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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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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 : 이영기 목사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부활절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21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는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왜 베드로가 그랬을까? 왜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대들었을까? 베드로가 생각하는 예수님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런 일’이란 무엇일까?
그래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것만 말씀하셨습니까?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앉은뱅이 일으켜 걷게 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중풍병자를 고치는 것도 기적이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당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이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 보고 싶지 않겠어요?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 이 말씀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이고 기대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이 말씀을 생각지도 못하고, 고난당하실 거라는 말씀만 생각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대들었을까요?
그래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지 사흘이 지났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그래요. 무슨 말이든 다 듣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관심 밖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도 듣기는 들어도 실상은 듣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만 들은 겁니다. 부활은 듣지도 못한 겁니다. 듣기는 들었지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그 생각이 부활의 말씀을 막아버린 겁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이해되는 말만 듣습니다. 자기가 관심 갖는 이야기만 듣습니다. 그 외의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날 위해 죽으신 주님”과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까? 어느 쪽이 더 가슴을 찡하게 합니까? 어느 쪽이 더 은혜가 됩니까?
“날 위해 죽으신 예수.”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채찍에 맞는 장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장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분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 감격이 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생각해도 별로입니다. 가슴이 찡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이 담에 죽으면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뿐입니다. 도무지 죽음을 이기셨다는 이 사실이 지금 여기 사는 내 삶에는 별로입니다. 그래도 부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있다면, 부활절 오늘 뿐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사건 하나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언젠가 죽으면 부활할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분이 오늘을 사는 지금 내 삶과 어떤 관계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사는 지금의 의미입니다. 2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듯이, 2천년 전에 일어난 부활 역시 오늘을 사는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날 위해 죽으신 예수”는 지금도 은혜가 되는데, “죽음을 이기신 예수”는 지금보다 먼 훗날로만 여겨집니다.
신앙은 날마다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에 이 정도 했다면, 금년에는 더욱 열심히,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에 열심히 하던 사람이 금년에는 쉬겠답니다. 먹고 사는 일에는 작년보다 금년에 더 열심히 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쉬겠답니다. 하는 일이 어려우면 어려워서, 더 신경 쓰고, 거기에 더 열심을 내야하니까 하나님의 일은 쉬겠답니다. 하는 일이 잘 되면 잘 되기 때문에 더 신경 쓰고 더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쉬겠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지금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은혜 주심을 잊은 겁니다. 부활은 그저 이 담에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죽은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그분이 여러분이 안 되는 일에 대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의 잘 되는 일을 더 잘되게 하실 수 없을까요?
심지어 피곤해서 하나님의 일을 쉬고 싶다는 분들도 있는데, 죽음을 이기신 예수, 죽은 자을 살리시는 예수, 그분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힘도 못된다는 겁니까? 여러분이 쉬는 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겁니까?

처음 교회에 다니면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관심이 있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날 위해 죽으셨다니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날 우습게 여기는데, 심지어 부모나 형제, 아내나 남편도 나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니, 세상에 이런 감사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겁니다. 점점 감격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성도들의 관심도 이제는 그저 그렇고 그런 걸로 되었고, 때로는 관심 갖는 것이 귀찮기도 해요. 날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별로 마음에 감정도 없어요.
그래서 교회 나가기 싫은 겁니다. 찬송하기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고……. 교인들 만나도 짜증이 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선 이제는 쉬고 싶은 겁니다.
이건 신앙이 병들은 겁니다. 이건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몸이 병들면 재빨리 병원에 가면서도,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치유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럴 때 주님을 위해 일하십시오. 그러면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무엇 하나 얻으므로 생기는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사랑하고 봉사하므로 생기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순간마다 곁에서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기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째 되는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이지 않고, 한 천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도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는 게 그렇게도 급한 겁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겁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누구부터 만나시겠습니까? 빌라도를 찾는 게 먼저일 것 같지 않아요? 대제사장이나 장도, 이런 당신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는 게 먼저일 것 같지 않아요?
더욱이 대제사장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 27:42)
그렇다면 그들을 찾아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나는 이렇게 다시 살아났다. 그러니 너희 말대로 나를 믿어라.” 그렇게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태복음 28:11 이하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은돈을 집어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말하게 하여서 유대인들 사이에는 그렇게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셨다면 이런 소문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셨을까?
왜 제자들부터 만나려고 하셨을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 만나셨던 사람들을 찾아보십시다.

누가복음 24:13 이하.
마침 그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씀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동안 되어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거기 19절에 보면,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랬어요.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들 하고 전혀 관계없는, 그냥 듣고 또 들은 그런 이야기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하도 신기하고 놀라워서 따라나섰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고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섭니다. 도무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렇습니다.
“몇몇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겁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답니다.”는 식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도 했을 겁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직접 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이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님이시다.” 라는 그런 생각, 그런 확신이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다니는데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있는데, 정작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고 말한 그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나하고 직접 관계 되지 않는 사람, 남들이 이렇다 하니까 이런 줄 알고, 막연히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는 소망을 두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잡힌 게 아니라,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구경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느낌도 없고, 감격도 없고, 은혜니 뭐니 하는 말조차 생소하고 그런 겁니다. 따라 갈만 하면 따라가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서는 그런 신앙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거기 바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분이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확신으로 뜨겁게 하셨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은 나를 만나주지 않으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과 마음과 생각 가운데 모셔 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라고 부르면서 여전히 내가 주님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서 주실 때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이분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 읽을 때 어떤 마음입니까?
성경을 풀이해 주는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마음입니까?
여전히 남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여전히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요한복음 20:19이하.
그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도 잡히면 큰 곤욕을 치를 것이고 끝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역시 잡히면 큰 곤욕을 치를 것이고 끝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나서 제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디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병든 자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 그분이 어떻게 그리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흉악한 죄인들이나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싶은 겁니다. “혹시라도 유대인들이 우리 있는 곳을 알아내서 결국 우리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고통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거 아닌가?” 싶은 겁니다.
요한복음 20:19에 분명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죽이라고 소리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두려운 겁니다. 채찍에 맞으시는 예수님,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그 비참한 모습,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채 끝내 운명하시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그 일이 언제 자기들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분명 죽으셨는데, 장사까지 지냈는데, 그런데 그분이 살아오신 겁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자신들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워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살아서 오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두려워하는 그곳에 찾아오십니다.
세상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업 실패, 직장에서 해고, 질병에 대한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자녀들의 삶 또한 기쁨보다 늘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두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두려움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택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이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 승리의 팔로 당신의 사람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 두려움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21:1 이하.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다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디베랴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우리도 함께 가겠소.”
그래서 그들 모두 나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답답했을 겁니다. 모든 것 다 뒤로하고 따랐던 예수님은 죽으셨고 이제는 고기 잡는 것조차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 계실 때 그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었습니다. 말씀 한 말씀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내노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르침보다 훨씬 권위가 있었어요. 행동 하나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때마다 이들은 가슴이 뛰었어요. “바로 이분이구나.” 그러니 그런 분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죽으신 겁니다. 그들의 희망이 다 사라졌어요.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 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예수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곤 했는데 이제는 누구 앞에 나서기도 창피할 것 같습니다. 더더욱 이런 모습으로 어찌 고향으로 가겠습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배도, 그물도, 직장도, 다 버리고 무슨 크게 출세라도 할 것 같이 예수 따라가더니 그 꼴이 뭐냐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고기 잡아서 평생 살아온 그들이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다는 겁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 분에게 걸었던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도 답답하고 가슴 아픈데 이젠 고기 잡는 것조차 제대로 안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거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죽음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자리, 그 희망과 꿈을 일어버린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음성 들어 보셨어요? 좌절과 실패의 자리에서,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차 막막한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베드로에 “저 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는 벗었던 몸에다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감격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좌절이 실패 생각 할수록 캄캄한 그 순간에 찾아오신 예수님.
“저 분은 주님이시다.” 정말 저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달려가는 그 순간의 감격과 기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늘 경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서십시오!
예수님은, 자다가 깨어나 혼자 있음에 외롭고 무서워서 우는 아기에서 온 엄마가 “걱정마라. 엄마가 여기 있다.” 그러자고 죽음에서 다시 사신 것 아닙니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있단다.” 그것 보여 주자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 아닙니다.
절망과 좌절과 실패와 두려움에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위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와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은 아침을 먹은 뒤에,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을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세상사는 일, 질병, 죽음 등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평화를 가르치고 보여주십시오.
여전히 실패의 연속으로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가르치고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은 먼 훗날 내가 죽은 뒤 다시 살아난다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삶의 순간순간 절망과 실패와 좌절과 두려움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죽음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말하는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까?
“이제 끝이야”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언제나 여러분의 승리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말씀한 고린도전서 15장, 그 부활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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