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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역동적인 생명 (고후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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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이론>의 저자 이 면우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 사회나 단체에 있어서
제일 문제인 사람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똑 같은 일만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변화를 거부하고
이대로 편하고 좋은데 하며 누워있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 이 세상이 다 변하고 있는데 오직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이는 곧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런데 구태여 변화하기를 싫어한다면 그는 시대의 골동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그 만큼 습관이나 고정관념을 고치기 힘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변화가 중단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벌써 관속에 누운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도
마22:32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변화되는 교인, 새로워지려는 신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관속에서 일어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유행하는 명품을 걸치고 윈도우에 진열되어 있는 마네킹보고 부러워 쳐다보는 사람 있을까요? 단지 마네킹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신자 아무리 치장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네킹입니다.
마네킹이 교회와서 앉아있는 것뿐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에 답을 모르는 교인은
고전15:19절「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라」합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관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 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관속에서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 모두 관속에서 일어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앞에서 바울은 복음의 일군의 영광을 말하면서
복음을 위해 살아 갈려고 하면 받을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환란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도 찬란한 불꽃처럼
우리를 환하게 비추어 주는 빛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의 부활의 생명인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덧입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바울은 왜 우리에게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까?

바울이 우리를 하나의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질그릇은 금 그릇이나 놋그릇에 비하면 하잘 것 없고
또 금도 잘 가고 깨어지기도 잘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입니까?
인간은 추워도 병들고 더워도 병들고,
조금만 무리하면 병들고 조금만 편해도 탈이 납니다.
많이 먹어도 병들고 못 먹어도 병듭니다.
보이지 않는 세균에도 꼼짝 못하고 비타민 한가지만 부족해도 병이 납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세월이 지나가면 다 녹이 씁니다.
그러니 우리 육신은 질그릇 같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까?
[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정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이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 바울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자만심과 교만을 방지하려는 말씀입니다.
바로 능력이 질그릇인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보배인 예수 생명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럼 바울이 말하는 보배 즉 부활의 생명은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합니까?

8절[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로 전천후의 신앙의 승리를 말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신앙의 승리의 확신을 갖고 잇는 배후에는
바로 예수 부활의 생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의 생명을 믿는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왜? 그들은 역동적인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동적인 생명-그 어떤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생명
부활의 생명, 역동적인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일군은
그 어떤 환경에도 움추려드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 환경을 변화시켜 놓는 자들입니다.
예수 부활 !
현대 교회에 퇴색해가는 기독교 절기로
삶은 계란을 주일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정도의 행사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퇴색해 가는 나의 영적 생명력에
마치 애벌레가 고치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나방이가 되어 날아가듯이
마치 게란 속에서 노란 병아리가 껍질을 깨트리고
새 생명의 울음을 터뜨리듯이
나의 신앙생활에 새 생명의 싹을 터뜨리는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역동적인 생명-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생명입니다.
생명이란 건 신기한 것입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 병이 들어 생명이 꺼져갈 때는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요.
역학적으로 말하면 죽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살고싶은 욕망은 마치 작은 불꽃처럼 남아있었습니다.
마음으로 주께 부르짖었죠.
살려달라고, 그리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욥23:10「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랬더니 그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른 것 있지요.
손가락 까닥할 수 없던 죽어가던 청년이 대구를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관속에 누워있다 해도 좋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만 있어면 됩니다.
마음 속에 내가 영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욕만 있어면 됩니다.
말씀을 붙들고 마음으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는 예수 생명, 부활의 생명, 역동적인 생명인 줄 믿습니다.
[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노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 하노라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겠노라~!~ ]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명만 붙들고 있어면
마치 길가의 잡초같아 밟아 뭉개어져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역동적인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1947년 2월 8일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백주년 생일날,
축하 행사로 에디슨이 죽었을때 잠가 놓았던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물건 중에 특별하게 보이는 종이가 한 장 있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 캄캄한 곳에 떨어졌을 때는 요나를 생각하여라!
요나는 그 캄캄한 뱃속에 떨어졌지만 끝내 아무 이상이 없이 살아났다 ]
요나의 사건
마12:38절 이하에 표적을 보여 달라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요나의 표적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캄캄한데 떨어졌거든 요나를 생각하십시오,
부활의 생명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내게 주어진 예수 생명은
바로 부활의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역동적인 생명 어떻게 우리가 덧입을 수 있습니까?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역설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역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설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고 우리를 행복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인 진리를 터득해야만 행복한 신앙인이 됩니다.
역동적인 생명이 나의 삶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5>
먼저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하세요.
십자가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2) 나도 그 십자가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롬6:4절에
[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같이
우리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행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초대교회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
안악 장터 깡패 김익두가 예수 믿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 김익두 사망 ] 이라는 부고장을 돌린 일이라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는데 어느 날 보니
김익두가 버젓이 살아서 성경책을 끼고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한 불량 청년이 김익두에게
[ 죽긴 뭐가 죽어 ] 하고는 물을 한 바가지 씌어버렸습니다.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김익두가 물을 털면서 하는 말이
[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살았으면 넌 벌서 요절났다 ] 고 하더랍니다.
이렇게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가
예수 생명, 부활의 생명, 새 생명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가졌다면
그 십자가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11절 [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십자가의 신앙, 바로 주를 위한 희생의 각오를 말씀합니다.
주를 위해 죽을 각오를 말씀합니다.
요12:에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에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밤에 헬라인 몇이 아마 죽은 나사로 살린 기적의 소문을 듣고 온 것 같습니다.
제자 빌립을 통하여 예수를 말나려고 청을 넣었는데
예수님께서 저들을 만나주시지아니하시고 하시는 말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합니다.
왜 이 말씀을 했습니까?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헬라인같이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한 알의 밀같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학자가 필요하고 부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헤 십자가 질 희생할 각오가 된 사람 찾으십니다.
교회 내에 목사가 장로가 없어서가 아니라
유능한 엘리트가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질 <한 알의 밀> 같은 성도가 없기 때문에
교회를 통한 역동적인 생명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1973년에 당시 우간다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 독재자로 인해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싱긋이 웃으시면서
[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 하니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습니다.
[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 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기도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랍니다.
그 분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금방 죽인다고 하지만 아무 두려움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 부활절 아침이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해 있는 시간이라 죽음에 대한 문제를 넘어설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 교회가 크게 부흥을 했다는 간증입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위해 죽을 각오하며
고난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십시오
그럴 때 나의 삶에 역동적인 생명으로 충만할 줄 믿습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날 줄 믿습니다.
바울은 희생적인 신앙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희생적인 신앙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2절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 ]
이 구절의 주석은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사역에서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되려 유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누군가가 먼저 고통할 줄 알고 먼저 희생할 줄 아는 성도가 있을 때
교회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1200만의 그리스도인이 있고
세계 50대 교회중 절반이 한국에 있다고 하며
국회의원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의 권위가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권위가 뭡니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권위는 영적권위로써
성경에서 그것을 <케팔레>라고 하는데
그 뜻은 구속자의 역할수행을 말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 구해주면
그 사람에 대해 권위를 갖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포기와 희생 없이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 구해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면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신앙을 바로 고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만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가장 눈길을 끄는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람을 세워놓았습니다.
그 동상에는 오봉 미셔너리라고 써있습니다.
오봉이라는 선교사의 이름입니다.
그 내용을 옆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쭉 써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중국의 오봉이라는 선교사가 타이베이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산간에는 사람의 목을 잘라 가지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아리사라는 산에서 토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오봉선교사가 그곳에 선교를 하러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다가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오봉선교사가 토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니 다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봉선교사는 추장이 됩니다.
추장이 되고 난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살인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목을 잘라서 제사 드리는 일은 하나님께 벌받을 일이니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한 2년 동안에는 제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년째 되는 해에 그들이 조상적부터 계속해오던 습관이 있는지라 사람의 목을 잘라 와서 또 제사를 드립니다.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려 기도하다가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 몇 월 몇 시 어느 지역에 가면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있을 것이다.
그의 목을 잘라서 제사를 드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는 하지 마라 ]
그런데 바로 그 정한 시간에 자기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고 그곳에서 결국 죽었습니다.
목을 잘라놓고 보니까 자기의 추장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성대곡하며 토인들이 울고 그 뒤로부터 그 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 선교사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죽음을 면해주었으니
이게 예수 정신입니다. 이게 한 알의 밀 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구촌에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고 복 받는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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