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주일] 골고다 가는 길 (눅 23:26~27)

  • 잡초 잡초
  • 411
  • 0

첨부 1


- 설교 : 홍문수 목사

여러분, 「십자가」 영상 어떻게 보셨습니까?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이보다 더 참혹한 모습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단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이 끔찍한 고난을 당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33년의 지상생애 마지막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이 시간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그 의미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길 : 대속의 십자가 행진

당시 로마의 사형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목을 자르는 참수형(斬首刑)과 십자가형(十字架刑)입니다. 참수형은 일반 죄수들에게 적용되었고, 십자가형은 천한 노예나 반란자, 살인자 같은 흉악범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이 확정된 죄수는 골고다 언덕까지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그 길을 가리켜 ‘고난의 길’(라틴어 Via Dolorossa)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에 가면 고증을 통해 조성해 놓은 길이 있는데 약 1.2km의 길입니다. 처음 400미터는 내리막길, 나머지 800미터는 오르막길입니다. 그 길의 끝이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란 뜻입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합니다. 영어의 ‘Calvary’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명칭이 붙여진 이유로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멀리서 보면 지형이 꼭 해골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곳에 처형된 사형수들의 시체가 썩고, 많은 해골들이 나뒹굴어서 그런 명칭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곳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당시 로마의 형법으로는 사형수 본인이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 무게가 대개 20~30kg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이 됩니다. 더욱 괴로운 것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느끼는 수치심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골고다 언덕길을 그 큰 고통과 수치 가운데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이미 전날 밤부터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 흘리는 기도, 제자들의 배신, 불법재판과 모진 고문으로 초주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가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당시 채찍은 가죽 끈 끄트머리에 쇠붙이가 달려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흉악한 것입니다. 심한 경우는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번이나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그 중 5번째 쓰려지셨을 때 도저히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어서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렇게 고통스런 골고다 길을 가셨습니까? 그리고 왜 비참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대속’(代贖)을 위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십자가 7백여 년 전 미리 예언해 놓았습니다. 사53:5~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인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그런데 육체의 죽음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후의 내세의 문제입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 심판 이후 영원한 내세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육체의 죽음 후에 영원한 사망, 지옥의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 고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모든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무서운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고통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고통은 지옥의 예고편이다.”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막9:43~49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이 사망의 고통을 모면하고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대신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걸어갈 골고다 언덕 길, 내가 짊어질 십자가, 내가 못 박혀 죽을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까 찬송가 136장을 우리가 불렀는데, 그 가사 그대로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 ” 믿음이란 이처럼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나의 죽음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그분의 의를 넘겨받는 것입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기억하시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 감격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걸어갈 골고다 길 :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가실 때 그 행렬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문 26절~27절을 보면 그 행렬에 누가 동참했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시골에서 올라오다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있었고, 또한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 여기에 직접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모친 마리아, 제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한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 유대인 당국자들,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병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입니다.

① 십자가와 상관없는 구경꾼과 핍박자 :
 
그들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에 따라갔지만 각자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그저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구경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포악하게
예수님을 괴롭히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의 겉옷에 관심을 가질지언정 그분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 등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② 십자가와 상관있는 믿음의 사람들 :

그런데 예수님의 행렬을 따르는 자들 중에 슬피 우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모친 마리아와 평소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지만 요한은 모친 마리아 곁에 동행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상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고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언덕길,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로 나눕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골고다 길을 믿음으로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구원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겨우 믿음으로 구원받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으로 충분하지만,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에게는 그 이상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2천년 전 골고다 길을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한 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우리에게 남겨주신 고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골1:24) 이를 위해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골고다 언덕길을 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에게 맡기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③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 :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자발적으로 지지는 않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축복을 받았습니다. 시몬은 구레네 사람입니다.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 해안 도시인데 지금의 트리폴리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그곳에 이민 가서 살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유대인 교포들이 로마 제국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구레네에는 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유월절 등 유대인 명절이 되면 상당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아마 구레네 시몬도 유월절에 즈음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 성에 막 들어가려고 할 때 마침 성에서 로마 군병이 이끄는 죄수의 행렬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형은 성밖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무거운 십자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전날 밤부터 시작된 고문으로 이미 초주검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은 마주친 구레네 시몬을 징발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은 식민지 백성에게 노동을 시키기 위해 강제 징발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불쾌하고 괴로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 행렬을 가면서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막15:21에 보면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의 독자인 당시 로마교회 교인들이 익히 아는 사람이란 암시입니다. 롬16:13에 보면 로마 교회에 있던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위로자였음을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해고, 그 후에 온 식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지던 십자가를 뒤에서 함께 지고 따라갔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상징적인 그림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되고, 그것은 고통 같지만 사실은 축복과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④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지기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사명, 책임)를 져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 자기를 부인하는 삶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i) 자기를 부인하는 삶 :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장 어려운 게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거슬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기분대로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롬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물론 우리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망과 죄악을 절제하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본 욕구는 충족시키며 기뻐하되, 지나치게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 욕망과 죄악의 포로가 되면 곤란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 랍비가 가르치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항해하다가 항로를 벗어나 표류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름 모를 섬에 상륙합니다. 그 섬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꽃이 만발하고, 과실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승객 중 어떤 사람들은 절대 배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며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잠깐 내려서 꽃과 과실을 즐기고 적당한 시간에 돌아와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오래 즐기다가 늦게 돌아와 배를 타기는 했지만 불편한 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신이 빼앗겨 즐기다가 배를 못타고 남아 있다가 맹수에 먹히거나 병들어 죽습니다. 여기서 배는 우리 인생을, 섬은 세상의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을 적절하게 절제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본적인 복락조차 금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ii) 제 십자가를 지는 삶 :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창세기 22장을 보면 이삭이 모리아산을 올라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묵묵히 자기를 태울 장막 더미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제단 위 장막더미 위에 묶여서 아브라함이 칼로 내리치도록 묵묵히 순종합니다. 그 모습은 흡사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 지고 올라가 못 박혀 죽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주의 뜻이며, 사명과 책임입니다. 나치 치하 순교자인 본회퍼 목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값싼 복음을 믿는 게 아니라 값비싼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일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 주님을 위한 고난과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십자가 행렬에 뒤따라 간 것 같습니다. 그는 공회의원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참하게 운명하신 후 그는 이제 자기가 나서야 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무덤에 장례를 치러드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을 드리고 노력 봉사를 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한 편이라는 사실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그의 의원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목숨의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주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안일함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가급적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위한 고난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 교훈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고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막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따라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얽매이고 십자가를 지는 게 좋습니다. 애3:26 보면 “사람이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 좋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인내하며 완전한 순종으로 지라. 그러면 끝내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 줄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항상 져야 할 가장 사랑스런 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새의 날개나 배의 돛과 같이 그런 짐이라면 나를 항구로 날라다 줄 것이다” 러더포드의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또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그저 연례적으로 지나가는 행사로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이 한 주간 더욱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각자 자신을 성찰하면서 과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골고다 길을 따라갈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