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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의 기적 (요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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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 춘 수 목사

우리 인생의 많은 경우는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에는 기대가 되는 아름다운 기다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 행복을 기대하는 신랑신부의 기다림은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몸의 병을 앓으면서 죽음의 날짜를 기다리는 환자의 기다림은 슬픔과 애통의 기다림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38년동안 병낫기를 기다리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환자는 38년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38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동안 그는 질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대하였지만 그에게는 상처만 남았을뿐입니다.
여기 이 환자가 기다린 장소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 이 양문은 문이 두개있는 양문(양門)이 아닙니다. 저는 맨처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예루살렘 성에는 많은 문이 있습니다. 그중에 양들이 통과하는 “양의 문”(sheep gate)이 본문의 문입니다. 지금은 “스데반의 문”이라고 부르며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양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성전에 제물로 드릴 속죄 양들을 이 문을 통해서 들여왔기 때문입니다.양문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 옆에 베데스다 못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문 위쪽에는 지금도 양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습니다.그런데 이 양문 곁의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에서 이 38년동안 자비의 기적을 기대한 이 환자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앗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자비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기적의 주인공은 38년 된 병자였습니다. 38년이란 긴 세월을 병마와 싸운 한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38년동안 그는 이 우물가에 나와서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만큼 낙심과 좌절의 상처도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병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3절)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세 가지 병을 모두 앓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환자인지는 모르지만, 38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괴로움을 당했던 이 병자의 절망적인 세월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면서 인생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가족도 이미 포기했을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자비의 기적을 관찰하면서 우리 주님의 자비의 본질,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38년 된 병자를 향하여 주님의 자비의 기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기적은 먼저 은혜의 선택하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선택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굉장히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 숫자가 몇 명이 될까요?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마른 자들이 ”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 숫자가 최소한 몇십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에서 특별히 이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그리고 선택한 이 사람에게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서 38년된 병자를 선택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노력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남보다 더 잘나서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베데스다연못을 찾아오신 주님의 뜻에 의한 선택이었습니다. 선택받은 이 환자를 주님께서는 치유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선택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주께서 나를 선택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선택은 주님의 은혜와 자비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십시오.
모두가 선택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하나님이 이삭을 선택하여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엿습니다.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선택하였습니다.하나님이 이사야 에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선택하였습니다.이땅에 오셨던 우리 주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바울도 모든 주의 일꾼들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방식 모두가 선택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구원과 사랑을 체험한 일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선택받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향한 주님의 자비는 이러한 선택의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주님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향하신 자비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38년된 병자를 보십시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서 행동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병자는 고쳐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현장에 주님이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여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동사가 있는데, “보시고”와 “아시고”입니다.
예수께서 그 병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는 지를 보시고 아셨습니다.우리 역시 우리의 형편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아뢰기 전에 주께서 먼저 우리의 아픔과 절망과 슬픔을 보시고 아십니다.그리고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향하시는 자비의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택하시기까지 우리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기 38년 병자는 주님이 먼저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스스로 낳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입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먼저 저 물에 들어가면 낳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38년된 병자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인 소경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절뚝발이 모든 병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베데스다 못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동할 때만을 기다립니다. 그 연못에 천사가 내려오면 물이 동하는데 그때 그 못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이 낳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십시오. 어떻게 절뚝발이의 사람이 먼저 그 못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앞을 못보는 소경이 그 못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기 38년동안 누워서 걷지 못하는 그 사람이 그 못에 먼저 들어갈수 있습니까? 이미 38년동안 그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라고 믿고 속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이와 같습니다. 마치 절뚝발이요 소경이요 누워서 걷지 못하는 불구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어찌할수 없는 병자요 환자요 장애입니다. 스스로 행위를 통해서는 스스로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력해서 나를 지킬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 베데스다연못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나 해결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 베데스다의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로또복원이 베데스다인 분들은 내가 로또복권 한번만 당첨되면 내 인생이 펼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업이 베데스다연못을 갖은 분들은 혹시 내가 이번 한번만 사업이 잘되면 새인생이 펼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베데스다인 사람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 인생이 펼 것으로 생각합니다. 38년된 병자처럼 우리는 매일 그런 스스로의 환상과 속임수에 속으면서 비참한 삶을 살아왓었습니다.

베데스가 연못가에 찾아오신 주님깨서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을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내가 선택받은 주님의 백성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 믿음으로 38년 병자처럼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여러분을 풀어놓았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여러분을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선택한 자기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전적으로 그를 선택하시고 이 선물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주님만남으로 여기 38년된 병자는 생명을 얻음으로 기적의 새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믿고 받은 최대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의 선물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선물이 아닌 이 생명의 선물을 주었습니까?
우리 인생에 제일 필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을때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여러분 38년된 병자가 받은 것처럼 여러분도 저도 받았습니다. 오직 우리를 선택하신 자비하신 은혜 때문에 받았습니다. 주님의 선택하심과 그 일하심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기적은 소망을 주심으로 생겨났습니다.

예수께서 병자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 주는 것으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병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을 포기하였던가 봅니다. 사실 38년쯤 병을 앓으면 포기할 만도 합니다. 이 사람에게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희망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실 때 그가 대답하는 것을 보십시오.
7절에 “주여 물이 동할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합니다.
여기 이 38년된 병자는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합니다. 어쩌면 38년동안 이 걷지 못하고 누워있는 이 환자는 몇 번이고 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세상이 미웠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 속에는 모든 희망을 잃고 그저 어쩔 수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베데스다연못가에 찾아오신 주님은 이전의 어떤 사람들과도 달랐습니다.
여기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병자는 어쩌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희망과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는 삶의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마음의 꿈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기 38년된 병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마음에 희망이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 오셔서 먼저 마음에 희망을 주십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희망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에 희망을 갖을때 삶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을 싹 틔우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희망의 메신저가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환자들이 희망을 갖고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낙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마디의 말의 위력이 마음을 밝게도 하고 어둡게도 합니다. 한마디의 말이 인생을 죽게도 하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정황에서도 희망의 말을 하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상처주고 희망을 빼앗아가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얼마전에 어떤 목사님이 쓴 책 중에“ 크리스챤이 꼭 버려야 할 단어 들”이라고 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꼭”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꼭 버려야 할 단어들이 21가지였습니다. 중독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합니다. 이기심,염려,탐욕,게으름,나태,안주,침체,우울,비난,불평,원망,조급,교만,외식,위선,다툼,갈등,포기,방탕의 단어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단어가 있다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목사님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어느날 어떤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여는 순간 현관에는 각종 오물이 담긴 쓰레기 봉지가 널려있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왓씁니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서자 온통 모든 것들이 어지럽혀 있었습니다. 방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가 있었습니다. 부엌에는 먹고 난 그릇들이 그냥 있고 쓰레기들이 그냥 있었습니다. 냄새와 쓰레기로 제대로 있을 수 없었던 그 집의 충격적인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 인생의 마음의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 만약에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때 집안처럼 우리 마음의 집도 그럴 것입니다.
누가 희망을 말을 하고 누가 꿈을 주는 비젼의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 속에 희망의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 인생에 비젼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희망을 주는 말을하고 비젼을 주는 말씀을 하셨을때 꿈을 잃고 희망을 잃었던 38된 병자의 마음은 새로운 삶의 용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다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것은 주께서 내리신 구원의 명령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대단히 어이없는 명령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들은 병자는 주님을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예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세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병자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순종밖에는 없습니다.
38년간 앓던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삶을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그리고 놀라운 새삶의 기적의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38된 환자의 입장에서 그 말을 의심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도전하기를 중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말도 안되는 명령에 대해서 저항하였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여기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가 언제입니까?
믿음으로 순종할 때입니다. 믿음으로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의 논리가 증명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주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거기에 주님이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오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십니다. 혹시 우리 중에 절망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인생의 실패로 낙심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시간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을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그때 베데스다의 기적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기적을 위해서 값 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사항은 주님이 병자를 치료하신 시간입니다. 9절에 보면 “이 날은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율법에 따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할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의 비난과 정죄와 고발을 감수하면서까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속에서 정말 염두할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에 시비를 걸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가 바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생기는 부수적인 문제를 더 염두에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에 주인이신 주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는 일은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시는 주님을 정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38년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욕을 얻어먹습니다. 희생하는 것을 기꺼히 감수하였습니다. 사랑은 때때로 핍박과 수고의 짐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짐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 받는 형벌이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사랑의 짐을 지고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고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값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값없이 얻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놀랍게도 가장 귀한 것이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귀한 것들은 공짜로 얻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늘 들이마시는 공기도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에서 구원받는 이 놀라운 복도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은혜는 예수께서 피 흘리는 값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결과입니다. 예수님 한사람의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함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롬5:19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지난 중에 양양지역에 대형산불이 일어났습니다.2틀간에 일어난 산불로 수백년 수십년간 자라왔던 나물들이 모두 불탔습니다. 그리고 가옥들과 문화재들이 불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수백억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 피해를 복구하고 이루려면 또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순간의 한 사람의 작은 실수가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합니다.
반면에 한 사람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은혜의 혜택을 누리게도 합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위해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사랑과 생명을 내놓으신 주님의 값 비싼 희생을 담보로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역사하십니다.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의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모든 하늘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제 이 은혜와 선물을 우리가 받기까지 주님께서 고난과 죽음의 값비싼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댓가로 받은 은혜 받은 사랑을 끝까지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고침받은 38년 된 환자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고침받은 38년된 환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14절에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이 환자에게 주님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고침받고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이 그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이제 모든 죄를 모양이라도 어리셔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아니요라고 끊으시고 고침받고 구원받은 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고침받은 주님의 자녀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더 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이 38된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5절에 보십시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났습니까? 은혜받았습니까? 고침받았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값비싼 댓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 베데스다의 기적이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났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셔서 고쳐주신 주님께서는 소망없는 삶을 살던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셔서 그 자비하심으로 생명을 주셨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선택받은 은혜를 헛지 않도록 우리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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