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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수혈전과 원수사랑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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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오전에 미국 뉴욕의 110층 쌍둥이빌딩 세계무역센터가 항공기 테러로 무너졌습니다. 같은 시간에 워싱턴의 미 국방부·국무부 등 미국 경제·정치 심장부가 피랍항공기 또는 폭탄 실은 차량에 의해 동시다발적 테러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테러에 의해 사망, 실종자만도 5515 명으로 1 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사건직후 미국정부와 언론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했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습니다. 그 후 미국은 아랍권과의 불편한 외교를 하면서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복수는 전쟁입니다. 지구의 전쟁은 언제나 끝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시시비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있습니다. 이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 법입니다. 법은 개인이 사사로이 보복과 복수를 하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개인의 권력으로 보복을 하게 되면 당한 것 이상으로 갚게 되어 있습니다. 보복은 더 큰 화를 불러들이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점점 커집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에는 정신이 있습니다. 고대의 법은 일종의 보복법이었습니다. 고대의 제일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도 당한대로 갚아주는 보복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복수하고 싶을 때 복수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이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율법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21 장의 내용입니다.

<출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말씀도 사실은 보복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엄격하지만 그 정신은 처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당한 것 이상으로 보복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사고를 치기 전에 경고하거나 엄포를 넣는 것은 강하게 할수록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고를 치면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혼을 내거나 처벌하는 것보다 좋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의 법은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핵무기를 가졌으면 나는 더 센 무기를 가져야 이깁니다. 상대가 폭력을 쓰면 나는 이단 돌려 옆차기를 써서 제압해야 합니다. 아테네 올림픽 때 태권도 경기에서 문대성 선수가 금메달 딸 때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겁니다. 4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첫째는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뺨을 맞는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른편 뺨을 치려면 오른손 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손바닥보다 손등으로 치면 충격은 덜하지만 두 배의 모욕을 주게 됩니다.

폭력은 어떤 경우도 용서하기 힘듭니다. 술만 먹으면 아내를 잔인하게 구타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 자신도 흥분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양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소리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맞거든 왼편 뺨까지 내주라고 하셨습니다. 참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파렴치한 술주정뱅이의 폭력이나 미친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에 왼편 뺨까지 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빨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왼편 뺨을 돌려 대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에 대해서 보복하기 위해서 악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폭력을 당하면 몸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몸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상처는 더 깊게 납니다. 이 마음의 상처를 푸는 길은 복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속이 풀립니다.

그런데 왼편 뺨을 돌려대면서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갚고 싶겠지만 네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너는 사랑하고 용서만 해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태는 점점 악화됩니다. 서로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점점 보복의 강도가 커질 것입니다. 피차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상대에게 감동을 주게 됩니다. 폭력을 휘두른 자신의 못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만듭니다. 때려서 깨우치게 하는 것보다 사랑으로 감동을 줘야 깨우칩니다. 때려서 갚으면 내 속이 후련할 것 같아도 그 날 밤 다리를 뻗고 잠자지 못합니다.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라는 이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압니다. 성경이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을 예수를 암 믿는 사람들도 압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때는 성경이 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른 편 뺨을 맞을 때 왼편 뺨을 대는 사람은 기독교인들 밖에 없다고 인정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 크리스천들이 폭력을 당할 때 이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저들이 오히려 비난합니다. 이 말씀을 이용해서 더 악하게 굽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면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 훈련, 신앙 훈련을 잘 해서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로마서 12:17-19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이면 당연한 것입니다. 선을 받으면 선으로 갚는 것이 도리입니다.

본문 46 절과 47 절 말씀이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세리나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6-47>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실 동물적입니다. 동물들은 힘의 논리로 지배합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잃고 동물적 본능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선을 악으로 갚는 경우가 있습니다. 드문 일이겠지만 이것은 악마적입니다. 사람의 도리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끔 악마적으로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을 선으로 갚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읽으면 이와 같은 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는 너희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법정으로 끌고 가는 교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악랄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을 살려면 남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법을 모르면 당하고 짓밟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헌법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부 법률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속옷까지 벗겨 가려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속옷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싸움이 되질 않습니다. 속옷을 가져가려면 겉옷을 먼저 벗겨야 합니다. 속옷을 뺏겼는데 몸을 가릴 겉옷마저 없다면 그 부끄러움은 어떻게 합니까?

유대인들의 겉옷은 어떤 경우에도 빼앗기지 않도록 법에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출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키톤이라고 말하는 속옷을 입었습니다. 키톤은 무명이나 아마로 짠 한 통으로 된 자루 같은 것입니다. 이 키톤은 저당 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옷은 어떤 경우도 저당을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겉옷은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덮는 모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마저 뺐기면 추운 밤을 떨며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겉옷마저 뺏기신 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속옷까지 벗겨지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은 로마 병사들이 장난삼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유대인의 겉옷은 찢으면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느라 그렇게 겉옷을 찢어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법을 알지만 당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뺏으면 뺏기라는 것입니다.

그냥 무기력하게요? 이 경우는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경우입니다. 악랄하게 법을 이용해서 욕심을 채우려는 자에게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빼앗아 누려보라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속옷을 뺏으러 갔다고 겉옷까지 빼앗아 왔으니 기분이 좋을까요? 바보 멍청이라고 놀려대면서 좋아할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다 잃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빼앗긴 것 그 이상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팔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십니다. 낮아진 우리를 지극히 높여주십니다.

이 경우는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도저히 뺏을 수 없는 것을 빼앗고자 할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빼앗아 가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경우입니다. 결국 그는 지혜롭지 못하게 뺏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사람이 법을 무시하고 무작정 빼앗는다고 무작정 당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문제이거나 법의 질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 예는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근로 기준법이 엄하게 적용되어 억지로 일을 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강제 노동이 허다했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주인이 내리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넘치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할 때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돈을 받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집니다. 내 일터가 하나님이 주신 일터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 심부름을 시키면 열 번이라도 응답할 태도로 응하십시다. 이 적극적인 순종은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내 몸이 곤하고 불편해도 누가 요청하면 기꺼이 응해 주라는 뜻입니다. 요구한 것 이상으로 넘치게 해주면 좋은 일이 이어집니다.


네 번째 예는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주면 떼이기가 십상입니다. 돈을 빌려 간다고 다 잘되진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난처합니다. 꾸어 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면 내 재산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안 들어주자니 성경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아 갈등하게 됩니다.

꾸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이거나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있는 부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소유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도움을 줄 때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게 돈을 꾸어줄 때 받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었지만 그 결과가 안 주는 것만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기꾼에게 돈을 빌려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교활해서 처음에는 작은 돈을 빌려서 후한 이자로 신용을 쌓은 다음 점점 큰돈을 빌려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새가 되어 날라 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고가 빈번합니다.

또 마약 중독자나 술주정뱅이가 돈을 빌리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도 거절해야 합니다. 돈의 쓰임새가 선하지 못하면 결코 빌려 주어서는 안 됩니다. 또 받는 자를 무책임과 게으름에 빠지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자기 분수에 맞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꿔서 남을 빌려주는 것도 분수에 지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과 형편 안에서 도울 수 있어야 무리가 없습니다.

빌려주는 것과 구제는 약간 다릅니다. 그래도 교만한 마음이나 건방진 태도로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눴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로 이런 사건은 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경제 문제는 복잡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여섯 가지 반제 가운데 마지막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 반제의 제목을 보복하지 말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반제는 원수를 사랑하라하고 정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합치면 ‘원수에게 보복하지 말라’ 이렇게 제목을 지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원수가 있습니까?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원수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기독교방송에서 장경동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원수를 삼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불행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원수는 쌍방이 서로 맺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맺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원수처럼 여기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벨은 의인으로 가인은 악한 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열 아들은 아우 요셉을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을 살렸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잡았지만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수보다 원수 삼는 사람이 다 불행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원한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반갑다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에게 활짝 웃으면서 “너를 올 여름에 잡아먹을 거야” 하고 말해보십시오. 강아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웃는 표정만 보고서 계속 꼬리를 흔듭니다. 반대로 아주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면서 “강아지야. 사랑해. 아이 예뻐~” 하고 말해 보세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해도 강아지는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마음과 같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마음과 맞는 소리를 내는 것을 순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1 초에 14,000 개의 신경근육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뇌는 적절한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호흡, 발성, 공명, 조음, 성대, 횡경막, 폐장, 후두, 인두, 구강, 비강, 눈, 귀를 종합적으로 조정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다른 소리를 내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뇌가 적절한 소리를 찾지 못하고 역음을 내게 됩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린 파장이 됩니다. 그래서 말보다는 표정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설교를 유창해도 거기에 '진정성'이 없으면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눌한 언어로 더듬거리며 설교를 해도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으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하자고 설교를 했습니다.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자고 했습니다. 뺏기면 더 뺏기고, 억지로 일을 시키면 넘치게 일하고, 빌리는 자를 거절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이 말씀에 ‘아멘’하겠습니까?
(설교 /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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