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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은자의 삶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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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교회 역사의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 받은 경우를 많이 발견합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성자 어거스틴으로 변화된 것은 로마서 13:12-14절 말씀이었습니다. 방탕한 삶에 찌들어 있던 그가 이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로마서 1장17절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에서 종교개혁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경청하다가 마음이 뜨거워져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번연도 로마서의 주제들을 벧포드 감옥에서 묵상하다가 천로역정의 환상을 보았고 그 유명한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생의 방황기 에서 로마서의 말씀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 가운데 중요한 성경을 들라면 창세기. 요한복음, 로마서,
요한 계시록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담겨있는 창세기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를 밝히고 있는 로마서, 마지막 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록 이 비중 있는 성경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1장 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입니다. 교리적인 부분의 주제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이 우리죄 를 위해 보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1장16-17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12-16장 까지 입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바른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고리 같은 말씀이 1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씀 입니다.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세상을 극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제일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우리는 주님을 모신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6:19절 이하에서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는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2대왕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성전 된 우리의 몸을 바치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보신자들이나 갓 구원받고 이제 믿음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에게
꺼림이 되는 것이 바로 주초의 문제입니다. 술을 마셔야 하는가? 담배는 피워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 술 취하지 말라고 그랬지 먹지 말라고 했는가? 담배피지 말라는 구절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명쾌하게 알아야 합니다.

과연 담배를 피워 담배에 찌든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내 몸이 술독이 되도록 마셔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려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초에 매여 있는 것이 거룩한 성전 된 몸을 바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13에서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병기로 드리라” 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의병기도 되고 불의의 병기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없다“ 고 바울은 고린도 전서 6장15절에서 말씀합니다.
레위기 11장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 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44절에는 “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 고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 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자의 참된 삶은 거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창기에 드리고 불의의병기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실만한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도구로 쓰여질 수 있도록 하여야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드리다” 라는 단어는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제물을 드린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산제사라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각을 떴습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의 삶도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산제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최선의 삶. 최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고. 거룩하게 구별하고. 산 제물로 드리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입니다.
산제사, 영적 예배는 는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성전 뜰이나 교회당에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리는 삶 전체의 예배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고. 집안일. 직장. 사업. 학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라는 것은 삶의 현장을 벗어나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것은 삶 전체에 전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발은 하나님의 길에 행하고, 입술은 진리와 복음을 전하며, 손은 타락한 자를 일으키며, 팔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귀는 가난한 자들의 소리를 듣고, 눈은 겸손하고 끈기 있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려면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행동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이제는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 있지만 목적이 다른 사람입니다. 칼빈주의의 모토가 되는 것은 “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돈 중심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목표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최선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모세는 장차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절대로 가나안의 풍속을 따라 가지 말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신명기 7장 이하에 보면 “그들과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그들과 결혼도 하지 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의 문화와 짝을 이루면 타락하여 결국 여호와신앙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같이 할수 없습니다. 의와불법이 어찌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장 14-16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2장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합니다.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세상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문화와 풍속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미혹합니다. 거룩을 방해합니다. 세상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올무와 가시 철망이 천성의 길을 가는데 장애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태도는 어두운 문화를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덧 없는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거슬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주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아서는 않 됩니다.

두 번째 “ 하라”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는다는 말은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이 변화여 포도주가 되었듯이, 변화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변형되신 것을 말할 때 쓰인 것과 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나는 변화란 세상의 기준과 떨어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품을 말합니다. 행동의 근본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하라는 것입니다. 받으라는 것입니다. 계속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변질이 아닙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중생이 아닙니다. 변화 없이 새 출발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변화가 동반 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물건을 보십시오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든 것이라도 그래도 방치해 두면 먼지가 앉고 더러워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계속 닦아주고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깨끗이 닦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하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수동태는 변화의 조건을 형성하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마음을 부패 시킬 만한 것이나.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멀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그저 흘러 떠내려가는 강물처럼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것은 변화를 받는데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삼손을 보시면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거룩 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전혀 마음과 행동에 꺼림이 없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을 그대로 방치합니다. 그러므로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새가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없지만 새가 머리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 가운데 이런 요소가 있다면 당장에 제거하여야 합니다. 죄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알지 않습니까? 저녁 잠자리에서 낙타에게 조금 양보하였다가 나중에 텐트전체를 빼앗기고 만 일화입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에 가까이 가면 나중에는 까맣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위해 우리는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죽은 것만 같은 둘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에 대해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하심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변화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내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자기희생과 자기 결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찬송가 431장을 작사한 분은 슈몰크 목사 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재가 나서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어린 두 아들이 새까맣게 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가운데 이 찬송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저 천성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 처절한 아픔의 순간에 주님의 뜻하심을 믿고 찬송한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전 5:16-18절에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러분 !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검증하는 세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은 기쁨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한 뒤 기쁘냐 아니냐를 평안하냐 아니냐를 따져보면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은 계속 그 일이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그 일을 계속하면서 기쁨이 오고 기도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감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새벽형 크리스쳔을 저술한 문봉주 대사가 이번에는 저축한 돈이 있었답니다. 그 돈을 하나님이 한동 대학교와 안요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맹인 교회에 헌금하라고 하셨답니다. 문 대사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스러웠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란 탓에 자녀들을 위해 약간의 돈을 저축하였는데 그 돈을 바치라는 주님의 뜻에 선뜻 순종하기가 어려웠답니다. 아내에게 말하니까 아내는 펄쩍 뛰더랍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하였답니다. 한국에서 군복무중인 아들을 만나기로 하고 일시 귀국하였는데 아들이 약속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더랍니다. 한참 후에 아들의 모습은 제 몰골이 아니더랍니다. 군대에서 야구시합을 하다가 야구공에 맞아서 안경도 박살나고 병원에서 실명 안 된게 다행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을 떠올렸습니다. 아 차! 하나님이 맹인교회에 헌금하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들은 지체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효자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고린도후서5:9“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몸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곳에 여러분이서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삶 전체를 제물로 드려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주님이 하지 말라 시면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중단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면 힘써서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참된 신자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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