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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웨슬리회심주일]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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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존 웨슬리 회심 26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세계감리교회가 오늘 웨슬리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그의 성령체험을 통한 회심이 감리교회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의 링컨주 엡웟의 가난한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1791년까지 그러니까 88세까지 거의 한 세기를 살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163cm의 키에, 몸집은 가냘프고, 용모가 단정했습니다. 재치 있는 말솜씨, 시적인 글 솜씨, 그리고 착한 성격과 책임감이 강했고, 정의감이 남달랐기 때문에 학생들 간에 인기 있는 모범생이었습니다.
1725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제레미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에 관한 규범과 연습>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웨슬리는 가정 훈련을 통해서 받았던 도덕적이고 영적인 열망을 넘어 철저한 순종과 자기의 모든 생각과 행동 일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726년,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웨슬리는 내적 종교의 본질과 범위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내적 삶은 한 점의 흠도 없이 깨끗해야 하며, 사람의 개조는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일은 틀림없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예수님처럼 살려고 다짐했습니다.

1727년 웨슬리는 윌리암 로우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로의 엄한 부르심>이란 두 책을 읽었습니다. 웨슬리는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영혼과 몸과 물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여기서 웨슬리는 죽도록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책을 읽고 새롭게 다짐한 것을 웨슬리의 제1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회심 후 1729년부터 <성서>를 더욱더 철저하게, 열심히 읽고 진리의 표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청년시절 웨슬리는 그러한 신앙서적들을 읽음으로 인간 중심적인 신앙에서 벗어나려고 고민했고, 심리적 갈등을 느끼면서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신앙과 선행에 의한 신비주의적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조지아 주에서의 선교가 실패로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와 회의와 좌절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임이었던 올더스케잇의 거리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를 위한 서문>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신앙이 무엇이며, 그리고 믿음만으로 사람을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웨슬리는 뜨거운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고 성공적 사역에로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더스케잇에서 웨슬리가 체험한 회심의 중요한 점은, 그가 마음에 뜨거운 경험을 한 것은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주신다는 것,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날 웨슬리가 체험한 회심은, 믿지 않던 멸망에서 구원을 얻는 그런 체험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참 믿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웨슬리는 ‘종의 믿음’에서 ‘자녀의 믿음’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생각해 봅시다.
종의 믿음입니까? 자녀의 믿음입니까?

존 웨슬리는 처음부터 감리교회를 조직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심 후 그의 신앙생활을 눈여겨 본 사람들이 그의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보고 규칙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메소디스트’(methodist) 곧 감리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존 웨슬리의 신학과 교육 그리고 사회 윤리와 경제까지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을 맞아 그의 후예인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개인의 영적 체험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는 각종 기적을 일으키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체험이 있은 후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일곱 평신도 지도자로 세운 스데반, 빌립 등도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현장에서 당신의 일을 행하실 때에 영적으로 변화된 사람을 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체험 없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라는 외침의 경험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교회만 다니다가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헌신할까 하는 생각과 행동보다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뭔가 해야 되는 것 같고, 사랑하기는커녕 속에는 미움과 비뚤어진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웨슬리의 미국 조지아 선교 실패의 원인도 보면,
1) 영국 사람들이 가지는 신사도입니다. 깨끗하게 차려입고, 아는 것도 많고, 소위 엘리트 의식을 가진 그에게 조지아 주의 원주민들은 그야말로 미개하였던 겁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준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원주민들을 가르친다는 우월감, 내가 너희를 이해 이런 것 한다는 우월감.
이것들이 실패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영적체험 없이, 다시 말해 그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존심, 자기 감정에 따라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보면 뭐 하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싶은 그런 사람들, 그런 내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교와 봉사를 위해 힘써야 할 그리스도인들, 우리 감리교인들은 먼저 성령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 됨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인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도, 내 노력, 내 애씀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은혜인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교회 청소나 주방 봉서, 차량운행, 찬양대, 교회학교 교사 등등, 그리고 나아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까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나를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니 신앙생활이 비틀거리는 겁니다.
웨슬리, 그분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나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물리쳐주시고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나를 건져주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확신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눈치 보며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종의 믿음을,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때문에 오히려 즐겁고, 그래서 스스로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영적 체험이란, “이젠 내가 아니고, 주님 당신입니다.”라는 고백이고, 또한 “이젠 내가 아니라, 주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삶을 살고자 하기에, 주님의 삶을 살기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영적 생활을 힘쓸 때마다 필요에 따라 계속적인 체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믿음을 돈독케 하고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시인할 수도 없는데, 성령 없이 인간의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예수 없이 인간의 감정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려니 오히려 힘든 겁니다. 그러니 감사와 기쁨보다는 불평이 더 많은 겁니다.
웨슬리의 회심이 이 시간 여러분에게 있어지길 축원합니다.
한 번 함께 외쳐봅시다.
“이젠, 내가 아니고, 주님, 당신입니다.” 아멘.

2. 감리교회는 성경을 신앙과 실행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존 웨슬리의 종교 강령 제5조에는,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성경에서 볼 수 없고, 성경이 증거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조건으로 믿으라고 하거나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피터 뵐러와 대담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올더스케잇의 체험을 통해서 이성을 초월하여 성경에 복종하고 긍정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올더스케잇 사건 이전,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성령 클럽을 만들어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운동을 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고 조지아선교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을 읽었지만 그러나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의 이성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겨우 예배시간에 듣는 설교, 그것이 성경에 대해 듣는 전부입니다. 그나마 감정이 좋으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감정이 나쁘면 아예 귀를 닫거나 하나하나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성경읽기가 싫거나(싫기야 하겠어요), 왠지 성경 읽게 되지 않거나, 설교시간 아예 눈감고 귀 막고 있는 게 편하다면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난 성령의 사람이 아니구나!”
교회 안에서 이일 저일 활동 많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성경 안 읽거나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예배시간에 졸거나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난 아직 성령의 사람이 아니구나!”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사람, 영적체험이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그분이 나의 구원이 되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인 성령을 사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심 후 웨슬리의 삶의 중심은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성경 읽는 시간이 정해져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었는데, 그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 번잡한 곳을 떠나 나 홀로 여기 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나는 이 책을 폅니다.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1746년 나온 그의 표준설교집 서문에 스스로를 “한 책의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한 권만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오로지 성경한 권뿐이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 말씀으로 한 세기 동안 설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 안의 근본진리를 확신하고 그 진리에 복종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옛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지금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옛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은, 지금,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앉은뱅이인 여러분과 저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지금의 말씀입니다. 2000년 전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의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지금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음성,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말씀이 들려지고 역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 곧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 말씀 듣기를 싫어하니, 어떻게 주님의 은혜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감리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말씀을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감리교회는 영혼 구원과 사회구원을 힘씁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오랜 갈등은 영혼구원만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와 사회 구원만을 강조 하는 진보주의 사이의 이중적 복음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웨슬리의 선교사역은, 영혼을 구원하는 뜨거운 열심과 병폐된 사회를 위한 사랑이 실천으로 전인구원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존 웨슬리는 지(知)와 정(情)만의 사람이 아니라 의(意), 즉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의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절하 하였지만, 웨슬리는 로마서의 신앙과 함께 야고보서의 선행을 동등하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지 믿음 이전의 선행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또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로 실천하지 않는 거듭남이란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감리교가 복음을 들고 들어올 때, 먼저 의료와 교육 선교부터 시작하였습니다. 1894년, 맥클레이 미 감리교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고종으로부터 의료선교에 대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1885년 부활절에 장로교 언더우드와 함께 들어온 아펜젤러 목사님 그리고 스크랜튼박사 내외분 등 감리교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화학당, 배재학당, 배화학당, 광성학교, 영화학교, 영명학교, 호수돈학교 등 교육사업과 정동병원, 동대문 부인병원, 평양 기홀병원, 원산 구세병원, 개성 남성병원, 해주 구세병원 등의 의료사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 종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근대한국 사회를 각성시켰습니다.

존 웨슬리는 감기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 가슴, 손이라고 주장하면서, 말 그대로 지식(성경), 체험, 실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영국교회와 사회를 구원해 냈고, 그 정신을 이어 받은 감리교회는 온 세계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웨슬리 그분이 새롭게 만들어 낸 것 아닙니다.

한 때 경남이나 호남지역 장로교 목회자들은 감리교회를 이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84년 진주 처음 왔을 때, 이웃에 사는 장로교회 집사(지금은 장로)가 “우리 하고 같은 성경을 쓰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웨슬리는 한 책 곧 성경의 사람이었고,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없이 하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받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뭐라 하셨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이 예수님의 물으심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듣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 많이 알아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평생을 교회 다녀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웨슬리의 회심 전은 ‘예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였고, 웨슬리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겁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 한다고 느꼈다.” 이 느낌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가슴 깊숙이 솟아나는 감격과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 확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이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본문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계명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믿음이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닌 겁니다. 예수 믿는다면서도 이웃,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인 같은 믿음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 믿음이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을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때 세상은 세상의 만물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이때의 세상은 죄와 사단의 세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 하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기 싫고, 말씀 읽거나 듣기 싫고, 기도하기 싫은 것 등등은 그게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죄와 사단의 역사 때문에 그런 것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럴 때 어떻게 해요? 싸워서 이겨야지요. 이걸 “요즈음 내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넘어갈 수 있어요? 싸워야지요. 더 예배 참석하고, 더 성경 읽고, 더 기도하고 그래야지요.
또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짜증나고, 기쁨이 없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힘들어하고, 믿음의 형제들을 미워해서 보기 싫으면, 그것 역시 죄와 사단의 세력 때문인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걸 “요즈음 내 기분이 그렇구먼.”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어요? 싸워야지요.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더 열심히 형제를 사랑해야지요.
그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 것 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세상 이기실 때 천군천사를 동원 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분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직분이 있어야, 돈이 있어야, 힘이 있어야, 그래야 세상을 이기는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웨슬리, 그분은 회심 전에도 여러분과 저보다 더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의 훈련 받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여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회심이 있기까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 그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린 어떠합니까?
회심 전 웨슬리의 10분의 1도 못 되면서 제법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 여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난 회심 같은 거 없어도, 그런 영적 체험 없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내 생각, 내 욕심, 내 뜻대로 하면서도 다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마치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듯이, 마치 존 웨슬리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이젠 내가 아니고 주님 당신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본문 12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신앙생활이 승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곧 봉사와 헌신에 승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이웃 특히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에 승리하십시오.
( 설교 /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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