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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순간의 배고픔 (창 25:27-34, 히 1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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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
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
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창세기 25장 27절-34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브리서 12장 15-16절)

설 명절에 고향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고향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 얼굴을 대하고,
가족간의 우의와 사랑을 나누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민족 고유의 풍속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세태의 변천과 함께 가끔 보기 흉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사 모든
것이 음지와 양지를 항상 함께 공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에도 보니, 설을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는 비극이 있었는가 하면,
부모가 물려준 유산인 땅값이 오른데 대하여 서로 다투다 공기총으로 동생들을 죽이고 자살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 딸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쓸쓸히 외롭게 지내는 독거노인들을 보면서, 인간사 희로애락의 파노라
마 라는 말이 절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1. 인간의 생존에서 제일 절박한 것은 배고픔입니다.
배고픔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괴테는 일찍이‘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말은 옳은 말인 줄 압
니다.
우리의 속어 중에도‘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듯이, 모두 먹고 사는 것이 제일 무서워 본의 아닌 일도 하
고, 멸시와 천대도 참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식새끼 거느리고 가장으로서 다 먹고 살려고 아부도 하고, 부정에 개입하기도 하고, 배신도 한다는 말입니
다.

이러한 배고픔의 절정은 전쟁에서 찾게 됩니다.
그래서 전쟁은 어떠한 명분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의 수단으로 협박하고 사기 치는 것처럼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6.25를 거친 세대들은 지금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 모든 비극이 배고픔에서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알라바마주, 헌츠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거기에서 만난 분들 중에는 대부분 6.25전란 중
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국제결혼을 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배고픈 것이 문제이었습니다.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 하나를 희생해야 했고, 먹고 사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서 자식을 남에게 주는 일
까지 생겼습니다.
이제 먹고 살만해지니 잃었던 가족 찾기 운동이 매 수요일마다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모두가 문제는 배고픔에
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밥만 먹는다고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단식투쟁을 하는 한 스님을 보면서 스스로 먹기를 거절하고 죽을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육신
의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적인 존재란 말입니다.
한 순간의 배고픔도 거절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동물은 먹을 것 앞에서 모두 걸려들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은 존재란 말입니다.
‘아니오!’라고 부인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사람이 사는 데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또‘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롬14:17)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경제 문제를 전부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은 배고픔의 문제만을 해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더 깊은 영적인 축복을 바라보는데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경제 문제에서만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는 복은 육체적인 건강, 재물의 부유, 사회적 성공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가치
와 더 높은 복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두 신앙인의 모델이 나옵니다.
하나는 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란 모델입니다.
이들은 다 같이 한 핏줄로 태어난 쌍둥이였습니다.
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세계와 이상은 달랐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이런 경우를 다 볼 수 있습니다.
형과 아우가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나, 취미가 다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무엇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믿음의 생활을 성도들 중에서도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본문 중에서 더 좋은 선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맏아들인 장자의 권리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에서는 장자(長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물론 에서도 장자가 누릴 권리가 어떤 것인가를 몰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토인들에게 문명인들이 거울을 가지고 다이아몬드와 바꾸어 왔다는 그런 식의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자가 누릴 특권을 다 알면서도 순간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것뿐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라는 광고까지 나온 것을 보면, 한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크리스천 가운데는 에서와 야곱이 생각하고 있는 두 그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욕망>을 위해 영원한 기업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누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한 순간 육체의 누리는 향락과 바꾸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장에 배고픈 내게 요구되는 것은 한쪽의 빵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에서의 선택이 옳다고 볼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육신의 일을 먼저하고, 나중에 교회의 일을 감당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는데도 이런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의 일이 먼저이고, 다음에 교회 일입니다.
기도 순서도, 집회 참석도, 모두 그렇게 합니다.       
세상사가 먼저이고, 다음에야 교회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교회 나가면‘누가 나 밥을 먹여주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에서>의 후예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한 순간의 배고픔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모세와 에서를 대조시키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히11:24-26)
그런가 하면, 그와 대조적으로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에서>와 같은 자가 누구를 의미합니까?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
더 좋은 자리로 영전을 위하여....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육체의 영달을 위하여....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자들,
한 순간의 화려한 성공을 위하여.... 교회의 직분까지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야곱은 비록 나약하고 소심했지만, 사실 인간성에서도 별 훌륭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기업을 더 크게 보고 그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추구했습니다.
즉 인간적인 결함은 있었지만, 그가 물고 늘어진 것은 장자 권이었습니다.
맏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기업을 사모했습니다.

우리도 잠깐 동안의 이 세상에서의 배고픈 문제들 때문에 장래 누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순간의 배고픔을 참고 승리한 흔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기업을 생각하면서 모세처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포기한 것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당한 능욕과 눈물의 흔적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직분 자들이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직분을 세상의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도 이런 유혹에 약합니다.
그래서 명예도 얻으려고 하고 총회장도 되려고 합니다.
총회장이 되어 모세가 흘린 눈물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총회장이 되어 도리어 능욕을 받은 일이 얼마나 됩니까?
모두 땅에서 주는 상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다시 안수집사와 권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안수집사님들에게 묻습니다.
권사님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하여 집사로서, 권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스스로 포기한 것들이 무엇이라고 봅니까?

지난번 모 장로님이 건축을 감독하면서 내 앞에서 두 번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눈물이 얼마나 되느냐 입니다.
직분을 받고서도 주님을 위해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칭찬과 치하만 받았다면 이후에 하
나님 나라에서는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면 다 목사이겠습니까?
장로면 다 같은 장로이겠습니까?
집사면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면 다 같은 권사가 아닙니다.
한 순간의 이권을 위하여 교회를 팔고, 직분을 포기하고, 양심을 속이는 그런 일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 세상에서 너무 많은 상패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죄악의 낙은 잠깐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면 비록 배고픔의 현장은 눈물이었지만, 그 눈물 뒤에는 영원한 약속이 보증되어 있음을 알아
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갖기 원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영광을 나도 누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나도 하고 싶어서?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부귀영화 권세도 다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이러한 마음을 주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오늘의 배고픈 현실에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 일수록 더욱 더 믿음의 장자 권을 굳게 잡아 세상의 팥죽에 넘어가지 않도록 믿음으로 승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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