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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 훈련(3) : "선한 싸움" (딤전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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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그 치열한 전쟁터, 인생>
얼마 전에 월드컵 예선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하나의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북한과 일본이 벌인 시합은 시종 팽팽한 긴장과 스릴이 넘치는 축구 전쟁이었습니다. 운동 경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 대학 합격자 발표가 다 끝이 났지만 입시도 전쟁이었습니다. 입시생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치르는 전쟁이었습니다. 입시뿐만 아니라 취업하는 것도 전쟁이고 직장 생활도 전쟁이고 사업도 전쟁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사(人生事) 모두가 다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 생활도 전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엡 6: 12을 보면 우리의 전쟁이 인간을 적대자로 하는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적 전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확실히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와 싸우는 무서운 전쟁인 것입니다(벧전 5: 8). 우리가 일생 동안 싸워야 할 전쟁들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 힘든 전쟁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선한 싸움'의 두 가지 결정적 요소>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과거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했던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거룩한 직분까지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자기 고백을 한 직후에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일생 동안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자신을 본받아 디모데 역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싸움'은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지만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일까요? 사실, 싸움하면 다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싸움은 상대방을 제압해서 이기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에 대개 나쁜 이미지부터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오직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맺는 것만이 선하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선한 싸움'을 싸우라니요? '선한 싸움'은 도대체 어떤 싸움일까요?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선한 싸움은 두 가지 사실에서 결정됩니다. 첫째, 싸움의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싸우냐 하는 것입니다.

① 「싸움의 동기」: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싸우는 싸움입니다. 
먼저 싸움의 동기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싸움이 욕심이나 경쟁심에서 오는 것이라면 선한 싸움이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에서 비롯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거룩한 동기에서부터 오는 영적인 싸움만이 선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세요.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여기서 중요한 말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에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전에 디모데에게 내린 예언을 따라 그 예언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예언이란 어떤 것일까요?

행 13: 1-4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보냄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 있던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선교 사명을 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해서 금식하고 기도한 뒤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해서 선교사로 세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입니다.

누군가 거룩한 직분을 맡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장차 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라고 말씀했을 때의 예언은 디모데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아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벌이는 가지가지의 싸움이 거룩하고 선한 싸움이 되기 위하여 그 동기와 목적이 거룩하고 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세속적인 욕심과 무익한 경쟁심 때문에 육적인 싸움을 벌인다면 그것은 절대로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서 난 거룩한 동기와 목적이 있을 때에만 우리가 벌이는 싸움은 선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벌이는 싸움은 단지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뜻을 따라 싸우는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보면 손해도 보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왕따가 될 수도 있고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이게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실업가 교인이 은혜를 받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금 내는 일에 정직해야 하겠다 싶어서 조금의 거짓도 없이 정확하게 셈해서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목사님이 장하게 생각해서 그 교인을 위해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직하게 사업을 했으면 하나님께서 사업을 더욱 크게 번창하도록 도와주셔야 할 터인데 IMF가 찾아와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몹시 민망스럽게 생각한 목사님이 혹시 그 교인이 시험에 들어 교회에 안나오나 걱정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해서 그 교인을 격려하는데 대답이 훌륭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한번도 정직하게 사업을 한 적이 없다가 모처럼 정직하게 세금을 냈다가 망했으니 후회가 없습니다! 어차피 망할 것, 이렇게 부끄럼 없이 하나님 뜻대로 정직하게 하다가 팍삭 망했으니 떳떳하고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청년 실업가는 다시 재기해서 사업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싸움은 단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더 높은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하여 하는 얄팍한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싸움입니다. 때로 손해도 보고, 실패도 하고, 핀잔도 받고, 왕따를 당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롬 12: 2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또한 엡 4: 22-24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옳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유혹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벌이는 싸움이 선한 싸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싸움의 수단」: 선한 싸움은 '믿음'과 '양심,' 두 무기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이 작은 보트 위에서 노를 젖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보트를 타고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힘껏 노를 저어갈 때 두 노가 다 중요합니다. 만일 한 쪽 노만 젖고 다른 쪽이 쉬고 있을 때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공회전(空回轉)만 하게 됩니다. 두 노를 함께 사용할 때 물살을 가르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과 '양심'이라는 무기를 함께 쓸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가졌는데 양심이 없으면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은 바른데 믿음이 없다면 그 역시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에 믿음 없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 못지 않게 예민한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과 양심을 다 지닌 사람만이 그리스도인다운, 선하고도 거룩한 싸움을 싸울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세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이 '믿음'(PISTIS)과 '양심'(AGATHE SYNEDEISIS)이라는 두 무기로 싸우는 싸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거룩하고도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믿음과 양심을 다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양심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양심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믿음 따로, 양심 따로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을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서는 믿지 않는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불법, 편법이라고 할지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다 쓸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싸움이 거룩하고, 선하고, 고상한 싸움이 되지 못하고 추하고, 악하고, 저급한 싸움이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양심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과 사회 생활이 접목(接木)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실천이 이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앎과 행함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양심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도 양심이 부패한 사람은 진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미국 나성(LA)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교도소에서 검사와 십대 소년 사이에 질문과 답변 공세가 오갔습니다. 16세 된 청소년이 죄를 지어서 유치장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 청소년이 손을 들고 검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가 만일 사람을 죽이면 사형을 당하게 됩니까?" "지금 네 나이는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당장은 사형 당하지 않는단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죽일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그 경우에도 역시, 현행 캘리포니아 법에 따르면 너는 사형을 당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 나이가 아직 16세가 안 되었으니 제가 지금 누군가를 죽일 경우 사형은 당하지 않고 제 나이가 25세 될 때 석방될 수 있겠군요. 그렇지요?" "옳다." 그러나 검사는 소년에게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소년의 양심이 너무나 부패해서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혹은 '인간의 탈을 쓴 늑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딤전 4: 2에는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아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양심이 죽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지요. 윤리 도덕 의식이 완전히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양심이 잠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9-20절 말씀을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破船)하였는데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두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주어서 징계를 받게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표현은 출교(黜敎) 처분, 즉 교회에서 쫓아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이 믿음에는 파선했고 양심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출교'라는 중징계를 내렸다는 것이지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후메내오'라는 이름은 딤후 2: 17에 또 한 차례 나오는데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믿을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던 사람이지요.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유명한 알렉산더 대제(Alexander the Great, 356-23 B.C.)와 이름이 같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 앞에 젊은 군인 한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전투가 한창 진행중일 때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목으로 심문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산더 대왕은 이 혐의가 사실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군인은 두려움에 떨면서 사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알렉산더 대제는 젊은 군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군인의 이름은 '알렉산더'였습니다. 자기와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을 안 알렉산더 대제는 한참 동안 군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이제 자네의 비겁한 행동을 바꾸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든지 해라!" 젊은 군인은 자기와 이름이 똑같은 '알렉산더'였지만 도무지 그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 일갈(一喝)이었습니다!

딤후 4: 14에 보면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또 한 차례 나오는데 구리 장색(匠色)으로서 바울에게 큰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입혔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행 19: 33에 보면 또 한 사람의 알렉산더가 등장하는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일어난 소동과 연관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이 세 사람의 알렉산더가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알렉산더가 모두 '에베소'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건대 동일 인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후메내오나 알렉산더가 모두 믿음을 버리고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거짓 교사들'로서 에베소 교회를 넘어뜨리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아닌 인간의 육정과 파당심에서 비롯된 악한 싸움을 했습니다. 선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싸움을 했던 것이지요!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일생 동안 선한 싸움을 벌였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딤후 4: 7-8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처럼 이제 디모데에게도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정반대 되는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였습니다. 그들은 악한 싸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싸움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믿음과 양심을 잃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당부의 말씀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인생이 끝이 없는 싸움이라고 한다면 먼저 싸움의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어떤 싸움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싸우십시오!

그 다음에 믿음과 양심은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한 두 개의 필수적인 무기임을 기억하십시오!  '믿음 없는 양심'은 공허(空虛)합니다. '양심 없는 믿음'은 맹목(盲目)입니다. 믿음은 양심과 결합될 때에만 능력이 있습니다. 양심은 믿음과 하나가 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사업에는 성공해서 돈은 많이 벌었는데 믿음과 양심은 잃어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명예와 권력은 얻었는데 역시 믿음과 양심은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이른 바 B고등학교에서 교사 한 사람이 학생의 답안지를 대리 작성해서 점수를 조작한 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알아보니 B고교는 우리 감리교 계통의 유명한 미션 스쿨이었습니다. 학생의 아버지가 높은 신분이라는 이유와 동향(同鄕)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사나 학생이나 학생의 부모나 다 믿음과 양심을 팔아먹었습니다. 점수는 조금 올렸는지 모르지만, 아니면 댓가성 뇌물을 받아 마음이 조금 기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믿음과 양심은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무수히 많이 일어납니다. 선거철만 되면 법대로 해서 이기려고 하는 후보들은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거에 이기고 높은 명예와 권세가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믿음과 양심은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선거에는 졌어도 깨끗한 방법으로 선전(善戰)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패배가 훨씬 더 빛납니다!   

여러분,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믿음뿐만 아니라 좋은 양심의 소유자들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간 역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이 있기에 무게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양심'이 '이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가장 뚜렷한 표시임을 알기에 양심에 떳떳치 못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십시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양심의 거울을 밝히 닦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 선한 싸움의 궁극적인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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