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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부장의 믿음(2)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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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오늘 본문은 칭찬받은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왕 신앙 생활하는 것 칭찬받는 사람이 되십시다.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되십시다. 또한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받겠다는 이 욕심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백부장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받았습니까? 우리가 한 가지는 생각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하인의 병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온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보다 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높은 사람, 자기 식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찮게 생각해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없는가? 주의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두 번째로 백부장이 칭찬받은 이유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하인을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은 로마의 권력자입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가 가서 하인을 고쳐 주겠소.” 라고 말씀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부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좀 서글펐던 일들은 성도들 중에 담임목사님의 심방은 귀한 심방이고 부목사의 심방은 달가워하지 않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님을 모시려고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직접오시지 못하고 부목사가 대신할 때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사람들은 직접 만져주거나 직접 방문하여 위로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서 하인을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바쁘시고 존귀하신 분이 미천한 저희 집까지 오실 수 있습니까? 황공하옵니다.”라고 겸손을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겸손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로마 백부장의 주인은 로마 황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주’라고 부르는 것을 누가 황제에게 보고하면 백부장의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아무에게나 ‘주’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잠언 18장 12절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탉 두 마리가 한 마리의 암탉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곧 승부가 나서 약한 놈은 힘센 놈에게 쫓겨 덤불 속에 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힘센 수탉은 의기양양하여 높은 담에 날아올라 활개를 치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그 수탉을 채어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덤불 속에 숨어 있던 약한 수탉은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암탉과 같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그러나 비굴과 겸손은 다릅니다. 비굴한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갖추고 있지만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굴은 자격지심에 의해서 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겸손은 당당합니다. 그러나 당당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비굴은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겸손은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합니다. 그러나 비굴은 해야 할 것을 피해서 도망합니다. 

백부장은 당당합니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하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늘 말씀하십니다. 겸손해라 목사는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잘나가면 겸손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은데 속으로는 교만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겸손한 성도들입니다. 갖추고 있지만 낮추고 있습니다. 당당하지만 당당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것은 합니다.

그러나 더 겸손 합시다.
나는 교만하여 너무 도도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교만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내가 주인 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과장된 겸손 가운데서 포장된 교만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는가?
혹시 나는 비굴한 것을 가지고 겸손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겸손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기를 부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결론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당하면서도 늘 겸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백부장이 칭찬 받았던 이유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리라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백한 다음에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을 것입니다.”고백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현재 있는 장소에 말씀하셔도 집에 있는 하인의 병이 낫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환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어떤지, 이 병의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진찰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곳에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집에 있는 하인이 낫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말씀하셔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집에 있는 하인의 병이 낫을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믿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내 능력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저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을 내가 만났구나 생각하시고 “이스라엘 중에서 누구에서든지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목사인 저를 믿어 주시기에 저는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목사에게 있는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이목사님과 함께 아름다운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간다는 자부심을 가진 성도들이 있으니 참으로 기쁩니다.

‘의심하고, 못 믿고, 진가민가하고, 해 봐야 알지 뭐!’라고 나를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습니까? 저는 기분이 안 좋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집에 있는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소리를 들으시면서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배척했던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고 떠났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봐왔기 때문에 ‘예수에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의심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배척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마 13:57) 
그래서 58절에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이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감동을 먹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능력이 나타나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의 능력이 현실에서 나타나게 하는 열쇠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그랬더니 하인이 그 시로 나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그렇습니다.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사랑하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오늘 역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런데 왜 오늘 백부장과 같은 역사들이 안 나타납니까?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왜 안 나타납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바라는 것들을 우리의 현실로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미래들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줍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주여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나의 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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