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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 (창 4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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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
화분에 담겨서 살아있는 꽃과 꽃다발 속에 있는 죽은 꽃의 차이를 아시나요? 살아 있는 꽃은 냄새가 나는데, 죽은 꽃은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꽃에서도 냄새는 납니다. 살아있는 꽃은 예쁜데 죽은 꽃은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겉모습은 둘 다 똑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건 죽은 꽃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시들지만 살아 있는 꽃은 자라나고 열매를 맺고 다른 생명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시체에서 아기가 태어날 수는 없으며 뿌리가 뽑혀 죽은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어야만 자라날 수 있고, 생명이 있어야만 열매가 맺히지만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자라나야 하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것이고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해지지 못하는 것은 나만 슬프고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아픔과 슬픔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장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토저 목사는 오늘날의 교회에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다만 살만 찐다고 한다. 
둘째는,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이다. 
셋째는,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이다.

야고보는 산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산 믿음은 자라지만 죽은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장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장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하는 것이 회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회복'과 '성장'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다가옵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회복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주안에서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회복이며 우리가 누리는 은혜도 모두 회복의 개념입니다. 회복이 된 사람을 보고 성장을 하라고 하는 것이지 병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 일하라고 할 수는 없고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를 보고 어른처럼 일하라고 할 수 없으며 훈련이 안 된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장의 전제는 회복입니다. 회복이 된 다음에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땅에 똑같이 심은 나무가 어떤 나무는 잘 자라는데 어떤 나무는 잘 자라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예배를 드리며 같은 설교를 들으며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요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나는 믿음이 없고 매 믿음은 저 사람보다 못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내 믿음은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물론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는 분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고 믿음이 있어야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만 좋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 하는 칭찬을 듣는 것 이상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쁩니다" “멋잇습니다” “날씬합니다” 칭찬 받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과 통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떻게든 믿음 좋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스스로 믿음 있는 채 하는 것보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목회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해 그랄에 온 후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았기에 아비멜렉이 그를 인정했습니다(창21:22-23). 우리들의 신앙도 그와 같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어디에서도 인정받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믿음이 좋아지고 성장할까?
많은 비결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범사가 형통하였던 요셉의 사례를 통하여 한 가지만 강조하여 말씀드리면 그것은 바로 봉사입니다. 요셉은 도대체 어떤 신앙이었기에, 어떤 봉사를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형통한 복을 받았습니까?

요셉은 봉사를 사양하지 않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치리 하라"고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신분은 노예 신분이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는 죄수였습니다. 또 창41:46에 보면 이때 요셉의 나이는 만29세에 불가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대신을 맡으라고 하니 어찌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단 한마디로 "못합니다. 안 합니다" 하고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봉사의 기회가 왔을 때 이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결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일단 한번 사양하는 것을 예의인 것처럼 생각하고 남의 앞장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스스로 찾고 자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적극적인 서구 사상을 가져왔고 기독교 국가가 잘 사는 비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그때 요셉이 그 직책을 사양했었더라면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애굽의 전 국민도 자기 친족들도 모두 굶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인격과 지식을 갖춘 다음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교회에 발을 드려놓는 순간부터 봉사함으로 내 신앙이 성숙되고 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다음, 신앙이 완성된 후 성경지식을 더 얻은 후 부족한 것이 없을 때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요, 핑계요 나태이며 교만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에 가보면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호수 속에 사는 고기는 눈이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퇴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리를 쓰면 다리가 튼튼해집니다. 신체의 여러 부분을 운동으로 열심히 움직이면 건강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하면 성장하고 강건해지지만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으며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숨 막히고 답답합니다.

고전15:5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일은 실컷 했어도 헛되고 오히려 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주안에서 하는 수고는 절대로 공짜가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 곡식을 심는 원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반드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남을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빌2:4에 보면 "각기 자기 일을 돌아볼 뿐 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건강할 때, 물질 있을 때, 능력 있을 때 열심히 섬기고 봉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없을까를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 봉사하시는 분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크리스챤들의 봉사의 기본 원칙
크리스챤들의 봉사의 기본 원칙을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며 봉사한 것은 사람에게 봉사한 것이지만 사람에게 봉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 봉사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때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습니다.

1895년 우리나라 교육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윤치호 선생님은 미국의 내시빌 테네시 주에 있는 핸즈벨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는데 그는 미국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사람입니다. 돌아올 때 배 삯까지 계산하고 나니 300불이 남더랍니다.
'내가 미국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는데 300불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하느냐?' 생각하고 그 300불을 남감리교 선교부에 찾아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는데 사용하여 주십시요"하고 헌금해 버렸답니다. 이에 직원들이 큰 감동을 받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연세 대학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300불이 얼마나 가치 있게 쓰여졌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렸기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드렸기에 그 돈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할 때 그 일의 결과는 엄청난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 보라고 하는 봉사, 사람 생각으로 하는 봉사도 않는 것보다야 낫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봉사하는 것이 봉사의 기본원칙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생활에서 섬기며 봉사할 때에 기왕이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봉사하므로 여러분이 드린 시간, 물질, 여러분이 흘린 땀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입니다. 가슴에 수번을 달고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봉사해 보고 싶은 마음에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고 감당했으므로 이것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러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수번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요셉처럼 사양하지 말고 힘껏 봉사해 보겠다는 자세로 감당할 때 의외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이상으로, 봉사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섬기는 이상으로 채워주십니다. 육신도 사용할수록 튼튼하고 강해지듯이 우리의 속마음인 믿음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 사업에 봉사하고 힘쓸 때 더욱 성장하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까? 답답합니까? 반드시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 마시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당장 봉사해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라도 전도해 보시면 자신도 모르게 확신이 올 것입니다.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기초와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음악을 하든, 미술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목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끝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기본이 탄탄해야만 합니다. 원리와 원칙을 중히 여기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감과 요령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동안 기초와 기본 그리고 원리와 원칙을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요령으로 초고속성장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요령은 IMF 전까지 통하였습니다. 그 이상의 발전은 그것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작고 낮은 집은 기초를 튼튼히 파지 않아도 대충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집은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고는 절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작은 판자 집 하나를 지을 때 설계는 거의 필요 없습니다. 대충 생각하고 열심히 뚝딱 거리면 대충 비 가리고 살 수 있는 판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지으려면 훌륭한 설계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설계하는 설계사는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집을 짓는다면 백발백중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하고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계대로 성실하게 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도 마찬가지고 나라도 마찬가지이고 경제도 마찬가지이고, 정치도 마찬가지이고,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때로 아픔이 오고 시련이 오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평안하고 무사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평안하기를 갈구합니다.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그렇게 건강과 평안과 일이 잘되는 복만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평안함만 주시고 형통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불신자들과 똑같이 고민하게 하시고 고뇌하게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고 아픔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성숙을 기대하시고 성장하고 여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민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성도들에게 초능력을 주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성숙을 원하십니다. 신앙이 여물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신앙의 모습에서 향기가 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바램이십니다.

성숙은 참 좋은 것
성숙함은 무엇이든지 참 좋은 것입니다. 그 모습은 보기에 좋고 내용이 좋습니다. 과일이 잘 익은 모습을 보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보기도 좋지만 맛도 좋고 향기도 좋습니다. 씨앗을 심었더니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더니 그 열매가 아주 탐스럽게 익어갑니다. 거기서 맛이 나오고 멋이 나오고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함이 주는 기쁨입니다. 성숙함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 커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그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하고 또 손자를 낳았습니다. 그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이면 손자 자랑입니다. 손자 자랑을 너무들 하니까 손자 자랑할 때는 돈을 내고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무 자랑을 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돈을 거둬준다고 합니다. 사실은 손자 자랑을 해도 괜찮습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예쁩니까?

식물이나 사람이나 열매를 맺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거기다 사람이 성숙해서 인격과 지성이 푹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 모습이 참 인간의 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흐트러진 모습을 가다듬게 되고 반항하던 사람들이 삶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숙하고 익어가는 모습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성숙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숙은 시간이 필요
그런데 이렇게 익어가고 성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식물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결실하기까지도 한 계절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또 아이가 성장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자기구실을 하려면 적어도 30년의 세월이 흘러야 가능합니다. 그래도 내어 놓기가 미덥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겠습니까. 평생 신앙생활 해도 그 신앙이 미완성입니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려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급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빨리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일 년 믿고 세례 받고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빨리 성장되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빨리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보다 얼마나 단단하게 얼마나 온전하게 성장할까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우리를 즉시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자라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만큼 밖에는 자라지 못하지만 그 대신 가정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가정만큼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라도 항상 사회와 민족을 위해 맘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나 민족만큼 자라는 법입니다.

모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
성장하는 데는 반드시 괴롭힘과 고통이 수반됩니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상당한 고통이 뒤따릅니다. 꽃이 피는데 꽃샘추위가 얼마나 괴롭힙니까. 때로 비바람이 얼마나 괴롭힙니까. 무엇이나 성장하려면 반드시 이 같은 고통이 수반됩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데도 고통이 따릅니다. 우선 공부해야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지옥훈련을 받듯 공부하는데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그러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 아픔입니다. 믿지 않을 때 하던 습관들을 끊고 버려야 합니다. 그때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옛날의 습관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고통 중의 하나는 신앙적으로 시험을 받는 일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끊임없이 이 시험이 다가오는데  알고 보면 이 시험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때 당시는 아픔이 있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 시험을 거치고 나면 곧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겨울이 되면 춥고 얼고 눈이 오고 으스스 하고 좋지 않지만 그 겨울 때문에 봄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에 반가움이 있고 신비함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언제나 더운 나라에서 살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불행입니다. 폭풍이나 강풍은 사납게 세상을 흔들어 놓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온 세상이 맑아지고 공기와 물과 세상을 맑게 변화시켜 줍니다. 또 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그 당시는 어려움도 있고 고통이 따르지만 그 어려움을 이기고 지난 후에는 더 감사하게 되고 더 알게 된 것 많아서 감사할 일이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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