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 2:5-8)

  • 잡초 잡초
  • 318
  • 0

첨부 1


- 설교 : 박상훈 목사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나라에서 6·25 동란이 일어났던 1950년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만삭이 다 된 어떤 여인이 한밤중에 산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자기를 돌보아 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평소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던 선교사 부부에게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여인은 선교사 부부를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길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다리를 지나갈 즈음에 그만 진통이 너무 심하게 왔습니다. 도무지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 악물고서 다리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여인은 널빤지 하나를 주어서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신음하면서 거기서 예쁜 여자아이를 순산했습니다. 날씨는 몹시도 추웠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덮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갓난아기를 둘둘 말아 주었습니다. 그 뒤 옆에 버려져 있는 가마니를 끌어당겨서 바람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인은 기진맥진해서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만삭이 다 된 한국 친구의 안부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깜짝 놀라서 얼른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갓난아기는 산모의 치마와 저고리에 둘둘 싸여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산모는 벌거벗은 채 마치 그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몸을 구부린 모습으로 이미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선교사 부부가 찾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그 여인을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잘 길렀습니다. 소녀는 커 나아가면서 자기의 모습과 선교사 부부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종종 자기의 내력에 대해서 물어보고는 했습니다. 마침내 선교사 부부는 그 소녀가 12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그 아이의 과거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자기를 어머니의 무덤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소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했습니다. 그런 뒤에 소녀는 선교사 부부에게 잠시 자기 혼자만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소녀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벗은 옷으로 어머니의 차디찬 무덤을 정성스럽게 덮어주었습니다. 드디어 소녀는 어머니의 무덤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이보다 더 추우셨나요? 어머니, 그때 이보다 더 부끄러우셨나요?"
소녀는 어머니의 사랑에 목이 메어서 감격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죄인처럼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통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나타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해 주었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빌립보 교회는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만 가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못난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예수님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데 나와 너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문 6절 이하 8절에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6∼8절까지 다시 읽어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어디에서부터 출발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영광의 자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아지셨습니까? 도달점이 어디입니까? 마지막 아홉 번째는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낮은 수치의 자리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품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홉 가지 단계를 살펴보면 세 가지씩 그룹을 이루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일깨워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차례대로 생각해 보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6절과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체"는 8절에 나타나는 "모양"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체는 내적입니다. 그러나 모양은 외적입니다. 본체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양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본체는 영원불변합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양은 시시때때로 환경에 따라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의 모양과 우리가 갓난아이로 태어났을 때의 모양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또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모양은 자꾸 바뀌어져 왔습니다. 이처럼 모양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체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체는 언제나 사람입니다. 인간입니다. 본체는 이와 같이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본체는 무엇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양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시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세무궁토록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교만했습니다. "너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아담은 사탄의 말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 버렸습니다. 첫째 아담은 피조물이면서 감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그리스도 예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무엇을 비우셨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예수님이 신성을 비우셨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니까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변함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을 결코 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을 비우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하늘의 영광을 우리를 위해서 잠시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7: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못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비천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가운데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1862∼1935)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번은 선데이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어느 도시에서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열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먼저 그 마을의 시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시장님, 우리는 시장님의 도시에서 놀라운 부흥집회를 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장님께서 아시는 분들 가운데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명단을 좀 적어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심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하겠습니다."
몇 일 뒤에 요청대로 빌리 선데이 목사님에게 그 도시 시장이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장은 그 도시의 전화번호부 책을 보내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운 문제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벗겨주시고 우리에게 쉼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이 주시는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강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인간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7절 하반부∼8절 말씀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먼저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막10:45에서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주인처럼 우리들에게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처럼 우리들을 섬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7절에 쓰인 "형체"라는 말은 6절에 있는 "하나님의 본체"라고 할 때 "본체"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저 겉모양만 종의 모습을 취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십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주인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처럼 다른 사람에게 빌려 쓰셨습니다. 얻어 쓰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 남의 마구간을 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두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감람산에서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나 사람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선포하실 때에도 다른 사람의 배를 빌려서 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서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드시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다락방을 빌리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장사지내실 때도 다른 사람의 무덤까지 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셔서 종처럼 우리를 섬기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어린 시절을 겪으셨습니다. 그 키도 자라고 지혜도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셨기에 주리실 때도 있으셨고, 고단을 느낄 때도 있으셨고, 피곤하시면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셨기에 사랑하는 자 나사로가 죽었을 때 슬퍼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히4:15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에게는 결코 죄가 없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지으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말씀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는 말씀은 단순한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말씀이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인성만 보려고 했습니다. 신성은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권세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배척했습니까?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렸구먼! 저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 부모를 아는데 어찌 저가 감히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주장을 하느냐?"
그러면서 저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성 따미엔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와이 곁에 몰로카이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록도와 같은 곳입니다. 많은 나병환자들이 그곳에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따미엔은 그들에게 줄 구호물자를 많이 싸들고서 그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여 살고 있는 나환자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과 따미엔은 서로 다른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기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결국 따미엔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는 저도 저들과 똑같이 문둥병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제게 문둥병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드디어 그에게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서 몰로카이 섬을 떠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곳에 있던 나환자들이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따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즐겨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처지, 우리를 이해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자신을 멸시하는 자들과 대항해서 싸우려고 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 낮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주먹으로 치기도 했습니다.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 엄청난 멸시 속에서도 예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지만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언제까지 복종하셨습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얼마든지 이렇게 외칠 수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Stop(그만해)! That's enough(그것으로 충분해)! You know who I am(너희들은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번 본때라도 보이실 수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심문을 당하실 때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죽으시기까지 끝까지 잠잠하셨습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은 단순히 그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바사 사람들에 의해서 개발된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시대에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주인에게 반항하는 노예라든지 또는 사회적으로 큰 죄를 저지른 흉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시라는 엄청나고 지극히 높은 자리에서 못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극히 낮은 수치스러운 자리에까지 예수님은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신 것입니다.

1988년 12월 7일 터키와 인접해 있는 아르메니아에 큰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2만 5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시내에 있는 9층 아파트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수잔나와 그의 가족들도 건물더미에 갇혔습니다. 그때 수잔나의 나이는 26살이었으며, 그에게는 4살된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지진에 의해서 건물더미가 무너져 내릴 때 수잔나는 깜빡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그는 딸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방은 캄캄했습니다. 그는 건물 더미에 깔려서 도무지 움직일 재간이 없습니다. 주위를 더듬거려보니까 옆에 시누이가 이미 죽은 시체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4살된 딸아이는 이렇게 칭얼거렸습니다.
"엄마, 목말라요. 물 좀 주세요."
수잔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거려 보았습니다. 다행스럽게 빈 병 하나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수잔나는 간신히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자기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그리고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딸아이의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쭉쭉 빨아먹던 딸아이는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자 또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목말라요. 물 좀 더 주세요."
그럴 때마다 수잔나는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자기의 손가락을 계속해서 찔러 나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딸아이는 14일만에 극적으로 생존한 채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잔나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숨진 채 발굴이 되었습니다. 그의 열 손가락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잔나는 자기의 피를 흘려서 사랑하는 딸아이를 구해 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고전11:25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버려 피흘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서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갑시다. 또 예수님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것처럼, 우리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서 삽시다. 우리의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고 낮은데 두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절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절로 사랑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와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