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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로서의 다윗 (삼하 13: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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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가필드’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와 곡절 끝에 링컨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 사람입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재임한지 6개월이 지난 즈음에 암살을 당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행정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일화가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 시간이 되어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조함으로 기다리는데 마침내 그가 어떤 노파를 부축하여 와서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놀랐지만 알고 보니 그 노파는 바로 자기의 어머니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취임식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을 어머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녀로서 부모님을 향한 은혜와 사랑을 한번 고백하고 높이는 날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물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가르쳐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날이 오면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이 시간 우리의 모든 부모님을 향하여, 살아 계시든,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시든, 오늘 그분들을 생각하며 모두 감사의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자녀로서의 다윗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녀로서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자기 일에 충실한 자녀였으며, 그리고 가문을 빛낸 후손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부모로서의 다윗입니다. 다윗이 부모가 되었을 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부모로서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까요?

  첫째, 자녀를 향한 기대감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성경에 등장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덧 그도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도 사랑스런 자녀가 생겼습니다. 또한 그가 사울 왕의 추격으로 오랜 세월동안 고생을 했는데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왕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해 땀을 쏟으며 수고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남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탐하였고, 그의 충신이자 밧세바의 남편이던 우리야를 처참하게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했고, 이 일로 인생막대기와 사람 채칙의 맛을 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가정에 간통과 살인사건이 재현됩니다. 큰아들이던 암논이 이복동생인 다말을 범하였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살인죄를 범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로 도망갑니다. 본문은 바로 그때,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살인죄를 짓고 도망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39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여기 ‘간절하다’는 말의 단어를 분석하면 적어도 몇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우선적인 것이 바로 ‘기대감’입니다. 비록 살인죄를 짓고 도망했지만 여전히 다윗은 압살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다윗은 압살롬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압살롬’이란 그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압살롬’의 뜻은 ‘아버지의 평화’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늘 평화를 생각한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평화, 화목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을 때, 그리고 그가 평생 소원으로 품던 성전건축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더욱 그는 평화를 마음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 평화가 이제 다음시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압살롬’이라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아들보다도 다윗은 압살롬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이름에서, 삶에서, 그리고 지금 그가 살인죄를 진 어려운 상황에서도 간절한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는 아이가 엄청난 잘못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기대, 이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이를 키웁니다. 그 기대감에서 사랑이 나오고, 땀흘리고, 기도하고, 소원을 갖게 합니다. 하나면 하나, 열이면 열, 모든 자녀에게 대한 기대감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모든 자녀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만큼 기대가 됩니다. 바로 그 기대감이 부모를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수고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기대감이 부모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더욱 하나님께 꿈과 소원을 갖고 기도하면서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녀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 ‘간절함’에서 배우는 두 번째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말합니다. 37절에서도 압살롬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의 심경을 ‘그 아들로 인하여 슬퍼하니라’라고 강조합니다. 이 모두는 바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이해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처음부터 다윗은 압살롬을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때에도 아버지는 그를 잘 품고 있었습니다. 더 애절한 심정으로 그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이해는 그가 반역을 일으킬 때 절정을 이룹니다. 아들이 칼을 겨누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부모의 이런 사랑은 탕자의 비유에서 더욱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집을 떠나는 둘째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준 아버지,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같이 동구 밖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아버지, 돌아왔을 때 살진 송아지를 잡고 그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엿봅니다.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지만 자녀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것을 알려면 그가 또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압살롬도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다릅니다. 누구보다도 자녀를 이해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아들과 딸이기에, 자녀이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가슴에 품습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우리가 종종 ‘요즘 아이들’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도저히 그들의 사고와 말과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매도 들고, 소리도 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삐뚤어지기도 합니다.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부모는 이해합니다. 아니 그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십대의 행동은 대부분 호르몬작용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때는 너무 많이 나오고, 어느 때는 나오지 않는 극단적인 호르몬 작용에서 어른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호르몬이 왕성하게 활동하는구나’하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참아야 합니다.

  ‘다이아나 루먼스’ 라는 사람이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받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뛰어 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여러분, 아이를 낳았다고 그냥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부모는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이해해야지, 잘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 때 이미 그 아이는 부모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가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 못하는지, 아이와 통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그냥 방관하고 살았는지, 얼마나 내 성공, 야망만을 위해 지내다가 덧없이 시간을 흘러보냈는지, 우리가 후회하는 날이 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이해입니다. 이제 많이 사랑하고, 더 이해하면서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그런 부모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자녀를 위한 희생입니다. 여기 ‘간절함’에는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희생이 깔려 있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기대감을 갖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로 작정한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단은 ‘희생’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납니다. 다윗 인생의 다시 고난의 가시밭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를 향하여 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다윗이 반란군과 싸우지 않습니까?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용사였습니다. 모든 이방나라가 벌벌 떠는 강력한 군인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반란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지지세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배신자가 아닙니다. 평생 다윗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충실한 군인들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민심이 떠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은 금방 탄로가 납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선정을 베푼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백성입니다. 그리고 반역의 주역이던 아히도벨만 처단하면 민심을 돌이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여건이 다윗에게로 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싸워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결보다 도피를 선택한 다윗의 마음에서 우리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엿보는 것입니다. 반란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부터 다윗은 이미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왕권도, 권위도, 업적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생명도 다 내놓았습니다.
마지막에 압살롬이 전쟁에서 혹 죽을까봐 다윗은 그의 충신들에게 싸워서 이기면 자기를 보아서라도 아들을 너그럽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어기고 요압은 압살롬의 심장을 찌릅니다. 왕자라도 반역을 일으킨 배신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다윗은 아들을 위하여 목놓아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통곡합니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다 줍니다. 생명까지도 줍니다.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가운데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사람으로서 기자로 활동했던 사람이 쓴 책입니다. 먼 훗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위하여,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것을 아주 진솔하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은사님 찾아 뵙기, 고향 찾아가기, 단 하루 동심으로 즐겨보기, 일기와 자서전 쓰기, 날마다 15분씩 책읽기, 악기 하나 배워보기, 나무 한 그루 심기”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 발 닦아드리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어느 일류대학의 졸업생이 한 회사에서 면접하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면접관은 졸업생에게 부모님을 목욕시키거나 닦아드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번도 없다고 하자, 면접관은 내일까지 시간을 줄 테니까 부모님의 발을 닦고 다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반드시 그 회사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발을 씻기려고 성급하게 물을 떠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발등을 잡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어머니의 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손이 발등에 닿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발바닥은 마치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발바닥의 굳은 살 때문에 어머니는 만지고 있는 감각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난 날 자기를 향한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날 청년은 면접관에게 평생 부모를 잘 모시겠다고 대답했고 그런 청년을 채용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글을 맺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옷을 더 껴입으라고, 조심하라고 늘 끊임없이 말합니다, 내가 돈이 없을 때, 그는 항상 돈 버는 일이 쉽지 않다며 나를 훈계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나도 모르게 돈을 쥐어줍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부모’라고 부릅니다 부모님의 또 다른 이름은 ‘희생’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나에게 끝까지 기대를 걸고 계시는 분, 늘 실망을 주는 나를 잘 이해하시는 분,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분, 우리는 이런 사람을 ‘부모’라고 부릅니다. 그 은혜가 풍성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힘과 용기를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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