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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기유발 (왕상 1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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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많은 아이 하나가 힘들게 일하는 아저씨들에게 다가갑니다. “아저씨 뭐하세요.” “먹고 살기 위해 이러고 있단다.” 다른 아저씨에게 물었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해요. “보면 모르냐? 쇠 조각을 용접해서 붙이고 있단다.” 이번에는 덜 힘들어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어요. 미소로 대답합니다. “여기다가 멋진 다리를 만들고 있단다. 모두 좋아 할거야.”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따라서 행동하는 힘과 진행과 열매가 다르게 되어 있지요. 이것을 바로 동기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이는 일의 동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과 영원히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겉모습은 같아도 내용은 하늘과 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일이 너무도 싫어요. 하루하루가 고통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기 싫은 일하러 가야지요. 억지로 하니까 피곤하지요. 성의 없으니까 감독이 혼내지요. 사는 게 고통이에요. 하지만 다리 만드는 사람은 자부심이 넘쳐요. 남이 안 보아도 힘 다해 일해요. 실력도 늘어요. 그러다보니 매사가 잘되지요. 살수록 재미가 있어요.

1. 자기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는지 몰라요. 일어나는 것 자체가 싫은 게예요. 그러니까 일 분이라도 안 뺏기려고 시간에 꼭 맞추어 일어납니다. 가기 싫으니까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월급 몇 푼에 팔려간 노예로 자신을 이해하고 그 마음으로 산다면 도대체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지하철역에 나가 보세요. 모두가 뜁니다. 왜 뛰느냐 물어보세요. 젊은이 하나에게 물어보세요. 지각하지 않으려고 뜁니다. 지각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요? 혼나지 않고 짤리지 않지요. 그러면 뭐합니까? 진급하겠지요. 그 다음은요? 결혼하겠지요. 그 다음에 뭐합니까? 집을 사겠지요? 그리고요? 아이 낳겠지요. 그 다음은요? 아이 학교 보내겠지요.

계속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은퇴하겠지요. 그래서 노후 자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요? 죽어야 하지요. 그 다음에는 뭐가 옵니까? 그건 모르지요. 그러니까 중간의 과정들을 다 생략하면 뭐가 나옵니까? “왜 그렇게 뜁니까?” “죽으려고요.” 또는 “몰라요.”가 되고 맙니다. 막연히 뛰어야한다는 게 동기이지만 결국 목적이 없는 거지요.

여기서 보이는 것은 피동적인 동기입니다. 자신이 주도하는 게 아니에요. 언제나 나에게 하라고 시키는 사람이 있어요. 아침에 잠을 깨우는 사람이 있고요 빨리 하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깨우지 않으면 그냥 한없이 잡니다. 혼내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아요. 공부도 억지로 하니까 재미가 없어요. 성적도 안 오르고요.

그러니까 아이를 깨운 뒤에 그 하루에 대한 의미를 붙여보게 해야 합니다. 지하철을 향해 달려갈 때도 고상한 의미를 생각나게 해야지요. 기껏 “늦지 말아야겠다”로는 될 수 없어요. 늦지 않기 위해서 또는 혼나지 않으려고 이렇게 죽도록 뛰어야 합니까? 아니지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게 하세요. “어서 가서 일하자.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지.”

같은 일을 해도 의미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지지요. 노동을 해도 왜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까?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게 낫지요. 어떤 흑인 청년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어요. 마구 불평을 하면서 합니다. “백인 놈들 더러운 놈들!” 그러니 사는 게 얼마나 괴롭습니까. 평생 그러면 그 삶 전체가 얼마나 일그러집니까!

청소가 나쁜 것입니까? 그 좋은 봉사를 왜 주도적으로 하지 그렇게 노예로 합니까! 마르틴 루터 킹이 그에게 말합니다. “형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부를 청소한다고 생각하세요. 좋은 일하고 돈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삶을 절대로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왕 할 바에는 사랑과 봉사의 동기를 가지고 해야 되지요.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도 어마어마합니다. 나를 동기 유발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점점 더 유능하고 삶을 즐기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거나 좋은 동기를 생각하세요. 물론 나쁜 짓에는 좋은 동기를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모든 좋은 일에는 당당한 좋은 동기를 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 그 의미의 질을 높여보라

나쁜 동기도 있지요. 대장금을 보면 장금이가 원수 갚기 위해서 의녀가 됩니다. 나쁜 동기도 많은 힘을 제공합니다. 벤허 역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팁니다. 무서운 노예선에서 살아남아요. 그러나 이것이 현실인가요? 작품일 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복수심은 강한 힘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을 망쳐버려요.

어떤 분은 남편을 원망합니다. 직장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시집 식구들을 그렇게 싫어해요. 또 자식 걱정을 그렇게 하고요. 모든 게 걱정입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억지로 사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요?” 왜 사느냐 이유를 물으면 죽지 못해 산다고 합니다. 그런 동기가 만들어내는 삶이 어떤 것일까요?

어둠의 색깔로 보니까 잘 해보겠다는 동기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혹시 그런 마음이 있다면 속히 버리세요. 좋은 동기를 찾아서 거기 매달려야 합니다. 미운 사람들이 있어도 오히려 사랑으로 봉사하겠다고 결심하고 나가야 합니다. 힘들어도 계속하면 조금 지나서 바뀝니다. 내가 이 가정에 이 직장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겠다고 마음 정하세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좋은 동기를 부여하세요. 생각해 보면 됩니다. 현재 앞에 나온 다리 만드는 사람 일번, 이번, 삼번 중 어느 사람인가? 행복하고 잘 되기 위해서는 몇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할까? 가장 좋은 동기가 무엇일까요?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다 좋은 동기가 될 수 있어요. 그냥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도 좋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동기유발이 제대로 일어나고 질서를 잡으려면 더 궁극적인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셔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그래서 항상 좋은 동기로 강하게 선하게 일하게 하십니다.

어느 날 엘리사라는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두 마리의 소를 두 줄로 세워서 쟁기는 끝의 두 소가 끌고 가게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바알 신앙이 지배했어요.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들은 목숨이 위태로웠어요. 많은 사람들이 바알 신앙으로 넘어갑니다. 엘리사는 그저 농사나 열심히 지으려고 했어요.

“세상이 악하니까 일이나 열심히 하자”입니다. 가정과 자신의 행복이 일하는 동기입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자. 장가도 가자. 힘을 기르자. 아무도 나를 건들이지 못하게.” 이것도 좋은 동기 유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어요. 엘리야가 그를 찾아옵니다. 말없이 자기 겉옷을 그의 어깨에 던져 덮습니다. “나의 뒤를 이어라.”

이제부터 그의 일하는 동기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자. 사람들을 구원하고 돕자. 세상을 비추자.” 무슨 일을 하든 이것이 일하는 동기입니다. 그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소 두 마리를 잡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리고는 엘리야를 따릅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하든 그 동기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그를 살아있게 합니다.

3. 거룩한 동기로 불타는 사람이 되라

자신이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을 한다는 확신이 선다면 끝까지 해냅니다. 우리교회 임용구 형제의 아버지는 구월산 빨치산 대장이었습니다. 자기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이 그 무서운 일을 해 내게 만들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철수하고 아들 이름을 탈출했던 용유도와 구월산의 두 자로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반공주의자로 싸우다 타계하셨습니다.

자신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이 모든 역경을 이겨나갈 힘을 줍니다. 긴장, 공포, 결핍과 외로움! 빨치산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만약 잡혀서 총살당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산화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세상 사람으로는 최고의 동기를 가졌으니까요.

그러나 신자의 동기는 조국과 민족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엘리아도 그의 제자인 엘리사도 그러했어요. 왕이 그를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덤벼도 그를 이길 수 없었어요.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했어요. 거룩한 동기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바울도 어느 날 예수를 만납니다. 그러면서 삶의 동기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출세하고 잘 살기 위해서 모든 일을 했어요. 그것도 강력한 힘을 주는 동기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달랐어요. 예수의 겉옷이 던져졌어요. 삶의 동기가 다르니 행동도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사람들은 못 사는 것은 피하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동기는 잘 살고 행복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님 뜻 이루는 게 행동의 동기였어요. 잘 살건 못 살건 상관이 없었어요.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못 되면 못 되는 대로 모두 사람들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 일으키는 데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수고도 넘치게 하고 옥에도 수없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목숨이 수없이 위험을 당하고 잠 못 자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어요. 그러나 그의 동기는 언제나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고 했어요. 그 강렬한 열망이 행동의 동기였어요. 그러니 그의 삶은 사람들이 감당 못하는 엄청난 힘을 동반했어요.

우리는 감격스러운 삶 살 권리가 있어요. 앞의 노동하는 사람 중 1번, 2번, 3번 누가 되겠어요? 3번 이상의 4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다리를 만들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영혼을 교회에 인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동기유발 한다면 만족한 삶이 펼쳐집니다. 엘리사가 아니라 예수의 겉옷이 마음에 던져졌어요.

예수의 겉옷을 늘 느끼세요.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동기를 아름답게 결정하세요. 일을 통해 돈만 벌지 말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세요. 영혼을 구원하세요. 사랑하세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을 잘하게 하는 동기는 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 이상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늘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이것이 최상의 동기인가?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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