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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존귀한 자 (사 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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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는 이사야의 자기 고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겸손하지 않은 오히려 건방져 보이는 듯한 자기 고백이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러한 고백과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강한 자기 긍정은 나 스스로를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한 그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한 사람의 하나님 앞에서의 강한 자기 긍정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파급 효과란 상당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 보기에 존귀한 자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면 안심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에서 존귀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관련시킬 때 나의 존귀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초대 교회의 최초의 목사님 중에 길 선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병이 들어 누워 계실 때 사람들이 병 문안을 갔습니다. 이 문병간 사람들 앞에서 길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손해볼걸 ···” - 하나님 보실 때 존귀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지만, 영국의 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Livingston이 아프리카에서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답니다. 이 때 Livingston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5절 말씀을 자세히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회복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그 사명을 자기에게 맡겨 주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모습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들도 이 비결을 잘 알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로서 평범한 한 인간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은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거대한 신앙의 공동체의 이름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획득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이라는 개인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을 지니게 된 비결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그 방법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부자가 되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오는 야곱의 마음은 금의환향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편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고향을 떠날 때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서 도망했기 때문입니다. 그 형이 옛날 일을 생각하여 혹시 복수나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갔던 종들이 보고하기를 에서가 큰 군대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부랴부랴 일행 중 일부를 앞서 보내고 또 나머지를 모두 강을 건너게 한 후 혼자서 얍복강이라는 곳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혼자 남아 있는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싸움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사람을 맞이하여 한참이나 싸움을 하였습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그 사람은 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놓아주지 않는 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내리쳤습니다만 그래도 야곱은 꽉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하면서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끈질기게 하나님의 복을 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야곱의 자손들은 그들의 공동체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의 모습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도 있습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언가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꿈을 받아 내야하고, 사명을 받아 내야하고, 능력을 받아 내야하며 그리고 할 일을 받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하나님의 귀한 소명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것이 임할 때, 바로 그 때, 나는 존귀한 자가 됩니다. 질그릇 같은 연약한 내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긴다면 그 때는 존귀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가 그 등에 예수님을 태움으로써 그 나귀는 호산나 찬양의 소리를 듣게 된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귀한 것을 내 안에 담을 때 존귀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는 인식을 늘 가져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그 무엇을 내 연약한 인격에 담아야 하는 것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귀찮다”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하기 싫다”라는 의미로 쓰지만 사실 이 말은 이보다 좀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이 “귀찮다”라는 말은 “귀하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이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고 말할 때 이 “존귀하다”라는 말과 연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귀찮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성이 퇴락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귀찮게 여기는 일이 많기에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 데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이익이 없어도, 조금만 신경 쓰기 싫어도 그저 “귀찮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냥 지나쳐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자기 자신의 존귀함”이 상실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언가 귀찮아서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천하게 여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교회 나가기가 귀찮고, 교회 일 하기가 귀찮고, 성경 공부하기가 귀찮고, 구역 예배 모이기가 귀찮고, 기도하기가 귀찮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천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일이 많이 있음을 귀찮게 여기지 말고 사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은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하고자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기회요, 그렇기 때문에 기회란 상실되면 되돌아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Doctors"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책입니다. 이 "Doctors"라는 소설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부분에 의과 대학 학장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의학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탐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탐험 중에 여러분은 아직 신비의 계곡으로 남아 있는 혼자서 탐험할 고통과 질병의 영역도 찾아내야 합니다. 이 방에 앉아 있는 여러분 중에 백혈병, 당뇨병, 홍역 그리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질병의 치료법을 발견하는 주인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한 학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제 여러분에게 비밀 하나를 공개하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진지한 태도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고 정중히 부탁한 다음 뒤로 돌아서서 칠판에 뭐라고 썼습니다. 칠판에 ‘26’이라는 숫자를 쓰고 난 다음 다시 돌아서서 호기심에 차 있는 신입생들을 향하여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제군들이여, 이 숫자를 기억해 주십시오. 지구상에는 수천 가지의 많은 질병이 있지만 의학적으로 치료법이 개발된 것은 26개뿐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숙제입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이 이야기가 우리 교회나 사회를 배경으로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어떤 숫자를 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도움과 노력과 희생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교회 일이란 과연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자체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할 일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일들 중에서 우리 스스로가 나서서 도우며 희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많은 교회 일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감당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라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기 싫어한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귀찮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셔서 모든 피조물의 존귀한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귀한 신앙의 체험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일들을 오히려 귀찮게 여긴다면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생명과도 맞바꿀 수 있는 그 고귀한 자리에서 탈락하고 말 것입니다.

민족적인 우울한 시대에 이사야는 바로 이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는 자기의 할 일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라고 말입니다. 이 한 개인의 고백이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귀한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역사와 우리 이민 사회와 교회는 참으로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다. 이사야처럼 이러한 귀한 자아인식을 지닌 여러분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들에 참여함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감당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일들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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