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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의 죽음 (삼상 3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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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시대상을 알려주는 이야기 하나 먼저 드리겠습니다. 호랑이와 토끼가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며칠을 굶고 나자 시장한 나머지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토끼가 놀다가 평소 다니던 길로 돌아가다가 호랑이에게 붙잡혔습니다. 호랑이가 한 손에 토끼를 움켜 잡았는데 기가 죽기는 커녕 놀랍게도 호랑이 손을 탁 치면서 ‘놔, 임마’ 그러더랍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토끼의 반응에 호랑이가 놀래서 토끼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장은 한대 토끼를 놓쳤습니다. 하루를 기다려서 다시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제 놓쳤던 토끼가 다시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놓치지 말고 잡아 먹어야지. 그리고 지나가던 토끼를 또 한 손으로 움켜 쥐었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손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야, 임마, 나야 나.’ 그리고 가더랍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놓쳐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놓쳐서 시장기를 계속 해서는 안 되겠다고 한 호랑이가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다시 그 골목을 지키고 있는데, 이 번에는 전혀 다른 토끼가 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면 어떠랴. 기다리고 있다가 한 손으로 토끼를 덮쳤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한 손으로 탁 치면서 하는 말이 ‘놔 임마, 소식 다 들었어.’

유머는 그 시대에 상을 반영한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마 토끼가 호랑이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호랑이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대통령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 것 같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 것 같고, 가정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 것 같고, 지도자들의 권위가 말씀이 아닌 시대를 잘 반영하는 그런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사울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목치고는 무척 무겁고 어려운 제목입니다. 사무엘상 3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한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들을 원하는 한나가 기도해서 아들을 얻었고,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것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런 종으로 자라가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전반부를 조금 더 알아보면 사실상 사무엘상 전반부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방인들의 침략에 우리에게 왕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로 전반부는 사실상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이방인들처럼 멋있게 왕관을 쓰고 멋있게 왕의 옷을 입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호위하면서 저런 권위와 멋있는 조직과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왕만 세워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끊임없이 동쪽, 서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이방인들의 침략인데, 왕만 세워주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아니라는데, 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화가 나서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열 받을 일이 아니라 사실 내가 속상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 들어주어라.’들어주어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 우리가 그 당시 강해설교를 통해 우리는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기로 하셨고, 그 초대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선택은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울은 당시에 외모도 준수했지만, 겸손한 사람이었고, 마음의 그릇이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비류들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 제일 마지막 지파에서 어떻게 왕이 되느냐고 조롱하고, 면전에서 자신을 비난했을 때에도 그는 그들을 향해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왕으로 취임도 하기 전에 암몬이라고 하는 나라가 침략을 했을 때 사무엘상 11장 이하 이야기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소 한겨리를 가지고 일하던 사울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암몬이라는 군대가 침략을 해와서 우리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소문도 못 들었냐고 하니까 사울이 자기가 지금 한 겨리로 농사를 짓던, 지금 소 2마리를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소를 잡았습니다. 각을 떴습니다. 12지파에게 각을 떠서 보냈으니까 최소한 열두 조각을 냈을 거예요. 2마리 소면 적어도 한 마리당 6조각을 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파에게 그 소 조각씩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암몬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처해 있는데, 만약에 이 위태한 지경에 동참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이 소를 각을 뜬 것처럼 각을 떠 버릴 것이다. 그렇게 메시지를 전해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에서 30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남쪽 유다 두 지파에서 3만명이 모여들어서 모두 33만명의 젊은이들이 네가 당신과 사울과 함께 싸우겠노라고 모여들었습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상 11장에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울에게 성경은 이렇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 여호와의 신이 사울과 함께 하시도다. 그렇게 사울이 담대할 수 있고, 그렇게 사울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던 배경이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신, 성령이 그와 함께 있어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하고, 그에게 용기와 희망과 담대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확신이 모든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전달이 되어서 무려 33만명이라고 젊은이들이 동참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 각을 뜬 것을 보고 무서워서 온 것은 아닐 거예요. 똑같은 우리의 메시지지만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남의 말 전달하는 그렇다더라. 하는 내용에 따라서 이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나왔어도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 꼭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고 한다면 국민학교도 안 나온 사람에게 전해도 그 사람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가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에게 ‘젊은이, 예수 믿어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교회 갑시다.’ 그의 확신에 찬, 성령에 충만한 그의 전달, 선포는 그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국민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교회를 나오게 됩니다.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같은 말씀, 같은 내용이라도 전달 받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르게 전달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에 충만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는데 지금 사무엘상이 끝나는 31장에서도 여전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있습니다. 왕만 세워주면 그런 문제는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종과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 앞에 항의하듯이 협박하듯이 요구했었는데, 그렇게 멋있는 왕을 세워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무엘상이 끝나는 마지막 31장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좀 생각이 있는 분이면 이 쯤에서도 설교가 끝나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보이지 않는 메시지는 전달이 된 셈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은 불행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사울왕과 그의 세 아들, 그의 군대가 전멸하는 마음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는 일이 딱 한가지였습니다. 도망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 골짜기에 남산처럼 불룩 나와 있는 길보아산이라고 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지만 이미 백성들은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에, 싸울 전의가 없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블레셋 군대 앞에 그저 엎드려져 죽는 일 밖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없었습니다.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죽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활 쏘는 자들로 인해서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제 곧 보병이 다가오면 포로로 잡힐 지경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믿음의 용기를 내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인데, 내가 이방의 할례 받지 못한 군인에게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느냐! 그래도 마지막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성령이 떠나서 악신이 그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혔던 그 사울이 그래도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 같은 상황에서 눈꼽만치라도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면 마치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사사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세속적으로 하나님 주신 능력과 힘을 사용하다가 결국은 만용을 부리다가 하나님 주신 능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두 눈이 다 갈고리로 빼앗긴 후에 이방 우상의 신전에서 맷돌을 갈면서, 이방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종이 웃음 거리가 되고 있는 장면에서 내가 여기서 차라리 이방의 놀림거리가 되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힘을 주시기를 구했던 삼손처럼 사울은 마지막 죽으면서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병기든 자, 같은 종족, 같은 민족인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리고 병기든 자에게 경호원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다른 명령이야 거절할 수 없지만, 왕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에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자기 칼을 배에 대고서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병기든 자도 자기 칼로 따라 죽었습니다.

블레셋 보병들이 들어왔을 때, 왕이 죽었는데 어디에서 죽었느냐? 왕을 찾다가 결국 사울은 발견이 되었고, 그들은 왕의 목을 쳤습니다. 왕의 시신은 벧산 성벽에 걸어놓았습니다. 잔인하지요? 과거의 전쟁은 상대방이나 장수가 죽으면 성에다 걸어놓았습니다. 목을 걸어놓고, 시신을 걸어놓았습니다. 아주 강력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지요. 또 한번 걸리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울왕의 갑옷은 벗겨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신 바로 아스다롯 신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자기들의 신전에 사울왕의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고 기록하면서 사실 이 히브리 본문을 보면 우상들의 신전에다가 왕의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고 그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사무엘상 기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그 속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거기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너희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겼다고 자랑하고 시신을 성에 걸고 왕의 갑옷을 너희들의 신상앞에 가져다 놓았지만, 너희들의 신전, 너희들의 신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 아니냐? 그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너희들이 잠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겼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들의 신전에다가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는 기록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는 세상이 때때로 승리할 때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세상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잠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여러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성경기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원했던 것, 그것은 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세요. 우리에게 왕만 세워 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때때로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것만 해결해 주시면 다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해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이것이 무엇입니까? 때때로 그것이 여러분의 사업일 수 있어요. 이 사업만 문을 열어 주시면 하나님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정말 자식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정말 목숨을 걸겠습니다. 우리 남편의 문제, 우리 아내의 문제, 우리 가족의 건강의 문제,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소중한 문제, 그것만 해결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협박하듯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당면한 수고는 왕의 문제였습니다. 왕만 세워주면 다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까? 왕의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뒤로 밀어놓고, 세속적인 왕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문제는 뒤로 밀어놓고, 세속적인 문제만 해결해 주면 다 될 것 같이 이야기 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교훈이었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늘 왕이 죽는 이 장면도 이방의 침략으로 인해서 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오히려 그 왕 때문에 이스라엘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되지 않은 여러분의 출세, 재산, 형통은 더 위험한 일인 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 다윗과 사울을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떼어 놓고는 서로 평가가 되지 않습니다. 먼저 사울왕을 생각해 보아요. 사울왕은 끊임없이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던 사람입니다. 혼자의 방법으로 안 되면 군사 3천을 동원해서 그것도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그는 말 할 수 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그렇게 많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몸부림을 쳤던 사람이예요.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동기는 세속적인 동기입니다. 그가 있으면 네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그도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인생의 가치관은 세속적인 것에 기초를 두었고, 다윗의 인생의 가치관은 신앙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당신의 백성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벧산 성벽에 걸어놓았던 왕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자기 마을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고, 뼈를 에셀나무 아래 묻고 칠일 동안이나 왕을 애도하면서 금식하였다 그랬습니다. 나중에 사무엘하에 가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길르앗 야벳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지내고, 금식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감동을 받았어요.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제일 먼저 길르앗 야벳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야벳사람 사울이 자기를 구원해 준 것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에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 이제는 믿음을 떠나고 성령이 떠나서 안타까운 삶을 살아서 부끄러운 죽음을 당했지만 그 마지막을 사울의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벳, 그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마지막을 주님께서는 마무리 해 주셨습니다. 영예롭게 마무리 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사울왕, 그는 평생을 칼에 의지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인생도 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6장은 말합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군사혁명을 한 사람들은 비참한 말년을 맞았고, 역사는 끊임없이 그들을 난도질 하고 있습니다.

검을 가지고 힘을 일으킨 사람들은 결국 검에 의해서 비참하게 인생을 마무리 하고, 역사는 끊임없이 그들을 2번 죽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특별히 사울의 죽음을 보면서 사무엘상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토록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그래서 세웠던 사울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의 종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끌어갈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주어졌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했던 다윗에게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세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신앙의 결론은 순종입니다. 당신이 이것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것은 순종 못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홉까지는 순종했더라도 나 이것은 순종 못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지막 마무리가 멋있었습니다. 내 생명 십자가에 내어 놓는 것까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깊이 기리는 사순절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세이레동안 특별새벽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다시한 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 속에서 진정으로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승리의 삶이 오히려 우리는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성도의 삶,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과 하나님이 떠난 인생의 분명한 삶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분명한 신앙의 고백들이 여러분 삶 속에 주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 그 가운데 주님의 자녀들의 고백이 담겨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택했던 다윗을 기억하며 오늘 사울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칼로 시작했던 사울이 결국 칼로 망함을 보고 있습니다. 왕을 세우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기대했던 그들이 왕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오늘 사울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적용될 수 있도록 아버지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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