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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도 다른 나라들같이 되어 (삼상 8:10-22, 롬 1:24-25, 막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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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유명한 강해 설교가 척 스미스 목사에게는 돈 많은 부자 아저씨 한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평생 줄담배를 피우는 소위 chain-smoker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폐기종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호흡이 곤란해져서 나중에는 호롱불을 끌힘조차 없어지는 그런 무서운 병입니다.

척 스미스가 신학교 다닐 때 그 아저씨가 매우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문병을 갔습니다. 조카를 본 아저씨는 “스미스야, 그래 평생을 목회에 바치기로 했다니 참 가상하구나!”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계속 기침을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저씨는 항상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태가 심각해지면 차를 타고 팜 스프링즈라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며칠씩 머무르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마도 나는 이곳에서 팜 스프링즈로 오고가는 길 위에서 내 인생의 종말을 맞게 될 것 같구나”라고 농담 삼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인 척 스미스는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하나님께서는 폐기종보다 더 한 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죠? 저는 아주 중한 병자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고침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아저씨 저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펄쩍 뛰면서 갑자기 두 손을 내 저어면서 “오! 안돼, 그건 절대 안돼!”라고 완강히 거부하면서 거의 펄쩍 뛰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까지 거부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해서 정말 병이라도 낫게 된다면 그 후로는 평생 하나님께 매여 살아야한다는 그 부담감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병으로 살더라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병이 나아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게 하는 것보다 낫다는,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척 스미스의 아저씨뿐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정말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지배하시도록 그 주권을 주님께 이양하기만 하면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계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로 들어오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복음서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신앙이 이토록 빈곤한 이유입니다.

오늘 사무엘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요 사실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 벗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행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한 것은 단지 재산을 원한 것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거부한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왜 아버지가 속히 죽지 않느냐?”는 불효막심한 처사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식물인간화 시키고 자신이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단지 어떤 윤리적인 세상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상태를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언제 적중했습니까? 오늘 복음서에 있는 대로 빌라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앞에 내세우고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한데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결국 자신들이 왕 노릇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로 결심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과연 그때 유대인들에게만 고난 당하셨습니까? 주님의 고난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그 고난을 기억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때문에 그 고난을 당하셨고 지금도 나 때문에 여전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때 우리 주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했던 그 군중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 속에 내 목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자행자지하는 내 삶 때문에 주님은 거부당하고 계십니다.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은 단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이나 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내 죄를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새롭게 나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2.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면서까지 왕을 요구했습니까?

(1) 여호와 신앙의 단순 소박한 삶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여호와만을 믿는 믿음이 그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의 증인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그 화려한 이방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런 삶을 누리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매력을 느끼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명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남들처럼 단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려는 것, 요새 말로하면 소위 육신적인 웰빙이 목적이 되면 여호와 신앙은 거추장스런 걸림이 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야 한다”는 이 강한 욕망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 가득 차 있는 세속에 대한 욕망이 우리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2)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결국 국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의지하는 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강한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주셨는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역사를 내려오면서 이방인들과 숱한 전쟁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해주셨는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전쟁이 일어나면 왕이 그 전쟁을 지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좁은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넓은 길 가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심지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자기 부인도 자기 십자가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을 거부합니다. “내 마음대로”-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이 욕망을 이루어주지 않는다면 주님이라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3)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도 그 명령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마침내 소원을 이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구렁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게 되고, 낙원을 상실하고, 영원한 사망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왕의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왕의 제도가 단지 나쁘기만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핑계로 하나님에게서 떠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로마서에 보면 “내버려 두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하나님께 버려지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제일, 그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받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어떤 결과가 오게 될 것을 누누이 말했습니다. 그 결론이 18절에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다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이 무서운 말을 듣고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19절에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자기들의 뜻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신약 복음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라는 강한 요구를 물리치지 못한 로마 총독 빌라도가 결국 예수님을 넘겨주고 나서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자신들과 후손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도 좋으니 이 예수만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니로소이다”라고 한 이스라엘이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후 70년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망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를 유랑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무엘이 보여주었습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 말씀이 무엇이든지 겸손하게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의도적으로 자꾸 외면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버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자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십니다. 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반드시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하나님과 코드가 통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만나실 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이 축복된 자리에 바로 여러분이 서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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