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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와 영성 (창 37: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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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의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심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 담임목사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깁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좀 더 사랑을 적게 받던지 인정을 적게 받을 때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으로 시작되는 질투나 시기심은 우리 영혼을 갉아 먹고 관계를 파괴하고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신앙적으로 정립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파멸 가운데 불행으로 끝날지 모릅니다.

나보다 별로 나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특별한 인정과 사랑을 받을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시기심과 질투, 이것이 어떻게 우리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가를 본문을 통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질투심을 신앙적으로 잘 처리하고 정리해서 하나님 주신 축복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첫째 시기나 질투심은 사람들에게 분별력을 상실케 만들어서 공동체 연합을 파괴하는 일을 합됩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형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야, 저기 동생 요셉이 온다. 저를 죽이고 아버지한테는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말을 하자! 그리고 저를 죽이면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여러분 이 대화는 강도들의 대화가 아닙니다. 형제간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형제끼리 왜 이렇게 원수가 되었을까요? 왜 이렇게 무서운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이렇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형들이 들어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출생순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에 갑자기 동생 녀석이 경배를 받게 된다니까 형들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화가 난 것입니다.

게다가 평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요셉만 채색 옷을 입힐 만큼 아꼈지만 형들이 볼 때는 별로 사랑받을 만한 이유도 없습니다. 형들은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질투하는 마음은 어느새 형들을 만나기 위해 무려 백삼십 킬로를 걸어온 동생 요셉을 죽일 작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슬퍼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렇듯 질투는 분별력을 없앱니다. 자기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게 합니다. 요셉만 없어지면 자기 형제들의 우애는 좋아지고 불편한 감정도 없어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죽이기로 합의합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인데 질투심 때문에 죽이자고 합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할 사람인데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구덩이에 쳐 넣을 생각을 합니다. 연관된 사람이 얼마나 슬퍼할까를 알 수 있을만한 관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하는 분별력 없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들 형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여 연합하고, 아껴주면서 어디를 가든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연합의 공동체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형제끼리 불신하며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사랑해야 할 형제들과 반목하고 싸우는 일은 없습니까?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면 가정공동체는 금세 금이 갑니다. 한 어머니와 아버지 아래 사랑하고 우애를 가지며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도 모자란데 티격태격 싸웁니다. 질투합니다. ‘왜 엄마 아빠는 제만 좋아하냐고, 왜 큰형만 좋아하고, 큰언니만 좋아하냐고, 막내인 나는 사람 아니냐고, 왜 큰동서만 저렇게 설치냐고,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냐고…….’ 가족 간의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증오하는 마음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미움은 결국 서로 상종치 않고 발걸음을 멀리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비일비재합니다. 가정뿐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왜 저 사람만 좋아할까, 왜 목사님은 헌 신자는 안 좋아하고 새신자만 좋아할까 합니다.

성경은 시기와 질투는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간질하고 싸움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명을 감당치 못하게 만드는 사탄과 마귀의 장난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에서 15절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자매 끼리 서로 하나 되어 연합하여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교회 나와서 서로 위로받고 서로 사랑함으로 험하고 힘든 세상 살아갈 때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 와서 상처받고 떠나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질투 때문입니다. 누구만 사랑받고 누구만 좋아하고 하는 미움과 시기가 관계를 이간질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은 그렇게 무섭지 않습니다. 내부로부터 문제가 생겨 깨지고 부서지는 것은 걷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형들은 요셉에 관한 비밀을 갖게 되면서 연합하고 하나 되는 일에 균열이 생김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곳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연합했던 공동체가 하나하나 조각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와 질투가 불러오는 결정적이고도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시기와 질투가 있을 때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게 되고, 나 뿐 아니라 내 영혼과 이웃까지 멍들게 합니다.

둘째 질투와 시기는 사람에게서 자유를 빼앗습니다. 질투를 하게 되면 질투의 대상에 묶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팔고 편안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 들어나는가 하면, 창세기 42장에서 나타납니다. 요셉을 팔고 2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의 세월에 대해 성경은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식량이 얻기 위해 애굽으로 갑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은 자기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우면서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습니다. 그때 형제들이 나눈 대화 속에 20년 동안 뭉쳐있던 응어리가 나옵니다. ‘그것 봐라! 그때 요셉이 울며불며 애절하게 살려 달라 할 때 살려주지 않고 팔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요셉을 팔고 난 다음의 죄책감이 일평생 따라다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각자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부담감을 터뜨립니다. 우리가 벌 받았다고, 우리가 벌 받는 게 틀림없다고…….

질투로 인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사울과 다윗의 관계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자 여인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그러니 사울은 굉장히 불쾌해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 하였더라’ 영어성경으로 보니 ‘jealousy’라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 원어를 보면 계속적인 용법으로 되어있습니다. 한번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은 저렇게 진지하게 살아야 돼. 무게 있게 살아야 돼.’라고 생각하고, 밝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저렇게 밝게 살아야 돼.’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상해있을 때는 ‘허구한 날 머리를 땅속에 쳐 박구 다니니까 저렇게 살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촐랑대기는 사람이 좀 무게가 있어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나면 같은 행동도 다르게 보입니다.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윗이 산에 있든 바다에 있든 어디에 있든 다윗을 주야로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다윗생각이 나면 ‘그 녀석 밥은 잘 먹고 있을까?’하고, 잠잘 때도 ‘내 마음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고 저는 잘 자고 있을까?’하며 다윗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날 날이 없습니다. 질투에 묶여버린 마음입니다. 다윗이 바다 건너 미국에 있든지, 10년 전에 살았든지 상관없습니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내 마음과 감정이 묶여서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속상한 감정이 남아있어서 늘 시기와 질투의 감정으로 다른 일들도 해석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살아가게 됩니다.

자유가 없으니 마음에 기쁨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창조적인 내일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늘 과거에 매여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너지를 거기에 다 쏟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살지만 과거 속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해도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 동기가 됩니다. 

한 목사님이 시골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집회 하는데 앞에 있는 할머니가 얼마나 하염없이 우시는지 자기 얼굴을 보고 울고 자기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닦으시기에 부흥강사님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 메시지에 은혜를 받고 계시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목사님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부흥회가 끝난 다음에 ‘할머니 어디에 은혜를 그렇게 받으셨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 말씀이 ‘목사님 얼굴을 보니까 삼일 전에 죽은 염소가 생각나서…….’하시더랍니다. 염소 얼굴하고 목사님 얼굴하고 너무 닮았답니다. 할머니는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목사님 얼굴을 보니 아까운 염소생각만 계속 났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감정이 묶여 있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보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을 비롯한 야곱의 아들들을 한번 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괴롭힘 당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질투와 미움을 가지고 시간은 수십 년 지났지만, 아니 그분은 떠나고 없지만 마음속에 그 기억이 남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을 살고 있지만 과거의 아픔에 붙들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자유롭지 못한 인생들이 있습니까? 질투라는 감정에 묶이면 원수를 갚아도, 갚지 않아도 여전히 묶여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질투는 또 다른 죄를 짓는 기초가 됩니다. 당뇨병이 무서운 이유는 합병증 때문입니다. 관리를 잘못하면 큰 일 날 수도 있습니다. 질투는 잘못 관리했다가는 합병증을 일으키면서 치명적인 죽음의 질병에 이르게 합니다.

요셉을 질투했던 형들의 마음은 요셉을 볼 때에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죽이는 데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양을 잡아서 피를 묻히고 요셉이 죽었다며 거짓말을 하여 또 한 차례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죄책감에 이어 거짓말까지 계속해서 다른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7-28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오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옥간 사람이 세상일들을 기억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용서받지 못한 죄는 지옥에까지 따라와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 그것은  영원히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죄, 또 다른 죄를 계속해서 짓게 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죄는 그다음 죄를 짓는 기초가 됩니다.

성경에는 질투로 시작돼서 심각한 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아벨을 질투합니다. 못 견뎌서 결국 살인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에서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에 질투를 느껴서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를 가는 자로, 하나는 두려워서 도망가는 자로 살게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 사라와 하갈은 질투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아들 이스마엘과 아버지 아브라함 사이를 갈라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쫓겨난 이스마엘은 아직도 중동지방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와 시기가 있는 곳, 그곳은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관계적으로 계속해서 싸움과 다툼,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아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는 중등학교 교사를 했고, 교회에서는 전도사를 하며 영아부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교제를 집필하고 전국단위의 수련회도 다니면서 나름대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결혼을 하고보니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도 사모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아내가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번은 교수님께서 부르더니 저보고는 그만 공부하고 아내를 공부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보다 훨씬 공부를 잘 해서 여성신학자 시키면 되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했는데, 아내의 말이 2인자가 되는 설움을 아느냐고 합니다. 어떤 사람 밑의 그늘에 가려서 그 사람을 돕고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외동으로 자라 세상의 중심이 저 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제 위에 형이 하나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모릅니다. 또 저희 어머님이 6남매의 장녀셨고 외할아버님이 장남이셨기 때문에 시골 가면 완전히 제가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막내로 자라 형제간의 다툼 속에서 소외되고 외롭게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아느냐고, 형 때문에, 언니 때문에, 오빠 때문에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늘 뒷전에 있었던 사람의 아픔을 아느냐고 묻는 아내였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던 어느 날 ‘여보, 해결되었어요.’ 했지만 저는 무심코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제가 지구촌 교회에서 섬길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르고 존경하는 이동원 목사님께서 안식년을 가지시기 위해 떠나 계셨을 때, 제가 설교를 하니 성도들이 은혜 받았다며 저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이동원 목사님이 다시 들어오시니까 사람들이 전부 돌아서서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묘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지난주까지 세상에 설교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하더니 이동원 목사님이 오시니 싹 돌아서는구나.’ 마음에 서운한 마음이 생기며 질투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거기서부터 제 마음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병들기 시작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이인자의 설움이 이런 것이구나!’

제가 그때 빨리 정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왜 여기에 왔습니까? 제 할일이 무엇입니까?’ 돕는 사람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비서, 비서실, 주차장 등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일설교를 해도 설교방송으로 나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했던 테이프를 편집해서라도 이동원 목사님 설교를 보냈습니다. 어느 누가 찾아와도 교인들과 목사님을 연결시키는 역할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인자로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앞에 서서 이끄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당을 떠나기까지 목사님을 섬기는 일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돌아오신 후, 여러 사람이 분당에 개척하자고 할 때도 개척하자던 분들께 아니라며 분당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동안교회에 올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있다면 제 아내가 주일학교 2년 다닌 것 외에는 없습니다. 마누라 영성에 이끌려 여기까지 끌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제 길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열두 아들은 나중에 각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각자에게 주신 축복의 분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길을 잃게 됩니다. 내게 주신 것도 귀하고 아름다운데 남의 것과 비교하므로 자기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것도 일고 공동체도 병들게 만들고는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자매님들 중에 이렇게 밥하려고 재수하면서 독서실 다니며 대학 다녔냐 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대학교 안가고 차라리 그때 밥이나 한 끼 더해서 관록이나 쌓을 걸 하는 분 말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섬김의 자리에 서게 하심을 감사함으로 받기 시작할 때 질투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교회가 잘 되려면 담임목사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지. 그것이 내 할 일이야. 내가 할일은 오히려 교인들과 담임목사님이 더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섬겨드리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할일을 분명히 찾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제게 섬길 수 있는 교회를 허락해 주셨고 제 길을 분명하게 갈 수 있도록 갚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바닥이든 중간이든 이인자든 일인자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고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수학과를 나오고 영문과를 나와서 밥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면 기쁨으로 감당하고 축복할 때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놀랍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찾아올 때 오히려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시기와 질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고 억지로라도 축복할 때 주께서 시기하는 마음을 바꾸셔서 죄악의 뿌리가 자라는 것을 막아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가게 되고 허락하신 축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는 우리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병들게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서서히 병들게 합니다. 사단의 정책에 휘말려 서로 피차 물고 먹고 뜯으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분별하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일과 자리를 기쁨으로 감당하고 선포하며 오히려 여러분과 관계된 사람들을 축복하기 시작할 때, 주님은 여러분의 길을 열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어디든지, 미워하는 동서가 있든지 미워하는 시어머니가 있든지 미워하는 형제가 있든지 부모님을 원망하든지 그 모든 것을 중단하시고 축복의 기도로 감사의 기도로 바꿀 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기대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세상의 문제, 사람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풀어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때 주님께서 풀어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고 아름다운, 오히려 축복하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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