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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물보다 귀한 (마 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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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막 시작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사역 첫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어설프고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3 년이란 짧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실수하면서 배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3 년 동안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제자를 삼았고, 천국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쳤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성령님과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전 인류에게 주옥같은 영생의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을 개척교회 목사님이라고 본다면 그 성과는 대단합니다. 3 년 만에 수 만 명이 따르는 교회를 일구신 셈입니다.

저는 멋진교회를 처음 개척하면서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예수님만큼은 못해도 어느 정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부교역자 생활을 20 년이나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개척교회의 비전을 담아서 개척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목회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공한 교육학 이론에 이 경영 이론들을 붙였습니다. 리더십 교재를 만들고, 소그룹 전략을 짰습니다. 구태의연하고 방만한 조직을 과감하게 개혁했습니다. 원칙에 벗어나는 잘못된 교회의 습성들을 개혁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거의 어떻게 하면 교회 개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가에 집중한 책들입니다. 그런 책들은 사실 어떻게 하면 코카콜라를 많이 팔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리더스 다이제스트 책과 잡지를 많이 팔 수 있는가? 하는 경영학 비법들입니다.

사실 지금은 경영이란 개념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경영이란 특수한 기업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모든 사업과 일에 적용될 정도로 일상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목회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목회의 모든 방법론은 이 경영학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교우들의 입맛에 맞출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소자본을 가지고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틈새시장을 찾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차별화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튈 수 있는가?

자신감 있게 시작한 멋진교회는 벌써 4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뭔가 2 % 부족합니다.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목회가 정답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역을 경영학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저는 지금 사역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찾았습니다. 기도하면서 꾸준하게 뭐가 부족한지를 깨닫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사실 부족한 것은 너무 많습니다. 제 목회에는 너무 많은 허점과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묘수를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경험도 없었고 연습해 본 것도 아닌데 사역 시작부터 실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회에 있어 최고의 모델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제 마음을 흔드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좇으니라”는 단어입니다.
20 절에 있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 절에도 있습니다.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5 절에도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이 얼마나 환상적인 단어입니다. 개척교회 목사가 볼 때 너무나 매력적인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지남철에 끌리듯이 허다하게 끌려들고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전도자이십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강하십니다.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가 크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갈급함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기에 예수님은 그 짧은 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기적의 능력인가요? 확실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사람을 모으는데 효과적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병 낫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적에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증거는 병 고치신 후에 내가 고쳐줬다고 소문내지 말 것을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전도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전도를 무리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조절하셨습니다. 12 절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잡아들일 때 예수님은 물러 나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치인과 부딪치는 일을 피하셨습니다. 이것은 전도에 지혜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선교지를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시골로 정하셨습니다.

13 절에 처음 정한 예수님의 선교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 지역은 시골 변방의 소외된 곳입니다. 15 절에 그렇게 나옵니다. 이사야는 스불론, 납달리, 요단강 저편, 갈릴리 지역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갈릴리를 이방 갈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5-16>

이곳은 같은 이스라엘이면서 이방 지역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시당한 지역입니다.

의외입니다. 기왕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제일 큰 도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놔두고 천박하고 소외된 땅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방법이 예수님답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선택이었지만 이것이 맞습니다.

엘리트 계층보다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은 더 급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했다면 3 년을 못 채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마지막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전략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전 세계에 복음이 퍼질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셋째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메시지도 의외입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이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던 메시지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예루살렘에 사는 기득권 층을 향해서 외치면 어울립니다. 가난한 이들을 등쳐서 자기 배를 채운 탐관오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부자들에게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왠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것이 죄가 됩니까? 부모 잘못 만나서 천민으로 사는 것을 회개하란 말입니까? 시골에서 외치려면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하는 메시지가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예상을 깨고 인정사정없이 심령을 깨우는 메시지를 택하셨습니다. 봐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인 됨을 깨닫고 나아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기초적이고 평범한 진리를 서슴없이 외치셨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유혹에 빠집니다. 교인들의 입맛에 맞추는 설교를 하면 인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외치는 설교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축복하고 소망을 주는 설교가 좋습니다. 잘못된 것이 보이지만 지적하면 목사가 쫓겨나든지, 교인이 나가든지 합니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설교는 피하고,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압권은 네 명의 제자가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은 주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저희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부름에 응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포기한 것은 직업과 가족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고생스러운 길입니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미래가 불투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무엇을 보고 주님을 택한 것일까요? 어떤 매력에 반했기에 그리 큰 인생의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이 장면을 보다 자세하게 소개한 누가복음 5 장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다가 육지에 배를 댔습니다. 그 날은 허탕을 친 날이었습니다. 피곤한데다 고기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예민해져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한 배에 올라앉아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적극적인 청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베드로는 옆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도 없이 설교하는데 옆에서 그물을 씻어 보십시오. 설교할 때는 아이가 칭얼대기만 해도 방해가 됩니다. 핸드폰 벨이 울려도, 누가 소곤대기만 해도 신경이 쓰입니다.

여러분 설교할 때 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버립니다.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설교의 맥을 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설교로 끌어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참으로 예민한 시간입니다.

네 번째 전도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벌써부터 베드로를 노리신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설교를 방해한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이르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건 순종하기 어려운 주문입니다. 왜냐하면 어구를 다시 챙기려면 아주 귀찮은 일이 됩니다. 이미 밤새 고생을 했고, 아침에는 고기를 잡을 시간이 아닙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잡을 고기의 습성에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낮에 잡는 고기가 있고, 밤에 잡는 고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어구는 밤에 잡는 고기의 그물입니다.

당연 베드로는 무시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더구나 고기 전문가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목수 출신입니다. 픽 웃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사는 의외성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선뜻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어떻게 이렇게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 말씀에 있었다고 봅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범한 말씀이 베드로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씻으면서 설교를 안 들은 척했지만, 예수님의 설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말씀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다시 내렸습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들은 것입니다. 다른 배를 손짓하여 불렀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두 배가 잠길 정도로 고기를 건져 올렸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무언가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순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적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엉뚱한 말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이 놀라움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기 많은 잡은 것과 죄인임을 깨닫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것이 전도의 영적 신비입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통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평생 고기만 잡고 산 자기인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해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상식을 깬 이 분은 단번에 고기를 산처럼 잡았습니다. 고기잡이 하는 자신이 허무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이 별거 아니잖습니까? 고기 잡기를 위해 매일 아옹다옹 산 자신이 초라하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분의 권세 앞에 베드로는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죄인 됨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큰 분을 도리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할 줄 몰라 자기를 떠나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서웠습니다.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감싸 안았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말씀은 새롭게 주어진 베드로의 놀라운 비전입니다.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자로 바꾸라는 강력한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신의 소명을 받아 그물과 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되었습니다.

옆에 있던 안드레, 함께 고기를 건져 올렸던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은 베드로의 동업자들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회심의 체험과 소명 받음을 지켜보다가 동일한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동일한 소명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도는 한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지난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그물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와 말씀은 이렇게 언제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면 변화되었습니다. 지난 삶의 자리를 던지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이 그물과 배를 버렸다는 것은 지난 삶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동역자 네 사람을 얻었습니다. 이후로 이 제자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 그물은 이제까지 저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여러분의 그물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그물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해 여러분의 직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물은 예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은 골프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골프 약속이 대개 주일에 잘 잡힙니다. 그분이 은혜를 받고는 다시는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너무 큰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권해 드렸습니다. 결단은 좋았지만 그건 주님이 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은 단지 주일 예배 시간에 골프 치는 것만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골프는 계속 쳐도 좋습니다. 다만 주일 예배 시간과 골프를 맞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에 있는 빠질 수 없는 잔치 때문에 예배를 빠집니다. 아닙니다. 예배가 더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에 잔치에 청함을 받으면 미리 알리십시오. 축하할 일인데 하필 내가 빠질 수 없는 예배 시간과 겹쳤다고 아쉬워하십시오.

어떤 분은 예배 시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 정도의 그물도 못 버리면서 주님을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일 예배는 주님을 따르는 상징적인 시간입니다. 예배에는 우리의 모든 영성이 집중됩니다. 예배를 생략하고 주님 앞에 우리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시간 구체적인 나의 그물이 무엇인지 각자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을 따르면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유혹거리들이 될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진리와 사상이나 철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깊이 빠져 있는 죄악 된 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 던져 버릴 나의 그물을 깨닫게 하소서. 이 거추장스러운 그물을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잘못된 습성을 끊어버리게 도우소서. 죄악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옵소서. 주님의 오른 팔로 건져 주옵소서. 베드로는 나를 떠나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주여 떠나지 마시고 나를 건지시라고 외칩니다. (기도)

나눠드린 종이에 여러분이 버려야 할 그물이 뭔지를 적으십시오. 그리고 이 앞에 준비된 화로로 가지고 나아와 적은 종이를 태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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