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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부수를 던지는 다윗 (삼상 27:1-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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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지난 주는 국제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간 한 주간이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충격적인 선언을 함과 동시에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북한과 더불어 핵무기 제조국가로 가장 의심을 받고 있는 이란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는 뉴스도 미국에게는 큰 타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러시아는 핵무기에 필요한 부품을 이란에 수출하겠다며 이란의 최고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우의를 과시하는 일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있을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중심축이 될 수 없는 주변국 입장인 우리로서는 그저 강대국들의 행동에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정세 파악에 안감힘을 쏟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십황무지에서 어렵게 사울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겹겹이 둘러싼 사울의 군대 진영에 들어가 칼과 창을 들고 나왔으나 삼 천의 군사들이 하나도 깨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사무엘상 기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 27장은 다윗이 블레셋 진영으로 자기의 공동체를 이끌고 들어가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영적전쟁의 승리 뒤에 다가오는 탈진현상이 다윗에게 엄습한 것입니다. 마치 갈멜산상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했던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의 추격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장면과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헐떡이면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왕상19:4) 라며 사명자로서는 보기힘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장에서 29장까지 석장에 걸쳐 전개된 말씀은 27장에서 아기스에게 피난하는 다윗의 모습, 28장에서 사무엘이 죽고 난뒤 놀랍게도 사울 왕은 신접한자, 박수 무당들을 모두 쫓아내는 영적결단을 내리다가 블레셋이 침공하자 두려워한 나머지 신접한 여인을 스스로 찾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 하나인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니는 일도 지쳤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블레셋 진영이라도 좋으니 그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이방에 내려간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세겜에 정착을 했습니다.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정착하려는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벧엘로 잠시 거처를 옮겼던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으로까지 삶의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애굽으로 옮기면서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바로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어려움을 모면해 보려고 꾀를 부려보았지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가면 ,머리 좋기로 둘째가라면 섭섭할 야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신의 출세를 위하여 형제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속여가면서 축복의 자리를 탐하다가 형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자신이 원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얻었고, 또한 수 많은 양떼를 얻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금의환향하는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복수의 칼날을 앞세워 다가오는 에서 일행의 소식을 듣고 야곱은 가족과 재산들을 얍복강 건너로 모두 보낸 후 홀로 남는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노라며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에게 결국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요. '도둑놈입니다' 약탈자라는 뜻을 가진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되어지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네 입으로 고백할 수 있겠느냐는 회개에로의 요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난 야곱 앞에는 놀랍게도 에서와 사 백명의 군사들은 이제 원수로서가 아니라 옛정을 간직한 형제로서 다가와 있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창 33:9-10)

우리는 또한 룻기 1장에서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흉년을 피해 모압땅으로 이사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두 아들을 이끌고 이방 땅 모압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결국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드 명 중 하나인 룻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돌아오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룻 1:2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기근이나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겜이라는 약속의 땅에 산다할지라도 때때로 기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 베들레헴에서 살다가도 흉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때에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과 사울의 삶의 태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울의 끊임없는 도전 속에 피난다니는 일이 고단스러웠지만,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엔게디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십 황무지에서 승리하게 하신줄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에겐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좀 성가시고 귀찮아졌습니다. 좀 더 발 뻗고 편안하게 쉴 때가 없는가? 그 자리가 블레셋 이방의 자리이면 어떤가?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4개월 동안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편안히 지냈습니다. 하지만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여전히 다윗을 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골리앗을 죽였던 원수, 홀홀 단신 피난왔다가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이자고 했을 때 왕 앞에서 미친체하며 침을 흘려야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600명의 공동체까지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여전히 위험부담은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아기스 왕과 부하들에게 점수를 따야 했습니다.

결국은 유다민족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일 때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유다 백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도 행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의 안위를 위해서 자기의 민족과 칼을 들고 싸우는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사울로 하여금 이렇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만들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시절, 평안한 시절, 우리의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시집 장가가기 전에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결혼해 봐야 알지요. 저는 학력 안 봅니다. 얼굴도 안 보지요. 재산도 안 봅니다. 믿음만 있으면 좋아요.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 만나면 학력에 목 매고, 재산에 목 매고, 얼굴에 목 매가지고 신앙은 간 곳 없지요. 처녀 총각의 심정은 그래서 완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결혼해 봐야 합니다. 결혼으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 고백이 이런 것입니다. 삶으로, 중요한 삶의 태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신앙도 평상시에는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행위는 가지고 있지만, 그 신앙을 공인을 받으려면 환란과 역경을 건너가야 합니다. 마치 용광로 속에 철광석이 들어가야 거기에 불순물이 태워지고, 순수한 것이 흘러나오듯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봐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휘몰아치고 나서 그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신앙이 있는 건지, 싹 태워져서 불과 짚처럼 남아있는 것이 없는 껍데기 밖에 없는 신앙인지는, 지나가봐야 아는 것이지요?

사울이 좋은 시절에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 흉내낼 수 있었습니다. 신접한 여인 쫓아내고,
무당 쫓아내고, 우상 멀리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침략해서 위협이 다가오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제일 먼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미아리 찾아가는 사람 없습니까? 여러분, 용하다고 하는 집, 급하면 찾아가는 곳 없습니까? 평상시에 신앙은 교회, 급할 때에 신앙은 미아리, 용하다고 하는 박수무당 아닙니까? 무당들이 그러던데, 교인들도 많이 찾아온다던데요?

몇십년씩 무당하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고백한 사람 중에 하나는 크리스찬들도 많이 찾아온대요. 입학 때가 되면, 승진 때가 되면 찾아온다던데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그런 사람 없습니까? 아마 뜨끔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손 한 번 들어볼까요?

우리는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저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막 무너집니다. 사울왕도 막 무너집니다. 결국 우리는 이 다윗과 사울의 행동을 보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연단이라고 하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목회하면서 큰소리 뻥뻥 칠 수 있는 것은 개척이라고 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저는 늘 평상시에 평범한 목사로, 평범한 설교로밖에는 성도들 앞에 다가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개척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한계가 거기에 있어요.

늘 차려논 밥상 가지고 어떻게 자리만 옮겨보는 것이지요. 그 이상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가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차려논 밥상의 소중함을 알고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이 우리에게 올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중요한 과장이요, 통로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생각에 블레셋으로 가면 우리 600명의 공동체가 평안하리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일년4개월동안의 평안이 진정한 평안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동족과 상쟁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 앞에서 부끄럽게 지배를 당하는 그러한 세월이었지요. 자랑스러운 영광의 세월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평안이 있느냐, 어려움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느냐 하는 중요한 기준을 우리는 새롭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문지기라도 좋아요. 다윗은 나중에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행복이 어디있나요? 진정한 우리의 감사가 어디 있는가를 다윗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랄 수 없습니다. 월남 대통령 티오대통령이 한국에 왔다가 청와대에 핀 아름다운 목련을 보고서 너무 감탄하니까 대통령이 선물로 주었습니다. 싸이공에 있는 대통령 궁에 잘 옮겨 심어놨는데, 자기가 기대하는 꽃은 피어나지 않아요.

해가 지나 청와대에 연락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각하가 그 정원에 심었던 그 목련꽃은 우리나라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나무는 너무나도 잘 자랍니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무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데, 꽃이 피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겨울을 나지 않으면, 목련은 꽃이 피지 않습니다.

겨울이 나야 그 멋들어진 꽃을 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개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나리도 더운 나라에 가져갔던 어떤 한국인이 아무리 개나리를 잘 키워놔도 노란 꽃이 피지 않아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알고보니까 겨울을 나지 않으면 개나리도 꽃을 피우지 않은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맛보아야 아름다운 꽃이 난다는 이 자연의 이치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에서 이긴 그 사람이 고난에서 승리한 그 신앙이 별처럼 빛나는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난을 피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이여, 이 고난을 승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감당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사울과 다윗과 같이 그러한 유혹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분명한 기도의 제목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집사로써 권사로써 장로로써 목사로써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끄럽지 않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승부수입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단코 살 수 없음을 서둘러 알게 하옵소서. 사자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처럼, 아닥사스닥왕을 지으셨던 그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다리오왕을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사자굴에 들어섰을 때 오히려 사자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다리오왕이 밤새면서 다니엘을 위해서 노심초사 하다가 새벽녘에 달려갑니다. 다니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 라고 물었을 때, 죽었다면 뼈다귀도 못 추렸을 텐데, 그 속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나이다. 하나님도 모르는 다리오왕이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줄 내가 믿노라.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입술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승리를 보면서 그들의 입술로 과연 너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이 진정한 선포인 줄 믿습니다. 승리는 거기에 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서 때때로 시련과 역경이 다가오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에 승부수임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해답인 줄 믿습니다. 어떤 세상적 방법도 이제 우리가 선택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블레셋으로의 방법도, 신접한 여인으로의 방법도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로만 이제 나의 구주삼고, 예수로만 나의 삶에 길로 삼고 아버지 해답으로 삼고 살기를 원합니다. 고난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법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승리임을 고백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백성들, 주님, 변함없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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