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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사시는데요? (빌 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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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제목은 제가 보기에도 참 도발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꼭 한번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 꼭 이 질문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하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을 하려고 들지 않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일을 잘 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해 내는 것 같습니다. 맹목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그 들 중에 정말 탁월한 사람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습니다. (김동호 목사)

그런 면에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행복한 삶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도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가지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만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생존자체가 문제가 될 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질문은 사치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 배부른 사람들의 겉멋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자체가 문제가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입니다. 유희입니다.

굶지 않기 위하여, 특히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하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루 세끼 굶지 않고 한데 잠 자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함부로 하찮은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존자체가 얼마든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존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리만큼 절박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 사람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행복을 느낄 수도 없다는데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좀더 잘 먹고 좀더 잘 자는데 에만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생존자체가 위험한 세상에서는 그저 굶지 않고, 한데 잠 자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그것이 해결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의 해결만으로는 더 이상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 일에 목숨과 인생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좀더 좋은 것을 먹으며,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자며, 좀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먹으며, 남보다 좀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며,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죽기 살기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 보이며, 그 유치하고 작은 우월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유치하고 작은 우월감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너무 많은 낭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낭비 때문에 우리는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생각하고 살 여유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먹은 음식 중 가장 비싼 음식은 75,000원에 10%의 봉사료와 10%의 세금이 추가되는 값의 음식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선택하여 지불한 것은 아니었고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대접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한 끼 식사에 거의 10만원이나 하는 식사를 하니 마치 귀족이 된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가 잔 호텔 중에 가장 비싼 호텔은 아마 하루에 약 300불정도 되는 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밤 잠을 자는데 30 여 만 원이나 써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을 여행 할 때 30불 정도의 여관에서도 자 보았습니다. 그래도 물론 화장실이 있어서 샤워를 할 수 있고, 깨끗한 시트카버가 있어서 하루 밤 잠을 자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다만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면 서민 같아 보이고,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면 자신이 귀족 같아 보인다는 차이는 분명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은 4억5천 만 원 정도하는 집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정도의 집을 장만하려면 거의 평생이 걸립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역시 자신의 평생을 드려서 벌어야 할 만큼의 돈을 집에다 쏟아 붓는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희 보다 조금 더 편리하고 귀티 나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면 돈이 생각밖에 많이 듭니다. 그러려면 그도 역시 그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생을 벌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귀족이 아닌 귀족 같아 보이는 생활을 위하여 자신의 온 삶을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왜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묻는다면 ‘귀티 나게 귀족처럼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별 것도 아닌 우월감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릭 워렌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저는 릭 워렌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그와 같이 좋은 책을 썼다는 것도 좋지만, 그와 같은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이 더 좋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제목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희망적인지 모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책을 사서 공부를 한 사람들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의 제목과 같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그것도 허탄한 욕심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여전히 먹고 마시는 일에만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좀더 좋은 것을 먹고,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자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먹고, 남보다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잠으로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너무 좋은 것만 먹다가 비만이 되고, 영양의 밸런스가 깨지고,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다가 운동부족이 되어 오히려 건강을 상하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 헛된 욕심에 온 인생을 다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긍정을 하고 수긍을 하면서도 우리들은 좀처럼 그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욕심이라는 것이 워낙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만 헷세의 데미안에 보면 ‘새는 알을 까고 나아온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고 하는 자는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거듭남을 위하여 반드시 파괴하여야만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욕심이 이끄는 삶‘입니다. 거듭남을 위하여 새로 창조해야만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릭 워렌 목사님이 말씀하신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은 대량생산품으로 생산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식처럼 낳으셨습니다. 자식처럼 낳으신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 낳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기대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목적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 끼에 10만 원 짜리 식사를 하고, 하루 밤에 30만 원이 넘는 곳에서 잠을 자고, 귀티 나는 귀족처럼 살 때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릴 때 정말 위대해지고 훌륭해지고 아름다워지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구원을 얻어 이 땅과 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고 살려면, 우리의 삶을 욕심이 이끌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욕심이 이끄는 삶에서 벗어나면 시간과 물질에 많은 여유를 갖게 됩니다. 3천 원짜리 칼국수를 먹어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고,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도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3천 원짜리 점심을 먹게 되면 당장 97,000원의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쓸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3천 원짜리 칼국수만 먹고 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한 끼에 10만 원 짜리 식사는 문제가 있습니다.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되면 270불의 돈을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쓸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꼭 30불짜리 여관에서만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혼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하루에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고 폼을 잡아야만 한다면 그는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목적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욕심에 이끌리는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욕심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한 자가 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 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 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의 취미는 나이를 먹는 것입니다. 앞으로 바뀔는지는 모르나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50살이 되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나도 드디어 50대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54살이 되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50대도 초반이 아닌 중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50대 초반보다는 50대 중반이 좋습니다.

50살이 되었을 때 저는 매우 중요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천명(知天命)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보면 사람 나이 오십을 천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천명의 나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맞았습니다. 저도 50이 되고 보니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남은 인생을 그 천명에 집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천명이 나를 이끌도록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명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집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심각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제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10만 원 짜리 식사를 하고,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면서 누리는 호사스러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쓸데없는 우월감이 주는 값싼 행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최선을 다하여 욕심이 이끄는 헛된 허영으로부터 자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절약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절약과 포기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물질과 능력과 시간을 천명에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저는 2002년 중반부터 금전출납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삶을 체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평균으로 보면 안 4, 밖 6 정도의 비율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2005년도에 들어와서는 안 1, 밖 5의 비율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작정한 건축헌금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완납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상상도 안 되는 그런 비율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비율은 상식적인 비율도 아니고 평균적인 비율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상의 경우 내가 집중하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나?’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비율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뒤엣것은 잊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오늘 ‘욕심이 이끄는 헛된 허영과 그것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푯대를 정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그 푯대를 천명(天命)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그 천명과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상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상이 바로 구원, 천국, 행복,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위하여서라면 자기 몸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을 위하여 바울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천명이었고 그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그 목적에 이끌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선택하였고, 그 목적에 그의 온 삶을 집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천명과 목적에 집중한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상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유치한 우월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삶이 부럽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바울처럼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온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은 천명과 목적입니까 아니면 욕심입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왜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왜 사시는데요?’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자신 있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고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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