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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 (마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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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구약의 많은 명령들과 금지 사항들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답변을 가지지 못하면 대체로 두 가지 잘못된 태도 중 하나에 빠지게 됩니다.

한 가지는 지금은 은혜의 시대니까 모든 율법은 필요 없다고 생각, 곧 ‘율법폐기론’적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라는 말씀을 곡해해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지도해주시는 내적인 음성이라 강조하기도 합니다. 좀 더 지나치게 나아가서 성경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고 더 신령한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잘못된 태도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 즉 ‘율법주의’적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 중에는 유월절도 지켜야 하고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바른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17-48절 전체가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인데, 17-20절은 이 주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고, 21-47절까지는 6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했으며, 48절은 결론에 해당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통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을 지칭할 때,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 말하기도 하고, 줄여서 율법과 선지자라 하기도 하고, 더 줄여서 율법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있었던 장로들의 유전을 깨뜨린 적이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규례를 지키지 않으셨고, 안식일도 깨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구약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권위를 나타내셨고, 그 후에는 새 계명을 제정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율법이나 선지자, 곧 구약을 파기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하여 오셨다고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완전케’(plhrw'sai)한다는 단어는 ‘달성하다,’ ‘세우다’ ‘(순종함으로써) 확증하다’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 보이다’ ‘완전케 하다, 채우다, 그 궁극적인 목표를 가져오다,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예수님은 율법이 원래 목적하고 있던 그 본래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내며, 율법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았던 것을 달성하러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 구절뿐만 아니라, 인물들을 통해 예표 되었던 메시아의 품성이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풍습에 담겨 있던 모든 희미한 메시아적 의미까지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모든 그림자의 실체며, 모든 모형들의 원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미세한 기록까지도 모두 성취하신 율법의 성취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입법자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율법 하에 오셔서 그 법을 다 이루면서 사셨습니다. 아담이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당신님의 순종의 삶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율법이 지향해오던 목적들이 다 성취되었고,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를 다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율법에 잘못된 것이 있어서 바로 잡아 수정했다거나 부족한 무엇을 보충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림자나 모형 안에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숨겨져 있던 것들이 실체이며 원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무시할 수 없으며, 율법은 은혜와 대치되는 부정적인 어떤 개념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알아감에 있어서 그림자와 모형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실체를 좀 더 풍성하게 알기 위해서 그림자와 모형은 나름대로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없다면 구약성경은 모호한 그림자나 모형으로만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구약성경에 비춰보지 않고서는 신약성경을 참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18절은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는 주절이 두 개의 조건절에 의해 한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절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까지”인데, 이 구절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을 표현하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방식입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어는 점과 획이 하나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른 단어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면 전체적인 의미가 달라져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의 그 본래적인 의미가 훼손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두 번째 조건절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입니다. 모든 것이란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취되는 때에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율법에 뭔가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율법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던 율법에 뭔가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에 있어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이후에도 구약은 신약과 동등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신약에 비해서 결코 덜 중요하다든지 가치가 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본래 의도하셨던 의미나 목적도 결코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와 모형인 율법은 실체나 원형의 등장과 함께 이미 그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그 ‘기능’에 있어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대속제물이요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더 이상 제사제도가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고, 후에는 성전도 없애버리셨습니다. 이제 제사제도와 성전과 관계된 세부적인 율법 조항들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 안에서 더욱 온전하고 분명하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과 같은 절기들 역시 참 안식이신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식일과 같은 특정한 ‘날’ 자체가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주님을 통해 참 쉼을 얻게 됨이 드러났습니다. 유월절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제 구약의 모든 율법은 우리에게 직접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되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7-18절에서는 ‘율법’이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17-18절의 율법은 성취되기 이전의 율법을 말하고, 19절의 계명은 성취된 율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지고 분명해진 의미로서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구약을 직접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유월절을 지키라거나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떼먹으면 도둑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든지 금기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서 좀 더 경건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철저한 오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취된 의미로서의 율법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신약은 유월절 묵은 누룩, 곧 죄악 된 습관을 벗어버리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또 불신자들과는 분명히 구별된 삶의 자세를 명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그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께 산제사로 드려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외형적으로 보였던 율법은 더 내면화되고 그 범위나 정도에 있어서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율법 폐기론’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셨습니다. 

20절은 ‘율법주의’를 반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참 성실하게 율법을 지켜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채소 한단을 사더라도 돈으로 환산한 다음에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구약에는 일 년에 한 번 금식을 명했지만, 그들은 더 열심을 내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일이 무엇인가를 방대하게 연구해가면서 철저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식하는 자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키고 십일조를 지킴에 있어서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에서 작은 자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의’를 알지도 못한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철저한 외적 행위에 기초한 의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내다보았던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기 의입니다. 그 의는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의로서는 천국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에 기초한 의가 아닙니다. 주님을 영접한 그 바른 관계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자기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이 쓸모없음을 시인함으로서 덧입게 된 주님의 의를 말합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로 말미암아 덧입은 그 의는 우리의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뛰어납니다.

가급적이면 신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말씀도 문자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을 예수님 잘 믿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열정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오류입니다. 율법의 문자적 조항에 메여서 말씀의 근본정신과 목적은 잃어버리고, 말씀을 지켰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삽니다. 종교적인 활동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태도는 잘 되어봤자 바리새인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의 결국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대할 때 그 결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태도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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