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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 용서의 배움과 실행 (마 18: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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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 효행으로 유명한 증자는 반생을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그는 매일 세 번 반성한다고 했다.
첫째, 남을 도와주면서 정말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성실하게 도와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아니고서는 건성에  불과할 뿐이니 진정한 도움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친구와의 교제에 혹 신의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결국 신의를 해치는 것이 되며 나아가 자신의 해악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요즘 깊이 새길 만하다 하겠다.
셋째, 스승에게 배운 바를 잘 익혔는가 하는 점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면 결국 그 도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고 잘못된 지식을 다시 제자에게  전하는 이중의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2천5백년 전의 이야기지만 음미해 봄직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고 이웃의 잘못에 대하여만 민감해진 시대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 일상적인 사람에서 반성을 하고 또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신앙인들에게는 전례를 통하여 더욱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많이 갖는다. 특히 사순 시기의 전례는 인생의 광야를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허영과 위선에 가득 찬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듯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생활하기 위한 40일의 기간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신앙과 인간적 성숙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세속적 유혹과 불안으로 인해 잃기 쉬운 신앙인의 자세를 사순 기간의 삶을 통해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의 시작인 성회 수요일(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앙인 들은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기 3,19)는 말씀과 함께 머리에 재를 얹게 되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을 생각하고 거기에 비추어 자신들의 사람을 바로잡기를 요청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때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아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 사순 시기이다.

마 18장은 용서와 겸손에 관한 가르침이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의 용서하는 삶에 대한 교훈을 받은 베드로는 마음이 관대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을 자랑하고픈 심정으로 일곱 번을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용서에 관한 한 그 숫자에 관계없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바람이다. 또한 용서의 양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신다.

마 18:23~24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그 당시 헤롯 대왕의 나라 일년 예산이 900달란트라고 한다.
또한 헬라어 최고의 계수 단위 10,000이라고 한다. 결국 일만 달란트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빚'을 말하고 있다.
이 엄청난 빚을 지고도 '갚을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임금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딱한 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 18:25~26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빚 독촉하던 임금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빈말'에 불과한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마지막 호소를 하는 이 종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보자는 심산이다.
삼척동자라도 속지 않은 이런 부탁에 임금은 의외의 대답을 준다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디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으로 다 표현 될 수 있겠는가?
수없이 배신하고 떠나가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고백은 결국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 아닌가?
자녀를 용서하고 기대하고 그 미래를 예비하는 부모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뛰어 넘는 것으로 증명이 되어진다.
이 무한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용서를 받은 이 사람의 일상의 삶 이야기가 뒤이어 나온다.
이 사람에게는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그 앞에 등장한다. 일 만 달란트와 일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1/600,000에 해당한다. 이 두 사람이 각각 지은 빚의 양을 비교해 볼 때 앞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액수를 용서받은 이 사람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아주 쉽게 그 결론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상할 수 없던 용서를 경험한 그 사람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큰 용서를 경험한 그 사람이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용서의 삶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한 그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 두 이야기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음은 그 일을 보고 받은 임금의 행동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임금은 기대할 수 없던 용서를 받은 종에게 진노한다. 그것은 기대할 수 없는 용서받은 종에게 예상되었던 용서하는 삶을 그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마 18:32∼34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뒤이어 주님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교훈을 주신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들의 삶이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용서가 필요 없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용서가 필요 없다. 그러나 죄를 안 지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아무런 실수도 안하고 죄도 전혀 안 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죄와 실수를 그대로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감각 없음을 한탄하신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던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었다.
기도의 전당은 마땅히 기도하는 처소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사치의 소굴로 바꾸어 버린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처음엔 선한 의도에서, 멀리에서 오는 사람들이 제물을 갖고 오는 일이 쉽지 않자 그들을 돕고자 시작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후에는 가깝던 멀리 있든 구별하지 않고 성전에서 지정된 사람들이 양육한 제물로만 제사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제물용 짐승들의 가격에 폭리가 취하여지고, 성전세를 특별히 성전에서 환전하여 납부하게 하면서, 막대한 환전 이익을 취하는 저들,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을 그것이 악용되어, 돈이 개입되면서 잘 못 되었으면서도 잘못됨에 무감각했던 저희들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죄악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한 저들을 향하여 진노하신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왜 그리도 죄에 무감각해져 가는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퍼온 글이다.
왜 일명 '늑대 소년형의 인간'이 많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가?
세상에는 엉터리 속임수가 너무나 많다. 아니 사기가 판을 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실례를 들어 이젠 '공짜'란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이미 허울 좋은 그 말 뒤에는 대개 바가지상혼이 도사리고 있음을 수없이 체험해봤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에게 건네 줄 과자 따위를 사 봐도 엉터리 투성이다.
이 것은 그들에게 나쁜 교육 효과를 전하는 셈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과대 포장이 일쑤여서 속은 '빈강정'격이기 마련이다. 광고 포스타의 식품 그림이 하도 먹음직스럽게 커 보여 사 보면 실제로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기 마련이다.
젊은이들은 이제 이런 현상에 무감각해져 있으나  50대 이상의 구세대들은 아마도 옛날의 작은 포장 속에 꽉 찬 밀크 캐러멜을 상기하며 쓴웃음을 머금고 말 것이다.
이래선지 양심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짓말을 정말 밥 먹듯이 예사로, 그것도 곧 들통이 나기 마련인 사항도 천연덕스럽게 하는 인간들도 부지기수다.

특히 국민을 계도하고 이끌어 나가야 할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국민들을 정치 불신 증후군에 빠지게 했다.
미국 한 상원의원의 '나는 우리 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서 뽑힌 것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서 뽑힌 것이다.'는 말이 정말 우리 가슴 깊숙하게 와 닫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심지어 국가도 국익을 위한다는, 여건상 어쩔 수 없이 거짓 발표를 하고는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사실 '거짓말은 필요악'이라고도 한다.

또 실제로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지도 모른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내에서 또 일시적인 기지에 의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별로 나무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늑대 소년'형의 거짓말 선수가 너무 많은 세상, 이는 상상만 해도 끔직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어떤 이는 남의 거짓말도 듣기 좋게 '희망사항이지...'라는 말로 일축해 버리지만 작지 않은 거짓은 사회에 큰 병폐를 안겨다 주고 또 실제로 많은 인적, 물적인 낭비등의 도외시 못할 큰 피해를 안겨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른 불신 풍조의 만연 현상 때문에 남을 이해, 설득시키는 일도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솔직하게 말한다해도  대부분이 '그걸 어떻게 믿느냐?'는 반응들이다.
더구나 옛날부터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치 속의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진실도 쉽게 먹혀들어 가지 않는 이런 사회를 살다보면 정말 답답하기 한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일일이 각서나 서약서 따위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거짓말 탐지기 같은 걸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가슴을 열어 보일 수도 없는 일이다.
때로는 정말 가능하다면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기 마련이다. 정말 '진심'을 열어 보일 수만 있다면 좀 편리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용서를 경험한 이 사람, 임금님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용서는 재생되어야 한다.

용서받은 이 사람에 요청되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 재생되지 않는 용서는 심판 대상이다.

용서받았음에도 용서하지 못했던 이 사람을 임금은 어찌 했는가?
옥에 가두고 용서받았던 것이 무효화되어져 모두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늘 암송한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뒤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구원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수요일부터 40일간의 사순절기를 우리는 보내고 있다. 연례 행사가 아니라 2002년의 사순절기에 우리는 용서를 체험하고, 용서를 실천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삶이 용서의 삶으로 온전히 나타나, 네 탓을 외치는 세상을 향하여, 내 탓을 부르짖으며, 겸손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절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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