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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다이 외쳐 고하라 (사 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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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목사들 중에는 늘 교인들을 야단치고 책망하는 설교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목사는 그저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과 완곡한 표현만을 써서 내내 설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교인들이 설교 시간을 겁내게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처럼 양극단 중의 한쪽 어투로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구약 전체는 그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듣는 자의 형편에 따라서 때로는 부드럽게 속삭이고 때로는 강력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정다이 위로하라」는 말씀과 「외쳐 고하라」는 말씀이 같은 문맥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복음 선포에 항상 동시에 흐르고 있는 대조적이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의 톤(tone)인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어떤 위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했던 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종살이하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며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이 그들의 죄값으로 망하게 될 것을 선포하고 계실 때부터, 그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생활하게 될 때 가서는 당신께로부터 그 어떤 위로를 간절히 사모하게 될 것을 이미 내다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요긴한 위로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일찍부터, 아직 바벨론 포로 시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선포해 주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위로는 그저 달래고 다독거려 주기만 하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따끔하게 깨우쳐 주는 동시에 그 상처를 부드럽게 싸매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경주일을 함께 지키면서, 과연 이 성경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떻게 ‘정다이’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외치면서’ 그 복음의 메시지를 고해 주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은 인생이 받고 있는 ‘죄벌’을 큰 소리로 깨우쳐 주면서, 또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죄사함’의 은총으로 위로해 줍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1절과 2절의 말씀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위로하라」는 말씀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유다 백성에게 전해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오로지 그들을 격려하여 새 힘을 얻게 하려 함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니 그 위로의 선포는 「정다이」 즉 사람들의 심정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 닿도록 전파되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메시지로써 그들을 정답게 위로하고자 하셨습니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유다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의 고통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죄값인 것을 먼저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만일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망국과 포로의 비극이 바로 자기네들의 죄 때문인 줄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의 고통은 결코 끝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큰 환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운 나쁜 일이고 참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 그 울화병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이 자기네들이 받아 마땅한 죄값인 줄로 깨닫게 되었을 때는 그 심정부터 우선 한결 가벼워졌을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참된 위로를 받는 첫 단계였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둘째로, 그처럼 자기 죄를 깨달은 유다 백성들에게 완전한 죄사함을 선포해 주시면서 그 죄의 형벌 기간이 끝나게 되었다고 또한 위로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 마땅한 벌이지만, ‘네가 받는 벌은 네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요 그 죄값의 복역이다.’라고 엄격하게만 외쳐진 말씀이었다면, 그 유다 백성들의 마음에 ‘정답게’ 와 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벌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복역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는 말씀보다 더 좋은 위로가 있을 수 없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실로 정다운 말씀을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위로의 말씀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일러 주시면서 그것들을 ‘예루살렘’에 말하고 외쳐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전까지는 그야말로 온갖 전쟁으로 이리저리 시달리고 짓밟힌 도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정다이 외쳐 주시는 위로로 인하여 그 예루살렘은 놀라운 은총으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이 복음의 위로를 받기 전까지는 세상의 온갖 환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마치 전란을 겪은 폐허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인생은 매일같이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싸우고 빼앗고 뺏기느라고 생긴 상처투성이의 전쟁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엉망진창인 인생을 향하여 복음의 말씀은 놀라운 위로들을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우선 성경 말씀은 우리 인생의 곤고가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죄값’이라고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당하는 인생 고통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전쟁터 같던 인생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그저 자기 인생을 두고 ‘재수 더럽게 없다.’고 욕하고 저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더 이상 세상이 더럽고 불공평하다고 이를 갈거나 분통터지는 가슴앓이는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통해 당하는 고난은 사실상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오직 이 성경 말씀만이 우리 귀에 대고 따끔하게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가 받는 죄값의 형벌 기간은 유한한 것이며 짧게 끝나는 것이라고 더 큰 위로를 보태어 줍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제대로 갚자면 평생을 매일같이 벌 받으면서 살아도 턱없이 모자랄 것인데도, 성경은 우리의 복역의 때가 이미 끝났고 우리는 이미 특사를 받은 자라고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어도 못다 받을 벌인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이미 받아야 할 벌을 배나 받았다’라고, 우리의 지은 죄에 비하여 오히려 벌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해 주시는 이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인생의 시련과 고통들은 지극히 당연한 죄값인 것을 깨닫도록 외쳐 주시는 말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는 아무 조건도 없이 완전한 죄용서의 특별사면을 받은 자라고 부드럽게 일러 주시는 말씀으로 크게 위로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은 인생 마음 속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라고 외치면서, 또한 구세주를 통하여 하나님 만나는 ‘구원’의 길을 자상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어지는 본문 이사야 40장 3절부터 5절의 말씀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은 「외치는 자의 소리」 즉 오실 메시아를 예비하는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의 음성을 통하여 이처럼 큰 위로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육체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뵈올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죽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지극히 악한 죄로 물든 피조물 인간의 육체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아니 결코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도 없는 관계라는 것은 그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 된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하셔서 사람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죄라고는 한 점도 없이 순결하신 하나님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로 가득 채워진 인생을 몸소 찾아오셔서, 그 완전무결하게 거룩하신 영광을 보여 주신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자상한 면회이며 눈물겨운 위로입니까?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고마운 위로를 받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외쳐 고해 주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준비해야 한다고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골짜기」 같은 마음은 「돋우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둡고 침침한 마음을 말씀으로 덮어 메우고 매끈한 길이 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선천적으로 부정적이며 무조건 비판적인 이 까다롭고 고질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탈피해야만 그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수 있는 방향으로 다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져야」한다고 또한 외칩니다. 인간을 최고로 높이는 마음, 자기 자신을 제일로 생각하는 교만, 이것이 낮추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어느 육체도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고르지 않은 곳」과 「험한 곳」 또한 평탄한 「평지」가 되어야 한다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조금 믿는 것 같다가도 금시 의심하고 조금 열심 내는 것 같다가도 곧 돌아서는 이런 변덕 많은 마음 역시 바로 나 자신 속에 늘 도사리고 있는 울퉁불퉁한 신앙의 장애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제거하고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을 친히 뵈옵게 되리라는 것이 유다 백성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처럼 유력한 군주를 다시 모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예 최고의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로부터 어떻게 위로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경제 불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느 대통령이, 어떤 정부가 나를 잘 먹고 살게 해 줄까 하고 기다립니까? 나는 일자무식하지만 우리 똑똑한 아들이 잘 자라 보란 듯이 출세해서 남들 앞에서 어깨 힘주게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위로를 그런 유치한 수준으로 낮추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장망성에서 헤어날 길 없는 사망의 언도를 받고 살던 우리에게 화육강생의 면회까지 해 주시면서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지옥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죄인에게 구세주께서 친히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쁨, 더 좋은 위로가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고정 관념의 골짜기에 빠져서, 아직도 자기만 똑똑한 줄 아는 교만의 산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워낙 변덕스럽고 걸핏하면 쉽게 틀어지는 울퉁불퉁한 성격 때문에 그 주님과 대면하여 만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가득 찬 ‘육체’가 원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바로 그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수 있는 이 꿈과 같은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앞에 활짝 열려졌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말씀을 따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장애물들을 먼저 제거함으로써, 악한 죄인들을 불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있게 해 주는 이 자상한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답하고 그 구원의 길을 기쁨으로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은 불신 인생의 끝은 ‘멸망’이라고 뚜렷하게 경고해 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생’을 정다이 고해 줍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6절로 8절의 말씀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유한과 멸망의 존재인 것을 깨우쳐 주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것을 벗어날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기네들의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를 결국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꽃」 같은 전성기라는 것이 겨우 삼대를 못 가서 「말라 버리고」 그 주변 이방민족들 앞에 내노라고 자랑했던 「아름다움」이 남북조 분열 이후부터 하루하루 「시들어」 가더니 급기야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아예 그 나라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 딴에는 꽤 잘 산다고 뻐기고 살던 것이 「여호와의 기운」 그 ‘입김’ 한숨에 하루아침에 간단히 결딴나게 되는 것을 제대로 단단히 맛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낮추시는 데는 별달리 복잡하고 대단한 것을 동원하실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저 입김 한 번만 부시면 끝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입김 한 번이면, 무슨 화평한 집안이고 안정된 사업이고 발달되는 사회고 부강한 국가고 할 것 없이 간단히 하루아침에 말라 버리고 시들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평소에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그 같은 가벼운, 그러나 인생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입김을 받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되는 법입니다. 덧없고 유한한 자기의 인생임을 깨닫게 될 때야 비로소 사람은 불변을 그리며 영원을 사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14절에 기록된 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을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으며 그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영원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찾고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하반절에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하는 그대로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원래 자신의 능력으로는 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던 영원의 세계로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 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해 줍니다. 그 말씀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자랑하고 있는 재물의 영광, 명예의 영광, 건강의 영광이란 것들이 곧 마르고 시들고 말 유한한 것들에 불과함을 알게 해 줍니다. 그 말씀이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자신이 당하는 인생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고 계시는 입김 때문인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뚜렷하게 외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바로 그 꼭 같은 말씀은 어조를 완전히 바꾸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덧없이 짧은 인생을 쫓아가느라고 연연하지 말고 영원하신 약속을 의지하라고 더없이 정답게 말해 줍니다. 무상한 인생 가운데서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불변의 소망이 이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마르고 시드는 풀과 꽃의 인생이 되지 말고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실로 정다이 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영원한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 육체의 능력이 어떻게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나의 학벌이, 나의 재산이, 나의 미모가 얼마나 오래 내 인생을 지탱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도 일종의 영광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풀과 꽃의 영광’에 불과함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는 자에게는 완전히 말라붙어 버리는 자리, 영벌의 멸망만이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의 의도나 목표나 계획이 아니라 영원불변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시고 이루실 바를 기록한,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는 신자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어디 딴 데로 가겠습니까?”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영히 서 있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 바로 이것이 이 유한하고 무상한 인생에게 주어진 진짜 위로요 영원한 소망임을 확실히 믿고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하지 않는 자기 백성을 돌이키기 위하여 징벌을 준비하시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장차 그 징벌 가운데서 뉘우치게 될 자기 백성들에게 내릴 위로 또한 바로 그 때부터 벌써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정말 생각할수록 한없이 깊은 사랑이요 끝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위로의 말씀은 역사상 가장 큰 민족적인 고난을 겪었던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꼭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세상에서 이 고난의 인생을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정다이 외쳐’ 고하여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시간은 이미 끝나 버리고 완전한 사면을 얻었다고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자기 속에 있는 의심과 교만과 변덕을 제거하면 비록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구원의 대로를 걸어갈 수 있다고 또한 격려하고 계십니다. 잠시 모든 것이 잘 되고 완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유한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바로 깨닫고서, 오직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굳게 붙잡고 마음 놓고 기다리라고 또한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탕막대기’ 같은 말로만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착하다 착하다’하면서 머리나 쓰다듬어 주면서 우리를 버릇없게 키우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곤고와 슬픔 중에 살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우리 속에서 찾게 해 주고, 바른 믿음 못 얻도록 만드는 장애 요인이 바로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고 따끔하게 깨우쳐 주고, 헛된 인생을 좋다고 자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야단쳐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내가 기도해 보니까 너희 집안에 마가 끼었어.’라는 따위의 점쟁이 소리나, ‘몇날 며칠에 인류가 멸망한다.’라는 따위의 저주로 사람을 겁주고 위협하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도무지 스스로 죄값을 다 갚을 길이 없는 인생인데도 벌써 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다는 너무나 고마운 말씀, 다 양처럼 제 멋대로 제 갈 길 다니면서 살던 죄인인데도 친히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황공무지한 말씀, 썩을 육체를 자랑하면서 오만하게 살아가던 자들을 그 ‘영생의 약속’으로 견인하여 주시겠다는 자상하기 짝이 없는 말씀, 우리에게 실로 정이 철철 넘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사람의 지정의(知情意)를 골고루 자극시키고 감동시켜서 깨닫고 따라가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강한 톤(tone)’과 ‘부드러운 톤’을 완벽하게 조화시켜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악한 죄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에 대하여 이처럼 따갑고 엄하게 ‘외쳐’ 주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약속을 이처럼 ‘정다이 고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이 귀한 성경을 늘 믿고 순종하며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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