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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조연배우-8] 십자가를 내가 지고, 구레네 시몬 (막 1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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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성지순례를 가본 분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Via Dolorosa’ 즉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르는 코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 바로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의 길을 뜻합니다. 성지순례를 간 성도들은 이 좁은 길을 따라가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는 믿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가봐야 하는 코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 앞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정말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자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 예수님이 죄 없음을 알면서도 유대인의 소요가 무서워 끝내 십자가 처형을 허락한 빌라도 총독, 예수님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며 그를 체포한 뒤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압력을 넣은 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십자가의 증인이 된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인간상 가운데 정말 특이한 사람이 하나 나타납니다. 바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사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얼떨결에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인간적으로 따지면 지독히도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 죄인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잔인하게 채찍질을 한 후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가로 목을 직접 지고 처형장으로 가게 됩니다. 이미 무서운 채찍질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망가진 죄인은 150파운드, 거의 68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거운 나무를 지고 가면서 채찍으로 찢겨진 몸에 그 나무의 거친 표면이 마찰되는 고통을 당합니다. 안 그래도 채찍질로 많은 피를 흘려 탈진한 상태인데 그 먼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죄수는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지면 또 로마 군병의 사정없는 채찍질을 당하고, 이렇게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다

그러다보니 어떤 일이 종종 생겼는가? 어떤 죄수는 이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탈진해 죽기도 했고 또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의 죄수들은 이미 십자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거의 초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이미 탈진할 대로 탈진해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된 ‘정말 지독히도 재수 없었던’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 나온 ‘억지로’라는 낱말이 중요합니다. 이 ‘억지로’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앙가류오’인데 ‘강요하다,’ ‘억지로 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페르시아(바사)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파발마’(擺撥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공무로 급히 가는 사람이 타던 말이 파발마지요? 파발이라는 기수가 이 파발마를 타고 중요한 소식을 전국 각지로 전하곤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왕의 명령을 신속하게 제국의 각 지역에 전달하기 위해 모든 대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종의 파발마를 배치하였고 사신은 이 말을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사신에게, 그 사신은 또 다음 사신에게,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해 줌으로써 명령을 신속, 안전하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의 사신은 필요할 경우에는 말이나 선박을 징발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강제로 징용하여 일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로마 사람들도 똑같은 징용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뭐냐? 여러분 혹시 생각나십니까? 제가 산상수훈 설교할 때 마태복음 5장 41절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 제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 당시 식민지를 지배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 중에 식민지 민간인을 언제든지 차출하여 길 안내자나 물품 운반자로 이용할 수 있었던 제도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징발한 것입니다. 이 법에 의하면 식민지 백성을 천보, 로마 거리로 1마일(헬, 밀리온)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바로 이런 제도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레네 시몬이 왜 하필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다가 엉겁결에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그의 이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의 이름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시몬’은 당시로서 흔한 남자 이름이었고(베드로, 즉 바요나 시몬처럼) ‘구레네’는 이 시몬이라는 사람의 출신지를 뜻합니다. ‘구레네’는 ‘퀴레네’라는 곳으로 북아프리카의 한 지역입니다. 이집트의 서쪽, 리비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곳인데 본디 주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헬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다가 주전 96년에 로마의 손에 넘어가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 먼 북아프리카에서 구레네 시몬이 왜 이 예루살렘에 오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에는 일찍이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 구레네 시몬은 틀림없이 이 구레네 디아스포라에 속한 유대인으로서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성지순례를 간 셈이지요. 사도행전 2장 10절에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날 때 사도들이 한 방언을 들은 사람들의 지역이 나옵니다. 그 중에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 사람들’도 나오는데 이들도 오순절을 맞아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방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성지순례를 온 구레네 시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21절에 나온 것처럼 이 시골뜨기 촌사람(‘시골로서 와서’)은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왜 촌사람이 서울 가면 여기저기 구경거리가 많아 두리번거리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거리에서 구름 떼처럼 모여 무엇인가를 구경하는 모습을 본 구레네 시몬도 그들과 함께 서서 이 장면을 구경하며 “저 사람은 누구 길래 저 잔인한 십자가 처형을 받는담?” 하고 궁금해 하는데 그 순간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 전에도 지쳐서 자꾸 넘어지던 예수님이 그만 구레네 시몬 앞에서 완전히 탈진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로마 군병이 일어나라며 세차게 채찍질을 해도 예수님은 죽은 듯 꼼짝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병은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포기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때 눈에 띤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덩치가 남들보다 커서 힘이 세 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북아프리카에서 온 가무잡잡한 시몬의 얼굴이 특이해 보여서였을까요? 아무튼 그 순간 정말 재수 없게도 대신 십자가를 지는 일에 징발된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21절 뒤에 보면 더 이상 구레네 시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렀다’는 말만 나오는 것을 보니 구레네 시몬은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 후 즉시 풀려난 모양입니다.




억지로 축복 받은 사람

이렇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잠간 등장했다가 금방 사라집니다. 성경에 다시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 나온 것처럼 그에게는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헌데 본문을 보면 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사람의 이름이 상당히 비중 있게 나옵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냥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투를 보니 마가복음이 쓰여질 당시 이미 사람들은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 꽤 유명한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나중에 여자 장로님이 되기도 했는데 이 분은 사회활동도 활발히 했지만 특히 여전도회 활동을 많이 해서 전국 여전도회연합회 회장도 지낸 꽤 유명한 분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남편분이 밖에서 누구를 만났을 때 “제 이름은 아무개입니다”라고 하면 아무도 모르다가 “제가 아무개 권사 남편입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다는 말인지 안 좋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분은 남편보다 아내가 더 유명한 대표적인 경우인데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이 쓰여질 당시 구레네 시몬은 사람들이 잘 몰라도(성경에 한번밖에 안 나오는 엑스트라니까 당연합니다) 그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보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이 더 먼저 나온 것이지요.

그러면 구레네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어떻게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다같이 로마서 16장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로마서 16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만히 읽다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이 우리가 아는 이름도 나오지만 대부분 전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생소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도 바울의 선교사업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들 가운에 바로 13절에 ‘루포와 그 어머니’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이 한 로마서 16장의 한 구절을 통해 두 아들 중 루포라는 사람과 그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부인이 사도 바울을 도와 선교사업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가 곧 내 어머니라고까지 할 정도로 친근감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가 나중에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어 사도 바울을 도왔고, 그 어머니 역시 중요한 동역자가 되어 사도 바울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또 한 명의 아들인 알렉산더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마가복음을 볼 때 이 알렉산더 역시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과 아내가 이렇게 유명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인이었던 구레네 시몬이 이 사건, 즉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진 사건 이후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가 먼저 믿고 아내가 믿고 두 아들이 믿어 그야말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고 나중에 이 가정 출신의 두 아들이 유명한 초대교회 지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레네 시몬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시체를 만지거나 피 같은 것으로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합니다. 그러니 경건한 유대인 중에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앞에 두고 남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십자가를 대신 지고자 했겠습니까?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꺼려지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비록 엉겁결에 당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원망과 불평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뜻하지 않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재수 없게 당한 일이라고,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피 흘리며 죽어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으며, 구원의 상징인 그 고귀한 십자가를 대신 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골고다에 도착한 후에 로마 군병들에 의해 풀려난 후에도 이 구레네 시몬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호기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 시몬은 끝까지 십자가의 현장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15장 39절에는 십자가 처형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끝까지 목격한 후 결국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실 이 백부장도 자기가 좋아서 이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을 지휘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다가 결국 예수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지요. 아마 구레네 시몬도 이 백부장처럼 억지로 끌려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나중에는 전 가족이 구원을 얻는 크나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축복을 받은 셈이 된 것입니다.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 군병에 의해 억지로 그야말로 얼떨결에 십자가를 졌다가 억지로 축복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오늘 우리는 설교를 마친 후 찬송가 367장을 부를 것인데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얻겠네.” 성경이나 찬송가에 보면 나도 십자가를 진다는 내용이 참 많이 나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지고 함께 고난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인 구레네 시몬은 특이하게도 자기가 지고 싶어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이 아닙니다. 억지로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예수님을 고백하게 되고 온 집이 예수 믿어 구원 받고 또한 자손들이 교회의 훌륭한 지도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야만 성도의 길을 바로 가는 것이며 축복 받는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기꺼이 안 지겠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억지로라도 지게 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에도 억지로 혹은 얼떨결에 십자가를 졌다가 억지로 축복 받은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실 저도 친구 따라 얼떨결에 교회 가서 예수 믿고 목사 되었으니 구레네 시몬과 같은 복을 받은 사람이요, 부모나 아내에게 떠밀려, 아니 예수님에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예수 믿게 되었다가 정말 엄청난 복을 받게 된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동기에서든 너도 나의 십자가를 져라!” 이것은 주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좋아서 지던, 억지로 지던, 얼떨결에 지던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며 참으로 복 받는 길이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0~21절에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중 구레네 사람들은 19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핍박을 피해 흩어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구레네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성도가 된 것일까요? 그 답은 설교 중에 언급했던 사도행전 2장 10절에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날 때 성지순례를 왔다가 사도들의 방언을 듣고 모인 사람들 중에 구레네 지역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어 초대교회의 성도가 됩니다. 바로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안디옥까지 흩어져 전도를 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구레네 사람인 루기오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안디옥까지 가서 전도했던 구레네 사람 중 루기오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진 모양입니다. 이렇게 그 머나먼 북아프리카 구레네 사람들이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선교중심의 교회 안디옥 교회를 설립하고, 또 구레네 사람인 루기오는 그 지도자가 된 사실을 보며 우리는 이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라는 이름 없는 사람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열매를 맺은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꼭 내가 무슨 대단한 열매를 맺어야만 복 받은 삶입니까? 내가 뿌린 작은 씨앗, 이름 없는 내가, 조연인 내가 뿌린 그 작은 씨앗이 나중에 자라 위대한 영적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도 정말 복 받은 삶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다가 자신과 온 집안이 복을 받고 나중에는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된 구레네 시몬은 우리에게 참다운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오늘도 말없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이 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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