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 (눅 11:9~13)

  • 잡초 잡초
  • 485
  • 0

첨부 1


시작하는말

한 전문의가 병원으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았습니다. 내출혈로 위급한 소년이 실려 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자동차를 몰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자동차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노란 모자에 검정 점퍼를 입은 괴한이 나타났습니다. 강도는 권총을 들이대며 자동차를 강탈해갔습니다. 전문의는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예상했던 것보다 1시간 늦게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5분전에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강도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년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중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노란 모자, 검정 점퍼, 소년의 아버지는 몇 시간 전 의사의 자동차를 강탈해간 노상강도였습니다.내출혈로 죽어가는 소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아버지도, 돈도 아니었습니다. 병든 소년에게 필요한 사람은 의사였습니다.

영혼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신앙, 아내의 신앙,  자녀의 신앙은 내 영혼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나와 내 영혼을 치료할 의사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영혼을 치료할 의사,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했습니다.그런즉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약속하셨고, 또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인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과 은혜의 성장은 이로 인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우리는 불가불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교회에서 무익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령 충만을 받기는커녕 악령이 충만하고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성령 충만을 받아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거짓된 생활 때문입니다.

거짓된 마음, 거짓된 인격, 거짓된 말, 거짓된 행동은 성령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시고 깨끗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날아들고, 악취가 나는 곳에는 파리떼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거짓이 있는 곳에는 악령과 마귀들이 틈타기 마련입니다.썩은 것과 악취 나는 곳에 비둘기가 날아들지 않는 것처럼 거짓의 냄새와 악취가 나는 곳에는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는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18-20)라고 말했습니다.이사야가 예언하던 그때에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습관적으로 거짓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습관적으로, 쓸데없이 거짓을 자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거짓은 습관성입니다.

실리적으로 거짓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바라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리적인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초월하면 거짓을 버릴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협을 탈출하기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앞에서 미친 채 한 것이나(삼상21:13), 칼빈의 제자 베자가 카톨릭 군사들 앞에서 “베자가 저쪽으로 도망가더라”고 한 것은 생존을 위한 거짓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어느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이야”하는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당 안에 모였던 6,000여 명의 신자들이 공포에 질려 일어나 밀고 밀치며 소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란으로 46명의 사상자까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밝혀진 바로는 “불이야”라는 소리는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소매치기들이 작업을 벌이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해 저지른 술책이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거짓 경보기가 너무나 자주 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늑대야 , 늑대야” 소리쳐도 이젠 문도 열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불신풍조”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종교의 탈을 뒤집어쓴 무리들이 비상벨을 울리고 있습니다. 양심 없는 사람들이 양심을 외치고 있습니다. 가장 윤리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윤리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신학자의 가슴 속에 신이 없고 윤리학자의 생활 속에 윤리가 없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시대는 사이비의 농도가 너무 짙습니다. 심지어 가짜 박사, 가짜 목사까지도 양산이 되고 있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진실성의 회복은 우리 시대의 큰 숙제이며 건전한 사회 건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도산 선생은 “죽어도 거짓말을 말자”고 강조했습니다. 신뢰성의 회복, 정직성의 회복, 화합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적극적으로 경계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계시록 22:15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내 뼈 속에 스며 있는 허위의 잔재를 뽑아내야 하겠습니다.아무리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도 현세를 포기하면 그러한 거짓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스데반 같이 눈이 열려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경박한 생활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엄위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십니다.그리스도인들은 자나 깨나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위에는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을 때에 신령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는 자나 깨나 쓰레기만 뒤집니다. 개는 오나가나 주둥이를 끌고 다닙니다. 사람은 그래도 좀 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나 깨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일본 사람의 작품 가운데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도쿠가와 바쿠후시대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의 신부들이 와서 일본에서 포교를 했습니다. 큐우슈우 지방에 많은 신자들이 생기자 정부 당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수단으로 예수의 사진을 신도들 앞에 놓고 그 사진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를 배신하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살려 주고 신앙의 절개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차마 밟지 못하고 기도하며 거부하고 떨며 서 있는 사람에게는 온갖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종이나 동판에 불과한 사진을 밟지 못해서 고문을 당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밟으면 목숨은 살지만 영혼이 죽는다고 생각하여 일생을 자책하며 살아야 하는 고통과 밟지 않으면 영혼은 편할지 모르나 육체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신부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그들을 구하려고 자기가 앞서서 예수의 사진을 짓밟고 지나갑니다. 자진해서 배교라는 십자가를 지고 많은 이들을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저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현대인들은 예수의 사진 하나를 밟지 못해서 순교를 당하는 일은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이처럼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인간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저자 역시 기독교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대신에 세상을 지나치게 바라보면 생각과 행동이 천박해 집니다. 생활과 언행이 경박스러워집니다. 경박스러운 심령에 성령이 오실 리가 없습니다.

3. 교만한 생활 때문입니다.

교만은 일종의 영적인 질병입니다. 예레미야는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나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도적 중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 도다  모압 거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 사이에 거할지어다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같이 할지어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 자고와 오만과 그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렘48:16-29)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일종의 망령입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은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은 썩어 들어가는 창질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렘13:9)고 말씀하셨습니다.호세아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두 마리의 수탉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혈투를 했습니다. 말리는 사람도 없는 터라 그 닭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흰 닭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툇마루 밑으로 슬금슬금 도망쳤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검정 닭은 우쭐해졌습니다. 그는 울타리 위로 올라가서 목청을 높여 크게 외쳤습니다. “어때? 누구든지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앞으로 내 암탉들에게 손을 대면 그냥 두지 않을 테야. 너도 다시 그 툇마루 밑에서 나오면 혼을 내줄 거야.”...바로 그때였습니다. 가까운 산으로부터 한 마리의 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왔습니다. “앗” 검정 수탉은 소리쳤으나 피할 틈이 없었습니다. 매는 검정 닭을 발톱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쏜살같이 올라갔습니다. “싸움에 이겼다고 뽐내지마...” 매는 중얼거리며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툇마루 밑에서 나온 흰 수탉은 그 꼴을 보고 암탉들에게 눈웃음을 보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모르는 법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다음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의 교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인 즉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만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아무리 믿는 자라 할지라도 교만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교만한 자를 가징 싫어하시고, 믿음 있는 자를 가장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4.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만일 누가 자기의 사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없어야 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의 책임,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써의 책임, 교회에서는 교인이나 직분 자로써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성령 충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책임을 다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은 성령의 경계의 대상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각자의 책임이 있습니다.성도들은 기도의 책임, 헌신 봉사의 책임, 충성의 책임, 헌금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5. 성령을 거스리는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내기를 잘하는 성품, 남의 험담을 좋아 하는 입, 시기심으로 가득한 마음, 질투심이 풍부한 인격, 잔인하고 악독한 기질 등등은 모두 은혜를 물리치는 방해물입니다.바울 사도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고 말했습니다.

6. 성령 충만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심에 따라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옵니다. 관심이 없으면 눈이 막히고, 귀가 닫힙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은 교회밖에 있던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18세기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대각성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빛이 되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대를 비롯하여, 유수한 대학들도 이 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조너던 에드워즈”가 서 있었습니다.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대의 목회자요,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매일 다섯 가지 결심을 고백하며 자신을 새롭게 했습니다. “①살아가는 동안은 나의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간다. ②한 순간의 시간이라도 결코 놓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그것을 선용한다. ③아무리 큰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타인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결코 취하지 않는다. ④어떠한 일도 원한 때문에 하지 않는다. ⑤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일이라면 선택지 않는다. ”는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의 성도들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한 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끝맺는 말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같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다윗과 같이 신령한 생활을 하여 자손만대에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신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