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실체를 바로 보자 (눅 4:16-30)

  • 잡초 잡초
  • 485
  • 0

첨부 1


- 설교 : 성홍모 목사

  오늘은 [예수님의 실체를 바로 보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고 환영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는 이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똑바로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들이나, 말씀을 선포하신 곳이 주로 갈릴리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 성도님들 중에도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정도로 교회를 출입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은 오늘 이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결단이 이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으며, 종교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정도라면 살아 있는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그동안 다니시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 당시에 아주 적은 마을이었습니다.  적은 마을 나사렛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도시가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자라나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을에서 자라나시지 않았다면 전혀 알려질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성경에 천사 가브리엘이란 분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그의 몸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역사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갈릴리의 가나 사람이었던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나사렛은 보잘것없는 동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나다나엘이 하는 말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나사렛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사렛에서 우리 주님이 나오시므로 유명한 동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므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듯이 도무지 선한 사람이나, 선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동리를 들어 유명한 동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이 나사렛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렛을 들어 사용하시므로 수도요 대도시인 예루살렘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지역, 좋은 가문, 좋은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소외된 곳, 가난한 곳,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를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있는 해변도시 가버나움에 가서 공생애의 3년을 사시게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에 나가서 사시던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안식일을 맞아 전에 다니시던 회당에 가셔서 당신이 전에 하시던 대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어 가셨습니다. 

  18-19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18-19절의 말씀은 구약 이사야61:1-2의 말씀을 그대로 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히브리성경을 가지고 읽었지만, 복음서를 기록하는 제자는 70인역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실 때에 이루실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성령의 사람이었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물질적으로 힘들게 살아가며, 영적으로 나약한 성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는데, 메시아 자신이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 땅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었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였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사역을 미리 예언하셨는데, 마침 예수님이 그 말씀을 찾아 읽으시고 앉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시고 책을 덮으시고, 성경을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당시의 성경은 두루마리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 읽는데도 시간이 걸렸고, 다시 정리하는 것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처럼 장과 절이 있다면 찾아 읽기 쉬운 일인데, 옛날에는 그냥 내용만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많은 내용 중에 꼭 집어내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찾아 읽고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라 주목하여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폭탄적인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말은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그에 관하여, 그를 두고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예수님을 말하고, 그 분을 사모하고 그 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바로 내가 그 사람이요, 오늘 이루어졌다고 외치신 분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만이 인류의 소망이요, 구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으시면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구절에 표시해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요6:40에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되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는 죄인이요, 타락한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으며, 잘 자라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막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메시아에 관하여 논술하지만, 우리 예수님만이 당신 자신이 구원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렇게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말은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구약의 많은 책에서 예언되어졌지만, 우리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점 즉 미드포인트(Mid-point)라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란 분이 주장하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이것을 가리켜 시작된 종말론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셨고, 그 말씀이 당신을 통하여 오늘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들은 청중의 반응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때에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놀랐습니다.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감탄하면서 놀랐습니다.  감탄하고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야, 어디서 그런 놀라운 말을 한다는 말이냐?  어느 랍비들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많은 이들이 구경꾼이요, 제 삼자적인 관망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당사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달갑지 않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대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가면 예수님을 무조건 들어보지도 않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적인 관계에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놀라면서 하는 말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 마태복음에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모두다 인간적인 관계, 혈연과 지연을 따져보고 있습니다.  막6:3에는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성인군자들 중에서 찾으려는 이들도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사상가나 성인 군자들 가운데 포함시키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하는 것도 감찰하시고, 알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말하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선언하신 말씀인 것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무슨 메시아라고 되지 않는 말 그만하고 기적이나 행하여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속담은 본래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사람이 누구의 병을 고치느냐'는 말로 빈정거리는 속담이었습니다.    타 동리에 가서 이적을 행한다고 하는데, 오늘 여기서 이적을 행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의사"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계속하여 요청받는 것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눅11:16)라고 하셨습니다.    요4:4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의 속담으로 응수한다고 하십니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친밀감이 오히려 경멸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자라난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인정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질투를 일으키는 법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고향에서는 메시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예수님을 인정하여야 메시아를 만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단순한 호기심이나 만족하게 하려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이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적을 요구하는 신앙은 계속하여 이적만 요구합니다.  치유와 기적이 계속하여 일어나면 믿음이 생길 것 같은데,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므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기적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예로 들면서 유대인들 중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나사렛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면 듣기에 참으로 거북할 것입니다.  다 옳은 말씀으로 알면서도 지적하는 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나라 안에도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많은 과부들 가운데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에게만 보내셨습니다.  엘리야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여 엘리야도 살 수 있었고, 과부와 그의 아들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또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노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시면, "예 그렇습니다"  "아멘이요."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표적이나 구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책망하는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이 자기를 때렸다, 자기들을 책망하였다, 자기를 깠다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깨어져나갈 때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좋은 인격의 사람으로 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 이 말씀은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때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을 이룰 수도 없고, 구원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려보내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는 것으로 알고 다 화를 내었습니다.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공로로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율법에 포로되었던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눈이 멀어 있었는데,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억눌려 있었는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고, 자유를 주셨고, 구원의 복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신 분이요, 아버지가 그 분 안에 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으신 감격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