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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주님 (마 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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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장부터 마태복음의 제 2권이 시작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8:1-9:35까지는 예수님의 선교의 특성으로 특별히 10개의 표적 사건이 나타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중에서 처음 세 가지 기사는 병 고침에 대한 기사입니다. 문둥병, 중풍병, 열병 - 이 세 가지는 그 당시 가장 곤란한 병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환자들은 누구입니까?

문둥병자는 유대인 중 소외된 자입니다. 중풍 병자는 로마 백부장(이방인)의 종으로 이방인이기도 하였지만,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병을 앓는 이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로서 나이 많은 여인입니다. 이 세 부류의 모습은 한 마디로 그 당시로서는 주변적인 인물들입니다. 즉, 주류(main line)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변두리 인생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변두리 인생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기자는 강조하여 이 10개의 표적 기사 중 앞부분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선교 사역의 의미와 성격이 본문 16-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병 고치심의 의미와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병은 인간의 편에서 볼 때에는 다 없어졌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의 종착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모든 병과 약함을 짊어진 모든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의 집결체인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예수님의 이러한 병 고침의 사역은 바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의 내용과 어우러진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하신 약속과 관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14-15절). 이 사건이 가져다주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다.

1. 이 사건의 특징과 성격

이 사건은 예수님이 솔선해서 병을 고쳐준 단 한 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자의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일이 어떤 성격과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도록 하십시다.

1-1. 이 사건의 특징(Speciality)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솔선해서 병을 고쳐주신 사건이라는 특징 말고도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이 속한 공동체와 관련된 사람을 고쳐 준 경우는 여기에서만 볼 수 있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결코 무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까지도 돌보아 주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약시대의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엘리사를 따르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제자의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종, 내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 남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난하여 많은 빚을 졌는데, 이제는 빚 주인이 찾아와 나의 두 아이를 가져가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엘리사는 이 제자 가정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너희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희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단지 기름 한 병뿐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이 여인에게 명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있는 대로 가능한 한 많이 빌려 오라.” 이에 이 여인은 동네에 가서 있는 대로 그릇을 빌려다가 집에 쌓아 두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명합니다. “이제 네 두 자녀와 함께 방에 들어가 문을 꼭 닫고, 가지고 있는 그 기름병을 들어 그 그릇마다 채우라.” 이 여인은 엘리사가 명한대로 하였습니다. 한 병 밖에 없던 기름병에서 그 그릇을 다 채우도록 부었습니다. 더 이상 부을 그릇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찾아 갔더니, 엘리사는 “이제 그 기름을 다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자녀들과 더불어 생활하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왕하 4:1~7에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관계된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1-2. 이 사건의 성격(Character)

오늘 본문의 사건의 성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Healing)의 특징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특징은 그 온전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열병은 학질 혹은 말라리아라는 병입니다. 이 병의 특징은 힘이 빠져서 탈진상태에 이르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열병을 앓다가 낫는다고 해도, 힘이 없어 며칠은 꼼짝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자마자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치는 그 자체 뿐 아니라, 이렇게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원기(energy)까지 회복시켜주는 능력이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돌보심은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까지 치유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2.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Theological meanings)

2-1. 이 사건은 부활 공동체의 할 일을 암시해 준다.

이 사건의 첫 번째의 신학적인 의미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에 따르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암시해 준다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15절,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여기서 “일어나서”라는 말은 원문에는 “일으킴을 받아서”라는 수동태로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으킴을 받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한 말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고(살아나셨고)”라고 할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일으키시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으킴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생겨진 교회공동체의 탄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사건인 부활로 말미암아 생겨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던들 교회는커녕, 예수님의 모습마저도 단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추억 속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겨질 수 있었던 데에는 주님의 부활하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에서 우리는 부활로 말미암은 교회의 탄생을 연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상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 사건의 두 번째 신학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2. 예수님께 수종을 들게 된 베드로의 장모

이 사건의 두 번째 신학적인 의미는 예수님께 수종을 들게 된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우리는 여기서 치유함을 받은 사람의 자세를 눈여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과 자세는 복음서 안에 있는 다른 치유의 이야기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모습이라는 데 이 사건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는 자세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로서는 이 사건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정신이 온전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따라 가고자 요청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너에게 행한 일들을 네 친속들에게 고하라”고 다른 소명을 주셨습니다(막 5:18~19).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의 사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수종을 받으셨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수종을 허락하셨다는 뜻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수종을 드는 일은 주님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굶주리신 가운데 마귀에게 극심한 시험과 유혹을 받았지만, 결국은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마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마귀들이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4:11). 여기서 “천사들이 수종들었다”고 할 때의 말과 “베드로의 장모가 수종들었다”는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이 “수종들다”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들도 잘 쓰는 말로서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말에서 집사를 뜻하는 Deacon(남자 집사) 혹은 Deaconess(여자 집사)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모습에는 이러한 예수님으로부터의 허락이라는 조건이 붙게 되는 동시에, 천사의 역할도 감당한다는 귀한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교회 공동체는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께 수종든 것과 같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모습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러한 수종드는 자세는 바로 천사의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하였지만, 천사는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수종든다는 모습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런 것은 아니다”라고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하거나 예수님을 무너뜨리려는 자세만은 아니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이 부활의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수종드는 우리들은 바로 이 사실을 잘 깨닫고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했던 마귀의 역할에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수종들던 천사의 역할에 쓰임 받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열병에 들었던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께 수종들래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또 군대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 받은 거라사 지방의 청년도 예수님을 섬기고자 했지만 예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몸된 교회, 곧 부활의 공동체에서 수종드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우리 역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교회를 섬길 때에 교회의 거룩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이렇게 교회를 그리스도로서 수종드는 우리 자신이 먼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점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정리 및 결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아주 짧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키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먼저 아시고 행하신 유일한 치유의 사건이라는 것, 일으킴을 받은 자가 즉시 일어나 수종을 들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일으킴” 이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 등등을 생각해 보면서 이 사건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복되고 부활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심에 의해 회복된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러한 공동체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로 그 모습과 방향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주어질 있었던 근본적인 전제 조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에 나온 말씀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이 말씀은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활동을 말씀하는 내용이고,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는 말씀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속에 주어진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수종들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전제 조건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늘 잊지 말고 겸손하게 우리의 수종드는 일들을 통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이루어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심으로 그 당시 연약한 여성도 주님에게 수종드는 귀한 일을 할 수 있음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뿐만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까지도 돌보아 주시고 보살펴 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가 읽고 묵상한 말씀에서처럼, 우리들에게도 은혜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가 하늘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주님의 몸인 교회에 수종들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부족하지만 저희들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오매,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통해 그의 장모가 은혜를 받았듯이, 저희들을 통해 저희 주변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주님의 위로와 치유와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역사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설교 /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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