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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하시는 하나님 (마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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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표현은 기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봄에 있어서 누가복음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이 기도의 말씀은 누가복음에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눅 11:9-13에 오늘 본문과 거의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다음에 기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주기도문이 있은 다음에 바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누가복음과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기도문이 나온 후에,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이 나오고, 그런 후에야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 말씀의 위치를 이렇게 다르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마태는 마태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운데에서 어느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누가는 누가대로, 마태는 마태대로의 그렇게 하고자 한 이유를 발견해 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성숙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오늘은 오늘의 본문의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왜 이곳에 배치가 되었는지를 생각?봄으로써,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와 폭을 넓히는 동시에, 기도가 가져다주는 신앙적 유익을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오늘의 본문을 누가처럼 주기도문 뒤에 바로 이어서 두지 않고, 중간에 다른 내용을 말씀한 다음에 이 말씀을 두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주기도문과 오늘 본문 사이에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두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과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또 잘 하라는 내용과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먼저 염려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어떤 일에 염려하는 가운데 그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든지, 건강이 안 좋다든지, 인간관계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든지, 그 외에 여러 다른 고민거리를 가지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기도 하고, 또 그러다보면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염려하던 일들이 해결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스스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염려하면 안 되지.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기도해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게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렇게 염려하는 일을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염려하는 우리의 모습과 이 일로 인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연결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대로 염려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봅니다. 이때의 기도의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 기도의 모습으로 제시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로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기도하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여 정죄하는 일을 금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늘 자기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게 하는 그러한 의미의 가르침인 줄 압니다. 이런 모습을 기도와 관련시켜서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내 눈의 들보를 찾고자 하는 그러한 내용도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만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좁은 의미의 기도 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허물을 찾고자 하고, 그래서 늘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모습을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오늘 본문에서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 번째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라는 가르침과 기도의 관계를 보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깨달아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개나 돼지를 함부로 규정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거룩함의 자체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오늘 본문에서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기도의 유형이 이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표현하시기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 다양하게 말씀한 사실은 기도하는 경우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에, 그 상황과 경우에 꼭 맞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대화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25:11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말의 귀한 모습을 말씀합니다. 사람과의 대화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릴 때에는 경우와 상황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모습으로 기도를 다양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막연한 기분으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리는 구해야 할 때 찾지나 않는지, 찾아야 할 때 문을 두드리지나 않는지, 혹은 문을 두드려야 할 때에 구하는 기도를 하지는 않는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어서 마태는 오늘 본문을 주기도문 바로 다음에 연속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제시한 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도가 늘 하나님 앞에서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기도가 되도록 하십시다.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가급적이면 반드시 경우와 상황에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의 양 옆에도 두 행악자들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이하 눅 23:39-43). 이 두 행악자들은 모두 예수님께 뭔가를 청원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종의 기도와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행악자의 청원에 대해서 한 사람에게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응답받지 못한 행악자의 청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러한 청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행악자는 어떻게 청원하였습니까? 이 행악자는 예수님께 청원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청원하는 동료 행악자를 꾸짖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동료를 꾸짖고 난 뒤에 예수님께 이렇게 청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렇게 청원하는 행악자에게 예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행악자의 청원에 대해서 감격하여 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경우와 상황에 합당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을 감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격하시면 응답은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늘 하나님 앞에서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기도가 되도록 하십시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파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흔히 “황금률(The Golden Law)”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변용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에는 유명한 두 랍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샴마이라는 랍비고, 다른 한 사람은 힐렐이라는 랍비입니다. 샴마이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이라는 데에 대한 의식이 아주 강한 랍비였고, 그래서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오늘날 표현대로 하면 아주 보수적인 성격의 랍비였습니다, 반면, 힐렐이라는 랍비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도 꽤 기울이는 이른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랍비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방인 한 사람이 랍비 샴마이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제가 한 발로 서있는 동안 유대교 율법을 설명해 주면 유대교에 입교하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이 때, 랍비 샴마이는 몽둥이로 이 청년을 내 쫓았다고 합니다. 이에 이 청년은 다시 랍비 힐렐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힐렐은 이러한 청년의 장난기 있는 요청에 대해 대답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너에게 행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다 이를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랍비 힐렐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같은 내용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힐렐의 말씀은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라”라는 좀 소극적인 차원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으로 대접하라”는 적극적인 차원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률의 말씀 앞에 붙어 있는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어떤 결론을 맺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황금률의 귀한 말씀은 좁게는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기도에 관한 내용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의 결론이라는 관점에서 이 황금률에 나타난 기도의 정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황금률에 나타난 정신은 바로 기도의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하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말씀하면서, 하나님을 이 세상의 아버지와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나타난 요지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는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바로 뒤이어서 황금률의 말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주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말씀의 공통점은 바로 “준다”라는 사실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주라.” 이렇게 기도와 황금률의 내용의 공통점은 “준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는 사람은 남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도 남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지녀야 할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신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기도의 정신으로 기도를 하셨고, 또 대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1:41 이하). 이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체험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주님은 이 기도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의 궁극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기도의 목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좋은 것으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만이, 남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여기에 바로 기도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되,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기도를 하도록 하십시다.
기도를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체험하십시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웃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늘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늘 기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릴 때에, 상황과 경우에 합당한 분별 있는 기도를 드리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해야 할 때에는 구하게 하시고, 찾아야 할 때에는 찾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문을 두드려야 할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두드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감격시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좋은 것으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체험하게 하시고,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모습을 간직하여 우리들도 이웃들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하는 손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귀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는 감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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