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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자 하나님 (출 15: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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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홍해를 건너 시나이 반도에 발을 디뎠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시나이 반도는 일 년 평균 강우량이 60미리 정도입니다.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에 사는 베두인 족들은 주로 염소가죽으로 만든 텐트를 치고 지내지만, 때로는 오아시스에 야자수 잎 등을 엮어 임시 거처를 만드는데 지붕이 없습니다.

광야는 거친 흙과 돌멩이 뿐이고, 오아시스를 만나야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에서 생존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인도 아래 수르 광야로 들어갔는데, 사흘 길을 행진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백성들과 가축 떼가 목말라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스라엘 자손은 마라의 오아시스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면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으로 ‘모세의 샘’이라는 뜻의 ‘오윤무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열 개가 넘는 우물과 종려나무 숲이 남아 있습니다. 마라에 당도한 이스라엘 자손은 저마다 샘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시란 말이냐?”고 원망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는지라 그 나무를 꺾어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마라’의 사건은 인생여정에는 고난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찌하여 고난을 당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먼저, 알아 둘 점은, 누구나 한 세상 사노라면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이 다가오는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치고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직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앞으로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믿는 자들도 고난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인생에 고난이 다가온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의 실과를 떠먹고 범죄했을 때, 그는 상함도 없고 해됨도 없는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수고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믿음의 선진들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라를 도로 찾긴 했지만 그러기까지 한 동안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겨우 318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전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한평생 자기 땅을 가져본 적이 없이 가나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고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중에서 가장 평온한 생애를 보낸 이삭은 어땠습니까? 그는 청년 시절에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제물로 바쳐질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삭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묶여서 처분을 기다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죽음을 앞둔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또 이삭은 그의 형통을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살던 땅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고, 우물을 두 번이나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더욱 파란만장합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집을 떠나 외삼촌 집으로 도주해서 20년 동안 밤낮으로 양을 치느라 고생했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맞으러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얍복강 가에서 밤을 새워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습니다. 천사가 그의 환도뼈를 치니 위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천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형 에서와도 화해했습니다.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외동딸 디나가 그 고을의 추장인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불상사가 생겼고, 이에 격분한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습격해서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때 야곱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주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이 알고 쳐들어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애굽왕 바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바로가 그에게 “나이가 얼마냐?”고 묻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욥기 5장 7절에는 이르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 자손의 사례는 영적으로 성도들의 인생여정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죄악 세상이고, 광야는 천국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죄악 세상에서 구출 받아 천국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행하는 중입니다. 광야 길에 목말라 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마라를 만났듯이 우리도 때로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지난날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을 생각하면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고난의 때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에 여러 가지 고난이 다가올 때 원망, 불평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 같은 태도는 고난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큰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우선, 인생을 깊이 이해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평온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으면 인생을 올바로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생 대학과도 같습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은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나약한 성격이 고난을 통해서 강인하게 변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고난을 겪으면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분별력이 없던 사람이 인생을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그릇된 삶의 태도를 고치고 성숙한 인격자로 변하게 됩니다. 구약의 한 성도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고 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만약에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 지냈더라면 행복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겠지만 결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칠년 기근으로부터 수백만의 사람들과 자기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집안사람들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면서 비로소 큰살림을 경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 그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요셉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자손이 애굽에 내려갔으며,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용서를 비는 형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창 50:20)고 했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로 선용한 대표적인 예로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때 유대 사회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석학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성경과 율법 지식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스테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증인 노릇을 자처하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권한을 받아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유력한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바쳤습니다.

자. 그러면 주님을 위해 헌신한 바울에게는 고난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이하에서 그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9)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께 충성된 사람이 이처럼 고난을 당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난이 막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진 줄 알았을까요? 그러나 그 같은 고난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좌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사도 바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길에서 마라의 쓴물과 같은 고난을 만났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과 같이 불신앙에 빠져 원망, 불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는 복된 기회로 선용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마실 물이 없이 수르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 자손은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를 만나자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아시스에는 물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시원한 물로 해갈할 것을 생각하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기대와 달리 그곳의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에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처럼 문제를 만났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입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문제를 만나거든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목말라 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2)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는지라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즉시로 물이 달아졌습니다.

본문에 보니,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마라의 쓴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에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인간적인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의 믿음을 시험하시는구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실 뿐 아니라, 친히 아무도 악으로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약 1: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세워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을 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진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더 큰 은혜를 받을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험을 만나거든, 고난이 다가오거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염려, 걱정하지 마시고, 낙심, 절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는 해결책을 알려주셨듯이 우리의 기도에도 최선의 해결책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쓴물을 달게 하신 것은 곧 물을 치료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쓴물을 치료하기 위해 물에 던진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쓴맛을 고치시려고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 고난을 당케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쓴물 속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든 원인인 죄를 청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친 크고 두껍고 질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갈라져서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이르기를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쓴 인생을 단 인생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고난을 은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속의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미움과 증오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들이 화해를 이룩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원수조차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삶에서 저주를 제거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든 부하든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저주가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부하게 잘 살아도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치료의 강물이 주를 믿는 자들을 병에서 놓여나게 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와 함께 우리의 질고를 없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료하는 의로운 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들어 상한 마음과 생활 전체를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구원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과거의 허물과 죄를 묻지 않으시고 사죄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 누릴 때, 우리의 마음은 쓴물을 내는 모든 무거운 죄책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산출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에는 우리가 영구히 거할 도성이 없습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를 통과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서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광야생활은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더구나 광야에서는 양식과 물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으며, 쓴물을 단물로 변케 하셨고, 드디어는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이르기를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반석에서 나는 물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생수를 마시며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영생하는 떡과 음료가 되십니다. 예수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했던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자,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고작 우물물을 가지고 생색을 냈지만, 예수님께서는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그 심령에 성령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되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치료의 은총을 받아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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