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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행전적 신앙인 (행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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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3일(금) 저녁 늦은 시간 가졌던 월드컵 축구 예선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우리나라 박주영 선수가 거의 종료시간에  가까운 시점에서 천 금 같은 한 골을 넣으므로 가까스로 기사회생하여 다음 경기에서 잘 하면 월드컵 본선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첫 출전한 A매치 경기에서 중요한 한 골을 넣은 박주영 선수에 대해 어느 네티즌이 평한 내용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저의 미음과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박주영 선수가 아주 잘 하는 훌륭한 선수인 것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교회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머리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요,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영적인 공동체는 영적인 일을 해나가야 하며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고 또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 일을 하셨는데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치유, 병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째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전하고 완수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주고, 설명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눈을 뜨게 해줘서 하나님의 세계와 영적 세계를 이해시키며 그대로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셋째로, 기적적인 치유의 사역, 즉 섬기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먼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성장해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겉 사람은 약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왕성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족과 이웃을 잘 섬겨주는 유익하고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삶이 변화되고 우리처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영적 운동이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쓴 것인데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가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서 유럽까지 갔다가 거기서 얼마동안 머물고, 바울이 몇 바퀴 돌고 마지막에 유럽에 왔을 때 다시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사도바울은 체포되어 북쪽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을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그 2년 동안 바울을 종종 면회하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제자들을 만나 사귀는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누가복음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은“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로 시작됩니다(눅 1:1-4). 즉 “우리 중에 이루어진 예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고난당했고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부활해서 어떻게 40일 동안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가 500여명 앞에서 승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예수사건입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습니다. ‘말씀의 목격자’란 예수님을 처음부터 만나서 제자가 된 예수님의 목격자들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이 말씀의 목격자, 즉 예수님을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고,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과 부활하신 것을 보았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열여섯 번이나 나타나 말씀과 격려를 주셨던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머리가 있었고그래서 무엇을 봐도 잘 관찰하고 분석하고 조직하고 순서와 논리를 따질 줄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근원부터, 즉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사셨으며, 어릴 적에 어땠으며 하는 것을 자세히 리서치를 해서 데오빌로에게 써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아마 누가가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해서 데오빌로가 예수를 믿게 된 것 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것저것을 배워 깨달으며 신앙이 성장했지만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가“예수님에 대하여 내가 자세히 조사한 것을 순서대로 자세히 정리하여 당신에게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하면서 누가복음을 보낸 것입니다. 즉 누가는 데오빌로가 예수에 대해 잘 아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서문에 보면 누가복음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 나옵니다. 이제 누가가 제 2권 사도행전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2절). 제 1권을 통해서 예수를 잘 알게 되었으니 이제 2권을 통해서 성령을 알게 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에는 두 종류, 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누가복음적 신자입니다. 누가복음적 신자는 예수님을 몰랐다가 알고 친해진 사람입니다. 주일만 되면 예수님을 만나 찬양하러 교회에 갑니다. 만약에 아직도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아직 그분을 체험했거나 자신의 구주로,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눈을 뜨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게 영생을 주신 분임을 확실히 믿고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기만 하다가 어느 날 눈이 번쩍 떠지면서 마치 깜깜한 방에 스위치가 올라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 내 마음 속에서 환하게 깨달아지고 보게 되었다면 이것이 누가복음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머물러있으면 안 됩니다. 지식적 신앙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도행전적 신앙인으로 변화되어야 됩니다. 사도행전적 신앙인이란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만나 알게 된 후에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만나고 성령을 알게 된 신앙인을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내 안에 계심과 능력주심을 체험한 신앙인을 말합니다. 정적인 신앙에서 역동적인 신앙으로, 지식적 신앙에서 행동적 신앙으로 변화된 신앙인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눅24:4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등 십자가 사건 전체가 이미 저 모세 때부터, 선지자들을 통해서, 시편을 통해서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즉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쓰인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절). 예수님이 성경을 설명해주시니까 “아! 그렇구나. 이게 바로 그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성경을 읽어도 잘 안 깨달아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시면,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머리가 있어도 깨달아지지 않던 상황에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사도행전적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 예수를 통해 죄 사함, 천국,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된 것은 너무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첫 단계입니다. 누가복음적 신앙은 첫 단계이기 때문에 이제 둘째 단계인 사도행전적 신앙으로 가서 사도행전적 성령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적 신앙인과 사도행전적 신앙인이 똑같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적 신앙인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없는 경우입니다. 지식적으로만 아는 신앙인이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49절), 여기에서 입히운다는 것은 성령으로 옷을 입는다는 뜻이며 성령을 온 몸으로 느끼듯 능력의 성령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 내 능력으로, 내 지식과 기술로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서 말하고 행동하고 증거하고 일을 성취해 나가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인들이 되기 바랍니다. 이걸 위해서 사도행전을 쓴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4절).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내 가슴과 영혼 속에 일어나야 누가복음적 신앙인이 사도행전적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힘이 없던 사람이 힘을 얻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능한 세계를 보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도행전적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의 사역이 그 복판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도행전적 신앙인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 예수를 아는 것처럼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성인들에게 성령사역은 철저히 외면당해왔습니다. 성령사역은 마치 무식하고 가난한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왔으며,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지성적 크리스챤들에게 성령사역은 초이성적이고 몰상식적인 신비주의 운동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사역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며, 지성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사역자들이 지성인들을 고려한 절절한 접근방법을 갖고 있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역을 한다면, 그 힘과 영향력은 엄청날 것입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학문적 엘리트였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로마 시민권자로서 경제적 부유층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지도자 그룹인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 엘리트였습니다. 지성인이었던 바울이 성령 받은 후 그가 행했던 사역은 제자들의 사역 보다 더 영향력 있고 강한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지성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기독교 교회의 발판을 마련했고, 아울러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정립하는 데 공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과 함께 하심으로 죄와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므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인간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열매 맺게 하시며 우리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게 하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게 하시는 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비취’라는 사람은“공기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꽃을 키우며, 빛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겠는가.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힘든 일은 성령님 없이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과 함께 하심으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사람, 인내와 자비와 착한 사람, 부지런하며 온유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사시는 그리스도인, 사도행전적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잃어버리면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감정이나 인격만 남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한 인간의 감정과 인격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사람이 되고 오히려 미성숙한 인간의 고약한 냄새만을 풍길 뿐입니다.

대체로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교만함과 무례함이 드러나고 자기 독선의 고집과 자기중심의 주장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루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도, 사도행전적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무력하고 무능합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짜증을 냅니다. 자기를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일하라고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는 성도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있고, 능률과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충성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강림의 사건을 체험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세례의 인치심으로 확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인격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갔습니다.‘촬스 휘니’는“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따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되십시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는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행전1:4)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를 만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성령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오셨다가 가셨지만 이제 성령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는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과 도우심을 받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를 증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지식적 신앙인의 모습에서 한 단계 뛰어올라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역동적 능력으로 증인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재도약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생활의 목표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는데 육안, 지안, 영안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영안이 열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내 속에 충만이 거하시면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두더지의 눈과 독수리의 눈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시야가 다르니 인생관이 다르고 행동철학이 다릅니다. 두더지에게 아무리 푸른창공에서 만물을 보여줘도 볼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눈이 열린 성도와 소경인 성도는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성실한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주시는 계시의 능력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축복하셔야 영안,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영안이 열리면 영적 실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면 이미 주신 놀라운 복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활의 목표는 더 넓은 땅을 획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거룩한 순간에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보다 크고 넓은 세계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보다 거룩하고 영원한 시간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7일마다 그 거룩을 체험하며 그 시간이 영원에 닿기를 기도합니다. 교회 성장은 넓은 공간의 확보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시간의 확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이 힘들게 지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안식일만 남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남길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공간은 없고 다만 영원한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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