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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뿌리를 찾아서 (고전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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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명절이 되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아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명절이 되면 흩어져있던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덕담을 나누기도 하고 조상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뿌리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특별히 요즈음 이시대의 사람들을 디지털노매드라는 말을 사용한다. 노매드라는 말은 유목민을 의미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디지털노매드라는 말은 디지털 시대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직장을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 환경을 따라서,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 돌아다니는 삶을 의미한다. 텔레비전 채널도 수십개가 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컴퓨터 인터넷 사이트가 얼마나 많은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점들이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마치 정신적인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도 그들의 뿌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어디에서 온 사람 누구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야곱의 아들 요셉. 그리고 성경에는 족보가 여러 차례나온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뿌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을 강조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시기이었다.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해서 이스라엘의 뿌리로 삼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의 기초체험이라고 부른다. 이같이 성경에서도 우리의 뿌리를 강조한다.

매우 멋진 자태를 가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모양 좋고, 단단하고, 품위가 있는 나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무는 자신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이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마다 몸이 심하게 흔들렸으며 삐걱거리는 듯한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있는 힘을 다해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무는 한두 개의 새로운 가지를 더 뻗을 수 있었다. 그러자 나무는 전보다 더 강하고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다음날 예기치 않은 강풍이 불어오자 나무는 중간 부분에서 "뚝"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었다. 친절한 이웃 나무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가까스로 충격에서 헤어난 나무는 이웃 나무의 볼품없는 자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말해보게.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 볼품 없는 모습으로도 굳건히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를 도울 수도 있었는가?" 이웃나무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지. 자네가 새 가지를 내느라고 분주할 동안 나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데 힘썼다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부풀리기를 많이 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뿌리를 다지는 일이다. 특별히 우리는 어디에 믿음의 뿌리를 두어야 하는가?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믿음의 뿌리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의 지혜는 무엇인가? 이성적인 판단이다.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사람의 지혜이다. 포도원의 비유 말씀을 보라.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을 찾기 위해서 새벽 6시,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나가서 일꾼을 포도원으로 데리고 들어와 일을 시켰다. 저녁 6시가 되어서 하루에 일한 삯을 계산해 준다. 저녁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준다.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부터 새벽부터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일당을 지불한다. 저녁 다섯 시에 온 사람은 감사할 따름이고, 새벽부터 일한 사람은 불평으로 가득차게 된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읽을 때에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지혜로는 이렇게 엉터리같은 대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어느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붙잡혔다. 돌아 맞아 죽게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치라. 사람의 지혜는 죄를 지은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모든 사람들이 들었던 돌을 버려두고 떠나게 되었다.

믿음의 뿌리는 사람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참으로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루이스대 프로이드라는 책이다. 이 두 사람은 영국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다. 프로이드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논리와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루이스는 청년기를 지날 때까지 철저한 무신론자이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프로이드가 말하고 있는 점은 철저히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미련한 행동이다. 아직도 아이처럼 철이 들지 않아서 없는 하나님을 가상으로 만들고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로이드가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철좀들어라”라고 외친다.

그러나 루이스의 인생을 볼 때에 처음에는 철저히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였다. 그러다가 말씀을 통하여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다.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떤 것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인간의 지혜에 뿌리를 둔 삶이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두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루이스가 강조하는 점은 “깨어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

프로이드와 루이스의 인생 말년을 보라. 프로이드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하단 말인가? 왜 내가 죽지 않고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루이스는 죽는 날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같이 인간의 지혜에 뿌리를 두고 사는 인생과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두고 사는 인생의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미국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서로 말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모이는 교회가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른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르는데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찬송의 후렴부분이 원문에는 “Oh Christ the solid Rock,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예수만이 굳건한 반석이시오, 다른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와 같다.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와 같다.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와 같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의 뿌리는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다. 믿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사랑하는 신문정권사님이 소천하셨다. 이 권사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사랑하는 권사님이었다. 출국하기 전에 권사님 병상에 찾아갔다. 숨을 거두시기 일주일 전이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이 권사님이 나를 바라보면서 우리 목사님 사랑해요, 우리 교회 좋아요. 지금 얼마나 지었어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얼마나 마음 속에 큰 감동이 되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얼마나 고통이 심하겠는가? 그런데 이 권사님은 진통제로 맞지 않고 고통을 그래도 받아드렸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권사님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권사님의 인생은 정말로 “숨질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사랑.”
이러한 마지막 순간이 인간의 지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드를 보라. 이 사람은 평생에 많은 책을 읽고,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은 철저히 인간의 지혜에 뿌리를 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람의 생각과 이성적인 판단에 뿌리를 두었던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하단 말인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외롭단 말인가? 이렇게 한탄하였다.

그러나 우리 신권사님은 많이 배운 것 없어도, 많이 가진 것 없어도,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삶 가운데서도 마지막 까지 친구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에 사람의 지혜에 뿌리를 둔 삶과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삶의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징든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9).

인간의 지식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 말라. 물질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 말자. 나의 재능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 말자.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와 같다. 오직 예수에게, 하나님의 능력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자.
북극해의 그린랜드 섬의 근해를 배로 여행하면 엄청나게 큰 빙산들이 바다 위를 둥둥 떠서 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빙산은 물 위에 나타난 것의 7배나 8배 더 큰 부분이 물 밑에 잠겨 있는데 이 큰 얼음산들은 바다의 조류를 따라 따뜻한 곳으로 서서히 흘러 다닌다. 빙산 옆에는 수 많은 작은 얼음덩이들이 있는데 그 작은 얼음덩이들은 빙산이 흘러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또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큰 빙산은 바다의 조류에 따라 흐르고 있으나, 작은 부스러기 얼음덩이들은 물 표면의 바람과 물결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도 나의 기분이나 감정에 의해서만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표면의 바람이나 물결에 따라 사는 것이 된다.

믿음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능력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자. 그리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살자. “세상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을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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