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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라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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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섭 목사

한달 전 모 대학교 교목실로 부터 예술대학 채플시간에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강단에 섰습니다. 그 시간에 예배에 참석하는 대상은 음대와 미대 학생들입니다. 400~500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학생들의 자세가 예배드리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찬송가는 사회를 보는 교목 혼자 독창으로 부르고 있었고 교수가 나와서 대표기도를 드리는 중에도 여기 저기서 수근거리는 소리, 핸드폰 벨소리 등 소란스러웠으며 설교시간에도 안 듣기로 작정했는지 귀에는 MP3 이어폰을 꽂고 앉아있는 학생,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학생, 아예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 잠자는 학생, 가지각색이었습니다.

물론 그 예배에 참석한 학생들은 60%가 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학교 방침에 따라 채플 학점을 따야 졸업을 하기에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 중에 40%는 기독교인들인데 이들 조차도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60%의 비 기독학생들의 잘못된 행위를 따라가고 있다니 세상의 빛인 저들은 어디에서 비추일 것인가? 둘째는 들으려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였습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준비했던 설교를 담대하게 전하고 내려왔는데 귀담아 듣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목실에 들어가서 담화를 나누는데 교목실장은 제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잘했노라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이야기인즉 대개의 목사님들이 이곳에 와서는 헤매다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들으려 하지도 않는 학생들을 앞에 놓고 저들의 마음을 움직일 능력이 내겐 없나보다. 듣지도 않는 설교를 계속해야 하는가? 라는 갈등도 있었고, 오늘 내가 여기 와서 설교한 일이 잘한 일인가? 라는 생각이 수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0절부터 시작된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최종결론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지도자 등에 대한 인간적 판단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교회지도자들을 세상 지혜로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가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인간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파당을 짓게 하고, 분열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적인 평가와 인간적인 판단을 버리고 공의의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이므로 그 분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3절 말씀에서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라고 했고 4절 말씀에서는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스스로를 판단할 때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극단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자학입니다. 자학이란 지나친 자기비판입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지만 지나친 자기비판에 빠지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에너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재기가 힘들어집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상처를 받게 되면 인생을 향한 다른 도전이 시작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극단적인 자기판단입니다.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자기사랑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판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거짓된 자기허상을 바라보고 자기 실제모습이 아닌 허상의 이미지를 설정해놓고 그것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굉장히 이상적인 인간인 것처럼 판단하고 착각 속에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여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르시즘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나르시즘이란 단어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시스라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청년이 깊은 숲 속에 들어갔다가 은빛 찬란한 고요한 호수 하나를 발견합니다. 호수에 비친 자기모습 그것이 자기모습인줄 모르고 이 청년은 "참 아름답구나" 하고 호수에 비친 사람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 호숫가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맴돕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아의 병-자기를 사랑하는 병입니다. 이렇게 설명했더니 어떤 여학생이 손을 들고 "제가 아무래도 그 병에 걸린 것 같아요." 왜 그러냐고 하니 "아침에 거울을 보면 황홀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이 말합니다. "얘야 이것은 나르시즘이 아니라 착각의 병이란다" 라고 했답니다. 스스로를 판단하다보면 물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허상의 이미지를 자기 이미지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스스로 의롭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신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책망 받을 일이 없도록 충성을 다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간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판단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 말씀에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작은 일이라도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하여 작은 일이라도 귀담아 들어야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치면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선언일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관점은 주님의 관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내 인생을 결단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때로는 힘겹고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일감을 맡기신 이유는 나를 칭찬하시고 싶어하는 주님께서 일감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그마한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일은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이제 우리는 스스로도, 남에게도 판단을 받지말고 주님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그 날에 칭찬과 상급이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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