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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나귀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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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종려주일의 네 가지 풍경>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 위에 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영광과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광과 승리의 왕으로서 맞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 동안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사순절의 클라이맥스가 고난주간이지요.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경건하게 보내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크게 네 가지 풍경이 눈에 띕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감람산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벳바게는 히브리말로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무화과나무가 유달리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감람산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 벳바게였지요. 예수께서 벳바게 마을에 제자 두 사람을 보내어서 나귀 한 마리와 그 곁에 있는 새끼까지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경우 "주님께서 쓰시려고 한다"고 대답하라고도 이르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4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 선지자란 바로 스가랴였습니다. 슥 9: 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되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왕상 1: 32-40에 보면 다윗이 세상을 떠나기 전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여 노새를 타게 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노새를 타고 기혼으로 내려가 온 도성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뒤 기름부음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나귀나 노새가 대부분 훨씬 크고 강건한 말로 대체가 되었습니다. 나귀나 노새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등의 잡일에 동원되었을 뿐이지요. 군왕이나 권세자들은 주로 말을 사용했지 나귀나 노새를 타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말이 아닌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왕은 왕이로되 위대한 정복자나 영웅이 아닌 겸손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더욱이 본문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눅 19: 30을 보면 예수께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는 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순진하고 미숙하고 겸손한 짐승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말에 비하면 새끼 나귀는 덩치도 작고 속도는 또 얼마나 느려 터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클수록, 빠를수록 좋다는 세상 원리와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달리 겸손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줄 세상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하늘의 왕으로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정복자의 건장한 말 대신에 작고 초라한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어미 나귀가 길을 안내하는 대로 무작정 길을 따라 나선 새끼 나귀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던 예수님의 모습, 종려주일에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가 폈습니다. 이것은 왕하 9: 13에 나오는 말씀, 즉 예후가 아합왕의 후손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어서 사마리아에 입성했을 때 무리가 했던 행위와 비슷합니다. 환영과 지극한 존경의 의미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던 것이지요. 예루살렘 시민들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존경하는 표시로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던 것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요 12: 13 말씀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았다고 되어 있지 않고 그냥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종려나무 가지를 길바닥에 깔았든지 흔들었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려나무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였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할 때 시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깔거나 흔들거나 하면서 예수님을 승리의 왕으로서 뜨겁게 환호했던 것입니다!

넷째로, 앞에 서서 가는 무리나 뒤에 따라오는 무리나 할 것 없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절) 하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본래 왕이나 하나님을 향하여 "제발 도와주세요, 구해주세요" 라는 뜻이었습니다(왕하 16: 7; 시 20: 9, 118: 25-26 참고).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다윗의 후손과 같이 지체 높은 분을 환호할 때나 아니면 축복을 빌 때 사용하던 감탄사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호산나'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서 연호(連呼)하며 예수님께 구원해달라, 축복해달라 간청하는 감탄사이지요!

<나귀에게 배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10절의 말씀처럼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며 온 성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보통 군왕의 입성과 구별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봅시다.

예루살렘 군중들이 아무리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다 깔거나 흔들든지 하면서 '호산나!'를 연발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세상의 군왕과는 달랐습니다! 겸손의 왕으로서 입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새끼 나귀입니다! 정복자의 건장한 군마(軍馬)를 타지 않으시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의 초점을 새끼 나귀에게 집중해봅시다.

종려주일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은 제자들도 아니고 무리들도 아닙니다. 나귀들입니다. 그것도 새끼 나귀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먼저 예수님의 12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메시아의 길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군중들이 열렬히 환영해대니까 자기들도 으쓱거리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잠시 흥분해서 "야,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인기 있는 분인 줄 몰랐다" 하면서 동상이몽(同床異夢), 예수님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권세를 잡을 때 누가 더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까, 누가 더 큰상을 받을까, 이른바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더 관심이 가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길이 섬김의 길이요, 고난과 희생의 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누구 하나 곁에서 예수님을 지켜내지 못했으며 자기 몸 하나 보전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리들의 경우는 더 고약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호기심은 많았지만 제자들처럼 헌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기적을 행하시고 인기가 높았을 때에는 예수님 뒤를 반짝 따랐지만, 예수께서 기대와 달리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가차없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사실 무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각종 기적을 목격했고 또한 그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새로운 면모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흥분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들은 메시아로서 엄청난 일을 해내실 분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줄 영웅으로서 환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무리들은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서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호산나!'를 외쳤던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똑같은 입술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제자들도, 자기의 겉옷을 땅바닥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아우성을 쳤던 무리들도 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오직 하나, 새끼 나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새끼 나귀는 예수님을 등위에 태우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다음으로 뚜렷하게 부각되는 주인공은 난리법석을 떨었던 제자들도 무리들도 아니었고 가냘픈 새끼 나귀였다는 사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새끼 나귀에게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① 새끼 나귀는 순종했습니다.
나귀는 주인에게 매여 있다가 예수님이 쓰시기 위하여 선택되었습니다. 물론 짐승이니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겠지만 본문에 나타난 나귀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등위에 태우고 예수님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자는 대로 어느 곳이든 기꺼이 갔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고삐를 거머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묵묵히 순종했던 나귀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② 새끼 나귀는 기꺼이 섬겼습니다.
나귀에게서 또 두드러진 모습이 무엇입니까? 섬기는 모습이 아닙니까? 아직 한 번도 사람을 실어 본 적도 무거운 짐을 져 본 적도 없는 새끼 나귀가 예수님을 자기 등위에 태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예수님을 모시고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무겁다고 내려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새끼 나귀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섬기는 성도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③ 새끼 나귀는 겸손했습니다. 
나귀는 누가 영광 받는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땅바닥에 펴는 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열렬히 흔들어대며 '호산나' 하고 외쳐대는 무리들의 환호성도 귓전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군중들이 질러대는 고함소리나 소음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움찔하며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이 지시하는 대로 예수님을 자기 등에 모시고 걸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나귀의 착각과 자만을 경계하며>
그러나 나귀에게도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귀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나귀의 속편 이야기를 꾸며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마음 한 가운데 뿌듯한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고 하루해를 시작한 것입니다. 나귀는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우물곁에 보니 사람들이 쭉 모여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지." 속으로 생각하며 우물곁으로 점잖을 빼며 다가갔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겉옷을 벗어 땅에 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나귀는 화가 나서 막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보았으며 어떤 사람은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고함까지 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나? 다 이방인들인가?" 나귀는 속으로 생각하며 시장 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시장에 가면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를 알아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쪽에서도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나귀가 시장 한 가운데로 한껏 폼을 내며 걸어갔지만 어느 한 사람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종려나무 가지는 어디에다 두었나? 당신들은 어제 나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던지지 않았소!" 나귀는 소리를 버럭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웃기만 할 뿐 아무도 나귀를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거리에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다 해주었습니다. 그 때 엄마 나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너는 그냥 보통 나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니?"

저는 이 우화를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은 제가 예수님을 모시기 때문이지 예수님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 64: 6의 말씀처럼 예수님 없는 우리는 아무리 덕을 쌓고 수고를 많이 해도 '더러운 옷'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모신 나귀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내는 환호성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혹시라도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착각이나 자만에 빠진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나귀일까요!

그렇습니다. 영광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 한 분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환호하고 칭찬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께 드리는 환호요 칭찬이지 우리에게 향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태우지 않은 나귀가 그저 짐이나 부리는 보통 나귀일 뿐인 것처럼, 예수님 모시지 않은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등뒤에 태우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면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새끼 나귀를 쓰신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왕들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개선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의 인기에 영합하는 대중적인 스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께 요구하고 기대했던 것은 권력과 부귀와 영광, 인기, 눈앞에 보이는 세상질서의 변화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세상의 왕이 가지는 권력과 영광의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정치 경제 질서를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가진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세상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여 정치적 무질서와 경제적 불평등을 바꾸는 세상의 왕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여 죄와 죽음의 권세하에 신음하는 인생들을 구원하는 하늘의 왕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군중들의 뜻을 따르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고독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와 같은 행진 한 가운데 나귀가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무리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나귀가 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등뒤에 태우고 묵묵히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나귀, 오늘 여러분들이 나귀처럼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나귀를 닮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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