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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앞에 (삼상 10:17-27, 계 3:8-11, 요 11: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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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서에 “발아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바로 마르다의 누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발아래 여인”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녀의 3가지 행적 때문입니다.

(1) 눅10: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르다는 음식 준비하느라고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2) 요11: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연락을 받고서도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그들의 집에 오셨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셨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울고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달려가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도 매우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 길로 즉시 무덤으로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닫힌 무덤문도 열어주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도 넣어주시는 이런 엄청난 일들이 기도응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 요12:에 보면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여기서 집 주인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가서 자기가 소중히 간직했던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이런 돌출 행동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내게 좋은 일을 하였으니 어디든지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하여 기념하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헌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할 때 사람들로부터는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 주님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로 인정받습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한 일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발아래서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발아래 여인”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리아와 비교하여 여러분의 현 위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성경 사무엘상10:17에는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사무엘은 이스라엘 초대 왕을 세우는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일을 어디서 했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나라들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다른 나라들 같이” 되고 싶다는데 대하여 매우 마땅치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그 방법은 철저히 신앙에 입각해서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옛날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끈질긴 유혹을 받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죄를 짓겠느냐?”고 해서 극복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하여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킨 요셉을 하나님은 거기서 훈련을 시키셔서 그 나라의 총리가 되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과거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도 백성들을 미스바 여호와 앞으로 모았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그 누란의 국가적 위기를 승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항상 여호와 임재의식을 가지고 살고, 모든 일을 여호와 앞에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물론 여호와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서 해야 할 일이 예배뿐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마치면 제직회도 하고, 당회도 하고, 또 각 자치회 회의도 하게 됩니다. 그 일들도 역시 여호와 앞에서 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일상의 모든 일을 항상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지금도 국가적인 행사에서는 애국가 부르기와 함께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하던 자유당 시절, 기독교는 과거 일제의 신사 참배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국기에 대하여 거수경례하는 것을 매우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 일을 과거 신사참배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경례”를 “주목”으로 바꾸고 거수경례 대신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이것이 꼭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보다 당시 한국 교회는 그만큼 오직 하나님신앙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있습니다. 그 첫머리에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때 교계 일각에서는 이 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라고 하는 말이 십계명에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하는 첫 번째 계명과 상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국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신격화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태극기 앞에”를 “태극기 앞에서”라고 “서”자를 하나 넣어야 한다고 제안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서”자 하나를 넣고 빼고 하는 것이 결코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적어도 오직 하나님 한 분 신앙에 대한 그 충정만은 우리가 수용해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비로소 대화도 전도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이스라엘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18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라는 말로 시작되는 사무엘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하여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왜 자꾸 “다른 나라들 같이” 되려고 하는가 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범죄 할 때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 그리고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의 주인은 자기들도 아니고 물론 사탄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과 그 동산의 주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하여 해 주신 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을 만나고, 그의 말을 듣는 동안 하나님을 떠나고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19절에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들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은 제도 그 자체보다 그런 제도를 요구하게 된 그들의 불신앙이었습니다. 비록 산을 옮기는 역사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잊어버리면 저절로 “다른 나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이루어주신 일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모시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여기 사무엘의 철저한 모습을 보십시오. 22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마침내 제비뽑기를 완료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했던 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입니다. 큰 고개들을 다 넘어왔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큰일은 결판이 났습니다. 사울이 현장에 있고 없고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사소한 것 같은 일도 하나님께 여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도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한 말 중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느냐?”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실패한 것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왕으로 선출되고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신앙에서 떠나고 하나님 앞을 떠나 나중에는 자기 뜻대로 하다가 결국 사탄의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보면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직분자가 되기 전에는 겸손하고 충성스럽던 사람이 그 이후에 가서는 불충하고, 교만해 지고, 주장하려고만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점점 뒤로 빠져서 낙오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큰일에는 신앙적인 모습이지만 사소한 일들은 예사롭게 비신앙적으로 처신한다든지, 반대로 작은 일은 신앙적이지만 큰일은 전혀 신앙과 상관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이란 나중도 처음처럼, 작은 일도 큰일처럼, 역경에도 순경 때처럼 일관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찾으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찾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서 “주여, 네가 여기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 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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