로 가득찬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사울이 세운 기념비는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 기도하던 사무엘 선지자를 밤을 세워 근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는 근심의 기념비였으며, 교만의 기념비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기념비는 자신을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고 오직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나님 나라에 세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8-9절에는 우리들이 세워야할 기념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십자가를 붙들고 오직 주를 위해 헌신하는 백성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저 하늘나라에 위대한 기념비를 세우고,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겸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을 중심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된 것은 그가 물질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는 그에게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여....”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모욕하였던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권능하심을 힘입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할 때에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그들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소와 양과 여인들이 보였습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의 손에 들고 있는 과자나 사탕을 엄마나 아빠가 빼앗아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사탕과 과자만 보이기 때문에 부모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먹이고 입히는 부모는 순식간에 없어지고 과자와 사탕이라는 물질의 욕망에 잡혀서 부모를 대적하고 심지어 마구 때리며 원망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물질의 욕망으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본성을 잃어버리고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돈이 없으면 불행하고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울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물질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사울이 말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라고 했습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긴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소와 양을 남겼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소와 양을 남겼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사울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서 욥처럼 물질을 빼앗아 가버리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욥의 아내가 욥을 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처럼 대적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돈 때문에 물질주의에 붙들려 주의 날을 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에 어느 권사님이 새벽마다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그분은 고기 집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달려가서는 고기 집을 열었습니다. 제가 권면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권사님이지만 권사님은 교회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서 장사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업종을 바꾸든지 주일에 장사를 하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가 믿음으로 바르게 서도록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가게를 주님께서 아주 문닫게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우리의 영혼이 잘 될 때 범사가 잘 되고 육신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망하면 모든 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남겨둔 양과 소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죄로 물들어 있는 아말렉 족속의 소와 양으로 번제와 화목제와 속건제를 받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가 소와 양과 염소와 같은 물질을 드리는 것일까요? 시편 51: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로마서 12:1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렐루야!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사울은 물질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물질을 구한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십니다. 순종은 구약의 제사보다 낫습니다. 1천 마리의 소를 잡아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천천의 수양보다 만만의 기름보다 나은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이처럼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여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려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다”

  모세 시대의 대제사장 아론은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그들의 요구에 따라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저것이 너희를 인도한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타락했고, 하루에 3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국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고, 믿음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위대한 사사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불과 300명으로 엄청난 수의 미디안 족속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끈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향 오브라에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을 때 성경은 그것이 기드온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든 에봇으로 인해 기드온의 가문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역시 자신들의 사랑하는 이방여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우상 숭배를 허용하였고, 그것이 솔로몬을 멸망의 길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진실로 축원합니다.  바울 선생은 데살로니가전서 2:4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 선생님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실패와 성공의 공통점은 바로 누구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무엇을 선택하였는가?에 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1:10절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의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오직 믿음을 통해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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