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엡 6:1- 3)

  • 잡초 잡초
  • 306
  • 0

첨부 1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버이와 함께 하는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우린 일치감치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르신들께 달아드릴 카네이션꽃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손길에서,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는 꿈지기들의 손끝에서, 어버이 노래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의 입가에서 이미 우리는 풍성한 행복을 경험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드려진 "어버이와 함께 하는 예배"는 다른 해와 달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의 사랑과 관심이 합해진 사랑의 잔치이기도 하기에 더욱 뜻깊은 예배가 되었습니다.

오늘 앞자리에 어르신들을 배치하였는데 여기에 사용된 평안한 의자들은 나사렛성전에서 젊은이들과 꿈지기들을 위해 사용할 것들인데, 오늘 어르신들께서 개시하신 것입니다. 어르신들이 먼저 앉으셨기에 더욱 의미가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주실 때, 먼저 부부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에는 세가지 중요한 관계가 존재하는데, 첫째가 부부공동체요, 그 다음이 부모공동체요, 그 다음이 자녀공동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순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버이주일이기는 하지만 어버이들 기분 좋으라고 순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첫째가 부부요 그 다음이 부모요 그 다음이 자녀입니다.

오늘 저는 이 세가지 순서를 하나씩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는 부부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은 부모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리고 독주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셔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 하와를 지을 때 아담의 부분을 통해서 지으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셔서 부부가 되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자녀가 생기니까 당연히 부모라고 하는 위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 중에 첫 번째 질서로 부부의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 부부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구성원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부부에 대해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제대로 된 부부가 되어 보자고 애를 씁니다.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그래서 요즘은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따로 훈련도 받고,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따로 훈련도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부가 같이 훈련도 받습니다. 부부가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면서 지금까지 한 집에 살기는 했지만,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제 구실을 못했다고 하는 거에 대해서 우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아내에게 대해서 잘 못 한 점 100가지, 한번 노트에 써 보려고 하면 처음에는 내가 못 한게 무엇이 있나? 생각이 들지만,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가지고 써 보면 노트 한 장을 다 쓸만큼 아내에게 못 한 일들이 많습니다. 남편에게 못 한 일들 100가지를 써보려고 하면 그것도 처음에는 없는 것 같아도, 써 보면 한 없이 쓸 수 있는 것이 우리 아내들이 남편에게 대해서 잘 못 한 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을 서로 읽어주고 서로 예를 들으면서 서로가 눈물로 부족한 것을 인정하는 일들, 여기서부터 부부의 건강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로써 권위만 내세워 가지고, 무조건 밀어붙이려고 그러고, 그러다 보니까 유교적인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여자는 그저 여자로 무슨 일이든지 그냥 여자이기 때문에 한 평생을 한 맺히게 살아가는 거지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60세가 되고, 58세가 되어서, 공무원 직장 정년퇴직해서 퇴직금 몇 억 받으면 받은 그 날 이혼합시다 그러겠어요. 그 이야기가 얼마 전에 일본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이야기가 되었어요.

일본에서 조금 유행하면 금방 현해탄 건너서 한국에서 유행합니다. 제가 한 10년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일본에서 ~방, ~방이 유행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방, ~방이 유행한다고 그럴 때 우리 교인들 중에 그것 무슨 목사님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시냐고 그런 것까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들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다 방으로 통해요.

찜질방부터 시작을 해서 나중에는 아주 좋지 않은 것들도 다 ~방, ~방입니다. 저는 사랑방 빼 놓고는 다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제는 부부들이 건강하지 않은 부부들이 한을 가지고 살다가 퇴직금 나오면 그 때에 갈라서자고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눌려 살았고, 지배 당해 살았고, 자기의 의사를 인정받지 못했고, 상대방의 잘못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살아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잘못된 부분들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제 우리 새출발합시다. 그렇게 시작을 하는 새로운 부부관계의 모습들이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부부가 건강해야 가정이 건강하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그런 사실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저는 부모와 자녀에 대한 말씀을 둘째, 셋째 순서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1절과 2절, 3절의 말씀은 특별히 주님께서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녀들아, 하면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해야 할 일,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요청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를 달기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부모에 대한 순종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향해서 떠올릴수 있는 단어는 하나만 뽑으라고 하면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부모에 대해서 순종이라고 하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런 생활을 했는가? 하는 것이 오늘 회중석에 자녀의 도리로 앉아있는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가?

제가 중학교 때 일로 생각이 되는데, 이제 학생들이 제일 스승에 대해서, 학문에 대해서 도전을 받을 때가 아마 중학교 때로 생각이 됩니다. 어릴 때만 해도, 초등학교 때만 해도, 친구들과 의견충돌이 되고, 그런 이야기가 되면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가치관,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그렇대.’ 그러면 그게 친구들 사이에서 규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미국이 제일 크대.’ 그러면 그걸로 끝이예요.

그랬던 그 초등학교의 아이의 마음이 중학교에 가면서 과목마다 선생님이 달라지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야, 이 선생님이 대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 다양한 지식, 과학적인 지식을 자기 자신이 굉장히 멋있게 느껴지고, 새롭게 느껴지지요.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부모님들은 무식해. 옛날에 배워가지고, 몰라.’ 이런 상대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로 생각이 납니다만 어머니와 어떤 일로 의견충돌이 났어요. 어머님도 지금 81이신데, 세브란스 간호대학을 나오신 분이예요. 그 당시에 그렇게 공부했으면 대단한 분이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는 어머님은 이제 구닥다리, 옛날거 밖에 모르는 분, 중학교 가서 내가 아는 그 지식은 너무나 현대적이고 새로운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잘 안 맞았어요. 끝까지 서로 의견이 충돌이 되었어요.

그 때 제가 한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우리 재판합시다. 중학교 때 무슨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면 법원가서 재판하는 법원에 대해서 공부를 했거든요. 지금 어머니하고 의견이 안 맞아요. 계속 이야기 하는데 끝까지 의견이 안 맞아요. 저도 저의 의견을 접을 마음이 없어요. 결국 어머니에게 제안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머니 그러면 재판해 봅시다.’ 어머니가 그 때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아직 어릴 때는 우리의 것이 제일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이 가진 생각은 옛날 것으로, 낡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도 그 때 일을 생각해 보면 한 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아버지라고 그 분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신앙에 있어서 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순종이라고 하는 단어를 우리는 생각합니다.

사무엘상 15장은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했는데, 사실 그 전쟁에서 승리할 때도, 처음에 전쟁에 나갈 때에도 하나님께 여쭈었어요. 하나님, 우리가 아말렉과 전쟁을 해도 되겠습니까? 혹 전쟁을 한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 사무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나가라.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였느니라.’

그래서 사울은 나가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겼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 했느냐 하면 이 전쟁은 어느 것도 남김없이 다 진멸해야 한다. 남겨서는 안된다.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울왕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다보니까 전쟁을 하려면 수많은 군량과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필요한데, 수없이 많은 양떼와 소떼들이 전쟁터에 군량으로 와 있는데, 전쟁에 이기고 나니까 그 좋은 소떼와 양떼들을 그냥 죽이기가 아까웠어요. 모조리 진멸해 버려라고 하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은 그것을 죽이기가 아까웠어요.

그래서 소떼와 양떼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끌고 왔어요. 전쟁의 개선장군으로 그들을 맞이하는데, 제일 앞에 사무엘 선지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손에 붙였기 때문에 당연히 승리하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군사들 뒤에 이상한 소떼, 양떼 소리가 들립니다. 왕이여,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실은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는데, 다 진멸하라는 말씀은 알기는 아는데, 진멸하라고 하니까 소떼하고 양떼가 너무 아까웁게 보였어요.

이것을 내가 하나님께 제사할 때 한 번 써 보려고 한번 살려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에게 한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사울왕이 양떼와 소떼를 살려가지고 가지고 온 것은 그것을 나중에 제사에 쓰겠다고 하는 명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고 하는 것은 지금 사울을 하나님의 뜻도 거스를수도 있는데가 왕의 위치가 되었다고 하는 교만으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많이 컸다는 거지요.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서 가끔 그런 모습을 봅니다. 집사님 때는 참 겸손했는데, 권사님 되면 저 사람 많이 컸네. 많이 교만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권사님 때는 괜찮았는데, 장로님 되고 나니까 달라집니다. 저 장로 많이 컸네.

그런데 아름답지를 않아요. 지금 수많은 소떼와 양떼를 이끌고 왔지만 우리 하나님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울의 마음에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 정도는 가끔씩은 무시해도 괜찮을 거라는 교만이 행동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태도, 행동은 생각이 좌우한다고 합니다. 이미 사울왕의 생각 속에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끔씩은 무시해도 될 것이라는 교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가장 작게 여길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열 두 지파 가운데 가장 높이 드시지 않았습니까?

사울왕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제일 막내 지파 사람입니다. 왕이 나올 수 없는 지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겸손해 하고, 그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들어서 왕으로 삼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에 대한 자세는 순종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왕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왕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당신은 지금 수많은 양떼와 소떼로 주의 제단에 드리겠다고 그러지만, 주님이 수많은 양떼와 소떼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하는 당신의 삶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도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어서 많은 것으로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져서 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녀된 본분에 있어서 순종의 삶이 제사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맘 속에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님들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너희가 어떻게 보이는 부모들을 섬길 수 있겠느냐?

아마 지금 여러분들은 앞에 계신 부모님들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감격과 감사로 가득차 있는 분도 있을 테고, 어떤 분들은 너무나 죄송하고, 너무나 부끄러워서 눈물을 적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는데, 교회에 부모님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올 것입니다.

바쁘다고 생일에도 한 번 챙기지 못하고, 바쁘다고 명절에도 한 번 가지 못하고, 명절에도 일 때문에 그래서 늘 전화만 드리지요, 어머님, 가고 싶은데 일이 많아서 이번 명절에도 못 갑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괜찮아. 안 와도 괜찮아. 전화만 해 줘도 고마워.

그러면서도 어머님은 자녀들이 올 것을 대비해서 대청소를 해 놓고, 김치를 담가놓으시고, 갖은 음식을 다 준비해 놓으시지요. 여러분, 오늘은 한국통신 KT에서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전화 5분동안은 무조건 무료입니다. 시내전화, 시외전화 할 것 없이 오늘 5분동안은 무료입니다. 부모님이 멀리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안부전화 하세요. 저도 필리핀의 장모님에게, 소사동의 어머님에게 오늘 예배 전에 8시반에 전화를 드렸어요.

뭐, 한국통신에서 무료로 한다고 해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모실 수 없으니까 어제 미리 가서 카네이션 드리고 함께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지요.

어느 직장에 다니던 부부가 고백의 글을 썼습니다. 늘 부모님하고 무슨 일을 할 때 직장으로 바빠서 못갑니다. 무슨 일에 바빠서 한 시간, 두 시간 늦게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글을 썼어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사실은 제가 바빠서 못 간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간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제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용서를 빌었어요. 제 마음이 없어서이지,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부모님께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부모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가 회개하고, 시간은 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바쁜 대통령도 매일 부모님께 전화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 모두 자녀의 입장에 있는 성도들은 부모에 대해서 순종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공경이라고 하는 말에 헬라어의 본 의미는 부모를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 값을 치러라.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을 섬기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돈이 들지요. 부모님에게 용돈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원씩 드리시나요? 오만원씩 드리십니까? 십만원씩 드리십니까? 어처구니 없게도 IMF에 어떤 이야기를 들으니까 IMF라고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깎아답니다. 100만원 드리던 것을 90만원 깎았다면 말이 되지만 그런 사람은 아마 모르긴 해도, 거기는 또 깎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서 다 희생하신 부모 앞에 한 달에 10, 20만원 드리면서 그것을 깎겠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얄팍한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부모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희생과 봉사에 값을 치우라 그 말입니다. 부모님 모시는 것 당연히 희생이 따라가지요. 부모님 모시는 일 당연히 봉사가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일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 우리 주님은 계명 중에서 부모님을 위해서 희생에 댓가를 치루는 자식들에 계명을 주셨는데, 약속을 주셨는데, 내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하는 약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고, 댓가를 치루는 자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너스입니다. 그것을 타기 위해서 장수하기 위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인 일입니다.

어제 인터넷뉴스를 보니까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나와있습니다. 미국 샐러리닷컴에서 조사한 전업주부 어머니의 노동가치가 얼마나 될까? 집에서 직장 다니지 않고, 남편 섬기고, 자녀들 섬기고, 집에서 수고하는 그 어머니의 노동가치가 얼마나 될까를 따졌는데, 미국돈으로 연봉, 1년 연봉으로 따졌을 때 16만4000달러, 우리 돈으로 바꾸면 1억 6천만원, 집에서 일하는 전업주부의 가치가 대단한 것입니다.

10개월이면 한달 월급이 1천6백만원, 12달로 나눠도 천만원 훨씬 넘지요, 가치는 노동가치만 했을 때, 한달에 천만원이 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직장다니는게 쉬워요? 아이를 집에서 키우는게 쉬워요? 직장다니는 게 훨씬 쉽지요? 직장 다니면 직장 동료들하고, 커피도 마시지요. 바람도 쏘이죠. 이런 저런 사회활동도 하지요. 아무리 돈 버느라고 힘들다고 해도 밖에 나가서 직장생활 하는 것은 자기의 사회생활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집에서 수고하는 것, 특별히 어머니가 집에서 수고하는 노동가치는 이렇게 놀랐습니다. 제가 1억6천만원이 어떻게 계산했기 때문인가, 두 자녀를 둔 어머니를 기준으로 해서 그랬을 때, 어린이집 교사의 봉급도 주어야 하고, 운전기사 봉급도 주어야 하고, 아이들 출퇴근 시키고, 남편 출퇴근 시키고, 가정부 인건비도 주어야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요리사 인건비도 주어야 하고, 하루 세끼 음식 만들고, 잔치하면 잔치 준비하고, 요즘은 뷔페가서 하느라고 조금 좋아지기는 하지만, 한 10년전만 해도 돌잔치, 백일잔치 하면서도 방 2칸짜리 사글세 방에서, 방이 좁으니까 화장실 바닥에까지 부침이, 비빔 다 바닥에 널어놓고, 손님 치루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우리 여성들이 허리가 휘게 어려운 삶을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 어머니의 노동가치는 1억6천만원만 되겠습니까?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것이 어머니요, 아버지요, 부모님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모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버이들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어버이들이 들으셔야 할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성령충만한 성도는 부부관계가 바로 설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잘 모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줄로 믿습니다.

요즘은 우리 부모님들이 부모노릇을 한 번 잘해 보자. 그런 운동이 또 굉장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프라미스 킵퍼스라고 하는 운동은 빌 메카트니가 시작한 운동인데, 이것은 건강한 가정, 건강한 부모를 세우기 위해서 시작된 사회적인 운동입니다. 미국은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를 바로 세우고, 부모를 바로 세우는 그런 영적부흥운동입니다.

우리 부모가 먼저 바르게 서자. 우리 부모가 먼저 신앙적으로, 우리 부모가 먼저 도덕적으로 바르게 서자. 그런 운동이 프라미스 킵퍼스 운동입니다. 요즘에 한국에서는 두란노 아버지 학교도 유행처럼 많은 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은 결국은 우리 부모들이 이제는 자식들에게 순종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식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사랑을 다른 사랑을 하기 위해서 다른 부모가 되어야 하겠다고 하는 부모들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해서 순종에 대한 단어가 어울린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사랑이란 단어가 어울립니다. 그런데 사실상 지금까지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좀 서툴렀어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담학에서 이 책은 거의 교과서와 같은 책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축구하는 것만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해요. 부부사랑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으로 고민하지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가정에 자녀교육방법입니까?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위해서 라면 이 엄마 아빠는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이 말은 자녀들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스트레스를 줍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바꿔야 합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엄마 아빠가 어떤 희생도 치루면서 다 줄 수 있으니까 리어카도 끌 수 있고, 구두도 닦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으니까 너는 공부만 잘해서 서울대학 간다.

이것은 너무나 서툰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서툰 부모의 사랑의 표현이었어요. 이제 그런 서툰 부모의 사랑의 표현은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식에게 독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순서가 있습니다. 부부가 우선이요, 다음이 부모요, 다음이 자녀요, 그런데 오늘날 가정에 이 순서가 깨지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오늘날 순서에 있어서 자녀들이 제일 일순위로 와 버렸습니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들부터 이 아이들이 가정에 중심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버릇만 없어지고,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설쳐대는 아이들로 우리 가정은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부모가 일류가 되라고 강요만 한다면, 우리 가정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디에 서야 내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 사회에서도 어디에 서야 자기 위치인지도 모릅니다.

가정에서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아이가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 이 사회의 청소년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고, 크리스찬 가정에서도 다른 믿지 않는 가정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목회자 가정이 자녀들이,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치관이 세상 어머니들, 아버지들 가치관과 무엇이 다르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우리집은 가정교육에 있어서 이것이 다릅니다라고 이야기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게 있어야지요.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 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가정에서도 부부가 건강할 때에 가정이 건강할 줄 믿습니다. 부모의 공경에 대한 삶이, 부모에 대한 순종의 삶이 바로 설 때에 그것이 실천되어질 때에 그것이 건강할 줄로 믿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 때 가정이 건강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러한 건강한 가정들이 있을 때 이 사회가 건강해 지고, 대한민국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결코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 참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기꺼이 사랑하셨고, 희생하셨던 그 어버이, 아무리 불러도, 100번을 불러도 섭섭할 우리의 부모님들, 그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 어버이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우리의 어버이들이 부족함이 없고, 늘 건강으로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한가지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건강하셔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부모님들을 한 주일에 한 번 씩 뵈면서 요즘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 솔직한 감정은 부모님의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는 것을 요즘에 아주 느끼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전에는 부모님 건강에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 적이 그렇게 실감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부모님의 건강, 건강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의 첫마디 고백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우스개 소리로 그럽니다. 자식들에게 효도하려면 건강하세요. 그렇게 제가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이 섬기는데 귀중한 음식, 그리고 귀중한 사랑, 그것으로 건강하셔야 하겠고, 그리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강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에게 부모를 주시는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향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변함이 없기를 원합니다. 부모님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지만 그 때 뿐인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땅의 부모님들에게도 순종할 수 있다는 주님의 교훈처럼 늘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부모된 우리로써 자녀들을 양육할 때 주의 사랑으로 양육하게 하시고, 세상적 가치관으로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아니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름다운 어버이와 함께 하는 예배 속에 하나님 함께 하시고, 언제까지나 눈동자와 같이 인도하시며 함께 하실 줄 믿사오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설교 / 황요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