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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가정의 비결 (행 16: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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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 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치킨 수프 스토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생이 친구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막 영접한후 교회에 나가고 싶어 주일에 학교 길 건너에 있는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 대학생은 아직 교회 문화를 몰라 학교에서 입는 청바지 차림으로 머리를 길게 기른채로 교회를 갔더랍니다. 조금 늦게 갔더니 교인들이 꽉 차있어서 자리를 찾을수 없자 학교에서 하는 습관대로 앞쪽으로 나가 중앙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있었고 이 젊은이에게 눈총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교회에서 존경받는 80세 가까운 집사님 한분이 지팡이를 집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런 학생은 우리 집사님께 야단 맞아 싸! 저런 젊은이는 한번은 혼나야 해!. 그런데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앞으로 나가신 이 집사님은 이 학생옆에 오더니 지팡이를 접고 덜썩 학생곁에 주저앉아 이 학생에게 찬송책을 찾아 보여주며 함께 부르시고 기도할 시간이 되자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어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교인들은 그 집사님에게서 목사님의 설교이상의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배후에 어느 교인이 그에게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하실 생각이 났어요"하고 묻자 그는 웃으시며 "자식 기를 때 보니까 그렇게 길러야 하더라구요"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모두 형제 자매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영적 가정입니다. 또한 가정을 교회처럼 사랑과 경건의 분위기로 만들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슬아슬하게 자살할 위기를 면하고 행복한 가정을 회복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단 그가 빌립보 감옥의 간수였다는 사실만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34절 후반부에 보면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라고 말미를 장식하고 잇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날마다 온 가족이 함께 기뻐할 일이 끊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1.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복된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28)

26절을 보면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착고와 수갑이 다 풀어졌다"고 했습니다.
27절을 보면 "잠자다 놀라 깬 교도관이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검을 빼서 자결하려 했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 순간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며 그를 만류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이 만남이 간수를 살리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그 자리에서 바울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그는 자결 했을 것이고 그의 가족들은 영원히 씻지 못할 불명예를 안은 채 슬퍼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거기서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큰 지진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고 든든히 채워진 차꼬가 다 풀려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자신들로 인하여 간수들이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간수는 이처럼 좋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 복된 만남이 그와 그의 온 가족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정이란 만남 공동체입니다. 전혀 다른 남남이었던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됩니다. 그들이 가정 구성의 최초 인자가 됩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가정이기 때문에 서로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게되고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난 자녀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난 부부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행복한 장년의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자녀를 만난 부모 역시 효도를 받으며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좋은 사람이 많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서로 배우자를 잘못 만나 불행하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며 후회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울 수 없다고 괴로와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도 자녀에 대한 원망이 적지 않습니다.
좋은 만남이 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먼저 변하고 내가 먼저 내 자리를 지키고 내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왜 너는 그 모양이냐, 왜 너는 그 꼴이냐, 왜 너는 달라지지 않느냐 라고 윽박지르는 한 변화는 오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변하면 네가 변하고, 나와 네가 변하면 우리 가정이 변한다"는 것은 행복의 방정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네 가정비극의 출발은 책임을 상대에게서 찾고 떠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이라고 떠밀었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떠넘겼습니다. 창세기 3:12을 보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내를 동시에 원망하는 무서운 말입니다. 가정의 위기와 불행을 네가 져야할 책임이라고 떠 넘기는 한 절대 행복은 찾아 오지 않습니다. 내탓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만 풀리게 됩니다.

이 좋은 만남을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는 책임이 없다. 나는 책임 질 일이 없다"라면서 십자가를 외면하고 떠 넘겨 버렸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되었겠으며 구원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불순종하며 부도덕하고 불의한 삶에 빠져 들어 문제투성이의 인생이 되고 불행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졌지만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지고 다 죄의 형벌을 담당하러 십자가까지 지셨기에 문제가 다 해결되고 하나님과 화목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문제가 크든 적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든 너에게 있든,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삶을 이루려면 "내 탓이오. 내 책임이오"라는 마음과 말과 태도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속이 뒤틀리고 열이 치받고 숨이 가빠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행복 만드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2.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31)

가정의 붕괴, 형제의 붕괴, 부모 자식간의 만남의 불화, 부부간에 불화, 이 모든 부조화가 어디에서 오느냐? 범죄하므로 왔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누가 회복할 것입니까? 영적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원인도 알 수가 없습니다. 에덴 동산의 문은 동쪽으로 있었는데, 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쫓아내 버리고, 쫓아내고, 문을 막아 버리고, 화염검을 든 천사들이 지켰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과 점점 멀어져서. 오늘날 온 인류가 에덴동산을 지상에서 물질을 가지고 찾고, 지식으로 찾고, 인공위성으로 찾고, 인간의 과학으로 찾고, 권력으로 찾지만은, 이 땅위에, 이 지상 위에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은 한 사람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디가도 슬픔이요,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저주밖에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매여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찾으러 누가 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떠난 우리 인류를 찾으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다시 찾으려고, 에덴 동산을 회복하시려고, 기독교는 회복의 종교입니다. 앞으로 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개혁의 종교가 아닙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 주시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었던 지식을 찾았도다. 눅15장에 말씀한대로 하나님을 떠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셔서, 우리로 아버지 앞에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선생들아 어찌할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가정에 오셔야 합니다. 내가 변화 받아 죄에서 사함 받고, 용서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무서워 떨며 부복하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는 간수에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결이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상하거나 사업이 망했을 때 절망과 실의에 빠졌을 때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끝날지 모르지만 가족들, 이웃들이 겪는 고통은 그 시간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나도 자살로 모든 괴로움을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없이 그처럼 죽으면 결국 하나님께 심판받고 죄에 대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뱀을 피하려고 도망가다가 사자를 만나는 격입니다.

그러면 위기를 만날 때 절망적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길을 그에게 제시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입니다. 33절을 보면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고"라고 했고, 34절을 보면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크게 기뻐하니라"의 뜻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간수의 생활은 경제적으론 여유가 있을 수 있지만 24시간 긴장의 연속입니다. 언제 탈옥사고 없을는지, 자해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런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믿고 나서 기쁨이 회복된 것입니다.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고, 대화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 시작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심령에 오시면 내가 변합니다. 예수님이 내 가정에 게시면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시대가 변하고 국가 공동체가 변하게 됩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 믿고 잃었던 기쁨과 바라던 행복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가족관계도 회복됩니다. 오래된 상처도 치유됩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오해하던 것들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바뀝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 모신 곳에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곳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우리가 그 전보다 얼마나 화려하고, 잘 살고, 잘 먹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가정은 한없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참 믿음을 회복할 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천국으로 변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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