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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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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잠이 안와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수면제를 먹었는데 어느 날 수면제가 다 떨어져 의사를 찾아가 수면제를 줄 것을 요구했더니 의사가‘자꾸 수면제를 먹으면 중독이 되어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환자에게는 수면제라고 얘기하고는 소화제를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날 밤 수면제라고 준 소화제를 먹고 잠을 잘 잤을까요? 못 잤을까요?

의학적인 용어 가운데「플라시보 효과」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 뜻은 수면제를 줘야할 환자에게 수면제라고 말하고는 소화제를 주었을 때에 이 환자가 수면제의 효과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이 많은 사람에게 해열제라고 이야기하고 맹물을 투여했을 때 열이 내렸다는 임상보고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임상보고 가운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불란서의 한 여인이 모기약 살충제를 먹고 죽었는데 이 여인이 어떤 성분 때문에 죽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해부를 해보니 살충제의 성분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 여인이 죽은 이유를 밝혀내니 쇼크사였습니다. 즉 살충제를 먹었다는 그 충격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욕구와 함께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는 먹고 입고, 소유하는 것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영적인 욕구는 그렇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삶이 풍요로워지고 배워서 지식인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미신은 없어졌는데 점보는 집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즉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들이 더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새로운 일들을 기대하면서 배운 사람들이 안갈 것 같지만 더 잘 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사람이 몰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공허감을 해결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라”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거기에 성공이 있고 거기에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대해 너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오늘 8절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스데반의 객관적 모습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라고 하였는데 스데반에게 나타난 권능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은혜'에 대한 개념은 "주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값없이 받은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권능'이라고 말할 때는 "받은 은혜가 바깥으로 표현되는 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물량적으로 표현하면 마치 그릇에다 물을 부어서 그 물이 넘쳐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상태 이것이 "은혜가 충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충만한 은혜가 권능으로 나타나니까 기사와 표적,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실 때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 권능이 스데반에게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직전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이나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담대히 말하고 있는 권능이 스데반에게서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나를 움직이시는 것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령 받으면 능력 있어서 하나님의 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단은 다른 것이 이단이 아니라 성령 충만 받아서 그 권능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단이고 사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잘된 것 같고, 행복해 보여도 속으로 볼 때에는 병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염려와 고통과 근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나와는 다른 초월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신이었지만 한 번도 자신이 능력자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가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난해짐을 통해, 나의 순종을 통해, 나를 비우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낙하산처럼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내가 다 죽게 되었을 때에만 하나님을 찾으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은 다른데 있지 않았고 내가 의지할 만한 것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최대한 가난해지는 것,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능력이 아닌 성품과 인격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많은 과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 맺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 안에,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구하시고 이것대로 살라는 것인데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면 그 능력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써먹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주 안에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능력이 아니라 언제나 성품이고 인격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품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처럼 성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성품을 드러낼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할 때 그런 성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대사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실은 자신을 얼마나 비우는가, 내 안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드러내느냐에 성령 충만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내 안에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0:10에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생명 이후에 풍성함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명 속에 풍성함도 있습니다. 생명을 말할 때 보통 씨앗을 이야기하는데 씨앗은 다른 돌덩어리와 비교할 때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심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내가 성령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온전히 움직일 수 있도록, 그 안에 살 때 주님이 주시는 열매를 경험하는 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오늘 성경은 성령 충만한 사람 스데반을 소개하고 있는데 성령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지혜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이해력이고 통찰력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가를 아는 감각입니다. 사실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그 지식을 가지고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지식을 뛰어넘는 가치를 창조하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운데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다.

8절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라고 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름다운 자태,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없고 선전하지 않아도 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저절로 있는 그 매력, 성령 충만하면 그 아름다움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여러분들에게서 그런 광채가 나고 진한 향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용서입니다. 오늘 이시대가 더 많이 잘 살고 발전되어 가지만 한 가지 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혼율이 늘어가니 원수 삼는 일이 더 많아지고, 교회는 갈라지고 엄청나게 많은 교파가 생기는 등 남 잘 되는 꼴은 못 본다는 것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고 은혜를 받지 못했으니 남 잘 되는 것을 칭찬이나 축하하지 못하고, 남 못되는 것은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척합니다. 얼마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의 가정들은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복 있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권능이 나타난다.

성령은 권능을 주십니다. 이 권능은 어떠한 권능입니까?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권능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에도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권능입니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다 좋지만 어려움을 당하면 신앙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민족도 배신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권능이 필요합니다. 인내하는 권능입니다.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환경여건에 따라서 결심이 바뀌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못살겠다, 가난하다고 얘기하서는 안됩니다. 병들어도 잘살고 가난해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러므로 많은 핍박과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잘 견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결과 300년 만에 로마를 정복시킨 것입니다. 로마가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인내를 통해서 권능을 나타내고 승리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헌신하는 사람이 된다.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대접받는 것 보다 일군인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때 교통수단은 말이 끄는 역마차였습니다. 역마차에는 1등석, 2등석, 3등석이 있는데 1등석에 앉은 사람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 사람입니다. 마차에 문제만 생겨도 가만히 있는 사람, 언덕길이 가파라서 못 올라가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 사람, 시궁창에 빠져 바퀴가 빠져 나오지 못해도 그저 앉아 있는 자리가 1등석입니다. 혹시 바퀴가 빠져 바퀴를 갈아 끼울 때도 앉아있는 자리가 1등석입니다. 2등석에 앉은 사람은 문제가 생길 때 까지는 그냥 앉아있어도 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자리입니다. 만약 바퀴가 빠져서 갈아 끼운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언덕길에서도 마차를 그냥 보고만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3등석은 문제가 생기면 빨리 내려와서 열심히 고쳐야 하고, 밀어야 하고, 들어야 하고, 끼워야 하는 사람이 3등석에 앉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1등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각은 반대인 것 같습니다. 3등석은 그저 관심 없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2등석은 관심은 있으나 헌신하지 않는 자리에 있는 사람, 1등석은 문제가 생기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일할 준비를 할까를 고민하고 헌신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성령 충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참고 견디며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권능과 주님 앞에 충성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또한 성령은 어머니와 같아서 우리를 잘 길러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일을 하시며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날마다 때마다 먹이시고 기르시고 채우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연약할 때 항상 따뜻한 손길로 떠나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성령은 약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은 뜨거운 불과 같아 우리 마음에 불이 되어서 우리 마음을 태워주시고 우리 영혼을 뜨겁게 해서 산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해서 어두움이 내 영혼을 해치지 않도록, 침해하지 못하도록 뜨거운 성령으로 비추어 주시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만들었던 아름다운 건강, 행복, 부유함은 밀물이 밀려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그런 일이 없으며 성령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끝까지 내 것으로 삼아주시고 보호해주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나를 붙잡아 주셔서 믿음을 굳게 하시고 잡아주십니다. 어린아이에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잡아주는 자의 힘이 어린 아이를 힘 있게 서게 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시며 예루살렘 교회를 흥왕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를 흥왕하게 하시고 스데반을 위대한 종으로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스데반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승이 필요한 시대

오늘은 또한 우리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데, 스승의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에게 선물을 드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교사의 사명과 위치 및 그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일깨우며 그들의 수고와 어려움을 성도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기도로서 그리고 제자들과 자녀들의 영적, 정서적, 사역적인 각 부분에 있어 협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돕자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평생 숫한 만남의 사람이 있고, 인연(因緣)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입니다.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와 교사들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교사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다음의 이야기를 통하여 확실히 하게 됩니다.

한 어린 소년이 농부이신 아버지와 마을에 가보기 전까지 농부가 되려고 했었습니다. 마을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일하는 것을 보고서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또 다시 마음을 바꾸었고 그 다음 주일에 설교를 듣던 그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농부, 엔지니어, 법률가, 의사, 군인, 항해사, 목사-이들 중 나는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습니까?" 그가 기도드리는 중에 세미한 음성이 방안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왜 너는 그 모두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 그 소년은, "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음성이 대답하기를 "그들의 교사가 되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어떤 아이는 책을 쓰게 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아이는 수술을 잘 하게 되고, 또  어떤 아이는 설교를 잘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네가 그들의 교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교사나 목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교육이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육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시설이나 교육 기자재의 현대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이 없이는 교육은 죽은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참된 존경과 고마움이 있을 때 비로소 교육은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 받는 것조차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취급받는다면 교육을 위한 모든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본디부터 스승을 부모만큼 공경하는 것을 도리로 여겨왔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참스승, 참교육을 외치는 소리가 매우 높습니다. 오늘처럼 혼탁한 시대는 참 스승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즈음처럼 소란스러운 시대, 정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참된 스승을 원합니다. 육신은 어버이에게서 받았지만 정신은 그분들에 의해  길러지기에 그림자조차도 밟을 수 없는 제2의 부모로 섬기는 미풍양속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스승은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인생의 빛이 되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스승이 단 한 분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스승을 교단에서만 찾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은인들도 두루 스승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스승의 날, 스승의 주일에는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분들, 인생의 스승들이나 신앙의 스승들, 현재의 분야에 몸담도록 결정적으로 조언해 준 스승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스승의 원래 뜻을 살리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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