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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사랑의 회복 (요 15:12-15, 요 2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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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엇으로 믿습니까? 성령 충만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믿을 때에만 우리는 서로 하나 되는 진정한 의미의 캐톨릭 처치 공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땅 끝의 사람까지도 포용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 세계 만민이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주님께서 본문에서 밝혀준 진리입니다.

요21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인 동시에 4복음서의 마지막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결론이자 4복음서의 결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결론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뚜렷하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던집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양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4복음서의 결론이자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공교회 혹은 보편적인교회가 되어서 뭐하자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양을 양과 어린양, 두 가지로 구분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원전에는 세 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첫째는 아르니온 =갓태어난 양을 말합니다. 둘째는 프로바티온=청년기의 양입니다.
셋째 단어는 프로바톤= 성장이 끝난 성숙한 양입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양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부류가 아니라 갓 태어난 아르니온/ 나보다 어린 유치한자, 수준이 낮은 자도 사랑하라는 것이며 프로바티온/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 도 사랑하고 프로바톤도/나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경원시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무례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런가하면 나와 비슷한 사람은 경쟁의 상대로 생각합니다. 비슷한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질시의 대상이나 굴종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사람을 구별 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든 예루살렘사람이든 땅 끝의 사람이든 구별 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결론이자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 잘못된 사랑
우리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 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나의 유골이 쎄느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가운데서 안식취하기를 원하노라.” 나폴레옹은 자기 나라 프랑스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얼마큼 사랑 ? “그토록 사랑”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젊은이를 죽였습니다. 남의 귀한 자식들을 시베리아로 데려가서 얼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그의 정복욕성취에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토록 사랑했노라고 합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연설구절구절마다 독일을 사랑하다. 게르만 민족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는 그 사랑 때문에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수없이 죽였고 자기민족을 죽게 했습니다. 자 그것이 정말 사랑입니까? 우리의 사랑도 그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실은 더 많은 사람과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참 된 사랑 우리는 참사랑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요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제 주님이 마지막 결론에서 보여준 주님의 사랑의 독본을 관찰함으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배우도록 합시다. 주님이 보여준 사랑은

1. 먼저 찾아가는 것. (요21:1)
예수님은 먼저 그를 버리고 떠나 가버린 배신자를 찾아가 자신을 나타내보였습니다. 왜 찾아가셨나요? 그들을 책망하거나 비난하려고 가신 것입니까? 복수하려고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다른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없이 배신을 하였어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선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가야 합니다. 성령이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셔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2. 먼저 말을 거는 것.(요21:4-5)
바닷가에 주님이 서셨으나 저들은 주님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때 주님이 먼저 입을 여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사랑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입니다. 말을 하기 전에는 불필요한 오해들이 쌓여지고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만 남습니다. 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때로 미움이 생기면 흉측스럽게 보이지만 사랑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싸이판에 가서 새벽에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물속의 산호와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의 아름다움을 잊지를 못합니다. 죽기 전에 한번 더 가자고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관점이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3. 먼저 필요를 채워주는 것.(요21:6,9,13)
(6)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사랑은 온유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온유란 잘 길들여진 프라우테스란 말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온유는 크레스튜오마이 필요를 채워준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아 쓸어졌습니다. 그람에게 필요한 것이 뭐죠? 화살을 빼어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으며 화살을 쏜 사람의 인상착의는 어떻습니까?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사랑은 죽은 윤리입니다. 배움이 부족한 사람 신체적인 장애 홀로 살아가는 분들 연로하신 분들을 위해 여러분은 어떻게 필요를 채우고 있습니까? 또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 남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엊그제 미국에서 오신 90세의 목사님을 강남에서 만났습니다. 중국에 3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당을 지어주신분입니다. 나는 지난주 수안 보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참석했습니다. 한 장로님은 교회에서 은퇴하시고 76세입니다. 신발장 정리를 하고 벗어놓은 구두를 닦아줍니다. 그리고 빵을 만들어 나눠줍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7독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꼭 물질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얼굴 눈빛으로도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를 어떻게 채워 줄 것인가를 고민할 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4. 예의를 갖추는 것.(요21:15-17)
예수님과 비드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베드로야! 그러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문화에서 이해하면 부모의 함자를 넣어서 부르는 것은 예의입니다. 종들에게는 그런 예의를 갖추지 않고 부르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제자요 종인 베드로를 부를 때 베드로야 그러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렀습니다. 사랑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예의를 다해서 경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횃불 청년 가운데 꽤나 양반이 있습니다. 명절이나 특별한때에 고향에 가시면서 꼭 전화라도 잘 다녀오겠노라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아기에게도 아가 쌍 한답니다.
요21:7절에 베드로가 주시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도 벗고 있다가 옷을 두른 후에 물로 뛰어 들어 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예의입니다. 작은 무례로 사랑을 깨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5. 기회를 주는 것.(요2115-17)
주님은 세 번 부르시며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세 번이나 대답을 하게하십니다. 이는 그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희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형편없는 나를 오래참고 기회를 주셔서 오늘 제가 여기 있습니다.

6.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아가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 스톨게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제는 스톨게로 묻습니다. 베드로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이 사랑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7. 본이 되어주는 것.(요21:17-23)
주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본이 되십니다. 사랑은 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본받는 자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나는 본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사랑은 자신이 진리의 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어떤 분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였으나 이대로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이대로 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도우시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 주님의 참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유병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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