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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눅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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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2천 년 전 오늘,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어떤 일들이 생겼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세 가지 답을 같이 찾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첫째, 예루살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곳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부활 사건이 일어난 곳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발생한 곳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영적 수도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도 예루살렘을 가장 소중한 곳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도시를 들라고 하면 워싱턴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언론사들의 특파원들이 워싱턴에 제일 많이 몰려서 매일같이 워싱턴 발 뉴스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도시는 시대에 따라 변해 왔습니다.
중세까지는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그래서 ‘세계의 심장에 꽂은 복음의 화살’이라고 말합니다.
진기스칸 시절에는 몽골의 수도가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로 들끓었습니다.
로마의 교황청에서도 몽골에 자주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 때 이들이 적극적으로 선교를 했더라면 몽골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만 기회를 놓쳤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은 이와 같이 시대를 따라 변합니다.
우리나라의 중심도 통일신라 때는 경주, 고려 때는 개성이었습니다.
조선왕조 때부터는 서울이 변함없는 중심지였는데 신행정도시 건설에 따라 앞으로 다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이 계속해서 세계에서 영향력이 제일 강한 곳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세계문명의 중심이 자꾸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중국의 영향력이 커가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영적 세계의 중심도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로마의 철저한 파괴를 겪었습니다.
지금까지 스무 번이나 통치자가 바뀌었고 여러 번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평화의 터’인데 이름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서 있던 그 자리에는 이슬람교 대사원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황금빛 돔을 안고 있는 큰 건물이 중앙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이슬람 사원입니다.
기원후 630년대 아랍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그 자리에 이 사원을 건축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중심도시인 메카, 그 다음 중심도시인 메디나에 있는 사원과 함께 이슬람교의 3대 사원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3장 14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것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것은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곳, 기독교 인구밀도가 가장 희박한 곳이 되었습니다.
35절의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모두 그 때 예루살렘의 지도층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발생해서 로마, 유럽, 미국, 한국을 거쳐, 중국, 이슬람, 그 다음 예루살렘을 종착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영적 사건이 일어날까 기대를 모으는 곳이 되었습니다.

만일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예루살렘은 구약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 고대 도시들 가운데 하나, 유대교의 중심지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신약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지고 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3,000년 전의 도시로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곳이 예루살렘 말고 또 있습니까?
과거의 도시에서 끝나지 않고 현재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를 받아들이는 가정, 그를 받아들이는 도시, 그를 받아들이는 나라, 그를 받아들이는 시대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한 개인에게 들어가면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지위와 많은 물질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절은 삭개오가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 가장 배척 받는 직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이 점 때문에도 열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 삭개오가 사는 곳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가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삭개오는 탐욕스러운 세리장에서 후하게 베푸는 자선가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움츠리고 살던 삭개오가 기쁜 얼굴을 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소외된 삶에서 참여의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복음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여러 곳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복음이 그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이 변합니다.

로마 군인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일을 통해 성령이 그 집에 임했습니다.
그 집에 모여 말씀을 듣던 고넬료의 가족들, 친척들, 가까운 친구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게 되었습니다.(행10: 46)
평범한 백부장이었던 고넬료가 최초의 이방인 신자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각종 직능 별로 선교회를 조직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모인 선교회는 누가 선교회라는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현역이나 예비역 군인들, 또는 군과 관계된 분들이 모인 선교회는 고넬료 회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고넬료는 이와 같이 잘 믿는 군인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간수의 집에 바울과 실라를 통해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간수와 그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은 후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지역은 변화가 있습니다.

요나를 통해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니느웨,
바울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유럽,
구원을 받았고 복을 받았습니다.
120년 전인 1885년 부활절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
이 복음을 통해서 여러 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지금 독도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로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어제 어느 교회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독도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 땅’이라고 크게 플래카드를 붙여 놓았더군요.
일본이 이렇게 비양심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역사 왜곡을 참회하는 순례행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일본 교회에 WAO라는 단체가 있는데 WAO는 'We Are One in Christ,'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단체 소속 목사와 평신도들이 3월에 한국에 와서 독립기념관과 제암리교회 등을 순례하고 대신대학교에서 공개강연을 가졌는데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밝히고, 화해의 사절로 일본의 죄과를 깊이 회개하며 사과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양심적인 발언이고 용기 있는 발언입니다.
이 선교회의 단장인 동경선교교회 담당 이리즈끼 히데아끼 목사는 ‘나를 포함해서 전후세대들은 불행하게도 정확한 과거역사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고 말하고 ‘기독교인이 되고서야 비민족적인 침략사상과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일본이 저지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이들의 양심을 깨워준 것입니다.
복음이 이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일본에 복음이 더 강하게 들어가 이런 사람들이 많았더라면 독도문제 같은 억지 주장은 기를 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면, 오늘날에는 말씀이 들어가면 사람이 변합니다, 가정이 변합니다,
사회가 변합니다, 나라가 변합니다, 시대가 변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종려주일에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십니다. 본문 앞에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지금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을 적고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정중한 말투를 보면 이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봐 예수님을 배척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단체에나 이런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이들의 말은 ‘예수님, 우리가 보니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던 일입니다.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헤롯에게 잡혀 죽으면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서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런 우정 어린 충고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고맙소. 여러분의 충고에 따르겠소.’ 했습니까?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헤롯을 두고 “여우”라고 한 것은 헤롯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가였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 말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만용입니까? 오기입니까? 체면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존심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인간적인 이유들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삼일 후에는 부활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은 죽음을 향한 행진이었습니다.
동시에 죽음 이후를 행한 행진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였으면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의 충고에 따라 방향을 돌렸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진리 위에서 소신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35절에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문을 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나는 저 좋은 상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실컷 고문하십시오.’라고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3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는데 믿음 가운데 가장 강한 믿음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핵무기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주님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일, 모레, 변함없이 갈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데 예루살렘까지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골고다까지 따라야합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곳,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운 곳에 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이 놀라 항의했겠지요.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한 마디 했습니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귀 새끼를 내주었습니다.(눅19: 28~35)
그 두 제자, 신이 났었겠지요.
그 두 제자로부터 이 일을 전해들은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신이 났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합니다.
제자들은 더 신이 나고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말씀의 방향을 잠깐 돌려 이 나귀 새끼의 임자들을 봅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소중한 재산인 나귀 새끼를 왜 그렇게 순순하게 내줄 수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요즘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예수라는 인물이 쓰겠다고 하니까 영광으로 알고 그대로 내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이들은 “주께서 쓰시겠다.” 한 마디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귀 새끼를 내 주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네 재물을 내가 좀 써야하겠다.’ 할 때 이 나귀 새끼 주인처럼 순순히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네 시간을 내가 좀 써야하겠다.’ 할 때 순순히 자기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네 자녀를 내가 좀 써야겠다.’ 하시면 자녀를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너를 좀 써야 하겠다.’ 하시면 순순히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일이 점점 이상하게 되어갑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는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들 신앙의 단계에서도 이런 일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의심이 찾아옵니다.
바로 이때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다음 단계로 진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의 입례찬송,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각할 때에
근심이나 걱정을 사양할 수 있을까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가겠네.

빌라도의 뜰에선 주를 생각할 때에
수치됨과 아픈 것 못 견딜 수 있을까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

갈보리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에
나의 받는 괴롬을 비교할 수 없으리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이 찬송을, 특히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 가겠네’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하는 대목을 ‘아멘’ 하는 마음으로 부르셨습니까?
여기까지를 아멘으로 부르는 사람만이 이 찬송의 4절,

무덤에서 부활한 주를 생각할 때에
환난이나 죽음도 두려울 것 없으리
승전가를 부르며 주를 따라 가겠네

이 내용을 떳떳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승전가를 부르며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농가에 불이 났습니다. 불은 뜰 안에 있는 닭장에도 옮겨 붙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을 끈 다음에 보니까 암탉이 한 마리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 암탉을 치우니까 그 밑에서 병아리들이 털 하나 그슬리지 않은 채로 삐약삐약 하며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 우리들을 모아 자신은 죽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의 날개 아래에는 안식과 보호와 구원이 있습니다.’ 말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36편 7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1장 5절은

새가 날개를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와 같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 받고 있음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34절 끝부분에 있는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이 말씀은 신학자들이 중요한 논쟁으로 삼고 있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는 예루살렘에 오늘 한 번 들어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때문에 ‘아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셔서 전도했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쟁은 신학자들에게 맡기고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 한 두 번해서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여러 번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또 복음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일단은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하지만 그 다음에는 배척하고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비통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 바로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부활 이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일의 의미와 교훈을 잘 알고 이 주간, 고난주일을 보내고 오늘과 내일과 모레, 내가 해야 할 일을 의연한 모습으로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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