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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오늘은 환난과 책망과 능욕의 날 (사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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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 37:3).
이 말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그의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로 굵은 베옷을 입게 해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어 전달한 말입니다.

당시 세계 패권 국가였던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장군 랍사게의 침략소식을 듣고, 왕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가면서 이 화급한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알리라고 한 말입니다. 말하자면 미증유의 국난의 위기를 맞은 히스기야 왕의 견해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 존폐가 걸려있는 대 위기의 국난의 상태임을 피력한 말입니다.

Ⅰ. 유다가 만난 국난의 위기는 앗수르 군의 침공 때문이었습니다(사 36:1~22).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군사 18만 5천 명을 동원하여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했다고 하였습니다(사 36:1). 이제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적장 랍사게는 최후통첩으로 히스기야의 신하들을 불러 세우고 항복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사 36:2f).
저들은 먼저 너희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 신앙의 정책에 속지 말라(사 36:4), 애굽을 의뢰하지 말라(사 36:6), 너희 중에 힘센 장수가 있으면 우리와 힘내기하자(사 36:8~9), 심지어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하는 것이 하나님 여호와의 뜻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사 36:10). 결국 히스기야 왕의 여호와 신앙 정책은 너희를 자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온갖 협박과 모욕과 공갈을 다 퍼부으면서 사전에 항복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사 36:11~21).

이러한 굴욕 앞에 왕은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내어 국난의 위기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지자 이사야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적장 랍사게가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모독한 말을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왕은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사 37: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 때문에 두려워 말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뜬소문)을 듣고 그 고토로 도망하게 될 것이고, 그는 그 고토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 37:6~7)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저들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산헤립은 랍사게를 통하여 친서를 써서 히스기야에게 보내 항복을 강요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결코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신, 어떤 힘도 산헤립의 손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사 37:8~13).

이 절망적인 위기를 히스기야 왕은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 37:3)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는 대 국난이므로 ‘환난의 날’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니 ‘책벌의 날’이었습니다. 또 이방신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받은 치욕과 모독이니 ‘능욕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최악의 국가적 위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기에 히스기야는 이 상황을 해산할 힘이 없는 산고에 비하게 된 것입니다.

Ⅱ. 미증유의 국난을 기도로 대처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거국적이요, 거족적인 기도였습니다.
먼저 겸손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였습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는 일은 비통과 참회를 의미하였습니다(사 37:1~2).

하나님의 성전에서 올리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왕은 산헤립이 보낸 항복을 강요하는 협박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하였습니다(사 37:14). 히스기야는 살아계신 하나님,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눈을 떠 보시고, 산헤립의 패역무도한 만행을 직시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하만국으로 하여금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사 37:15~20). 그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구하였습니다. 최악의 국가적 위기를 기도로, 오직 기도로 대처하였습니다.

Ⅲ. 승리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히스기야에게 구원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사 37:21). 하나님은 산헤립이 처녀 딸 시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사 37:22). 그러한 산헤립의 만행은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도전행위라고 하였습니다(사 37:23). 하나님은 산헤립의 교만을 꺾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산헤립의 그러한 침략적 만행은 사실 하나님 자신께서 앗수르를 멸망시키는 섭리적 계획이라고 하였습니다(사 37:24~28). 결국 그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37:29~34).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평화의 징조를 알려주었습니다.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 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사 37:30)라고 하였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사 37:31~35)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산헤립과 그 군대를 자신이 직접 개입하여 멸절시키셨습니다. 본문 37장 36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자’(말라크 야웨)는 구약에 약 51회나 보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의 역할을 하고, 어떤 때는 구약에 나타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창 16:7).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였습니다. 놀라버린 산헤립이 니느웨 고토로 돌아가서 자기의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 37:37~38). 그리하여 유다가 만난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 평화와 승리와 감사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6월 5일입니다. 한국 백성에게 있어서 6월은 실로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달처럼 여겨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잊으려고 해야 잊을 수 없는 6·25 동란의 비극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만난 6·25의 참극은 실로 산기를 맞은 임산부가 해산할 기력이 없음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국시로 삼던 이북의 남침은 약 3개월 만에 전 남한을 그야말로 초토화 해버렸습니다. 정부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부산으로, 나중에는 제주도로까지 이전을 준비해야 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6개국의 UN 우방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38이남의 남쪽을 도로 찾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는 UN 우방국은 물론이고 특별히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고,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6·25동란이 일어난 지 금년이 꼭 55년이 되는 해입니다. 금년 6월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한미 대통령 회담(6. 10. 워싱턴), 평양에서 모이는 6·15선언기념대회(6. 14-17 / 평양 김일성경기장, ‘6·15 공동선언 발표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서울에서 모이는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6. 21-24), 6월 20에 서울에서 갖기로 한 한일정삼회담, 그리고 이와 상관관계가 있는 6자 회담 등이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공산주의 운동의 선전활동과 지도자들의 정치적 쇼가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움직임 속에 우리 정부는 ‘민족 공조론’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민족 공조론의 사상적 배경은 민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는 ‘민족주의’ 그 자체는 사실상 사상적으로 반 기독교적입니다. 그것이 유대주의였고, 독일의 나치주의였고, 일본의 군국주의였습니다.

6·25동란의 남침은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추종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공산국가주의자들에 의해서 감행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민족 공조론’의 정체가 무엇인가? 북한이 국시(國是)를 민주주의로 바꾸었단 말인가? 지금도 북한은 그 정체성이 변하거나 바꾸어진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또한 우리 정부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원래 ‘균형’이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균형이란 축(구심력)을 중심한 좌우의 무게를 기울어짐 없이 조정, 조율되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사회적, 국제적 관계성을 띠고 적용될 때 그 의미는 실로 복잡 미묘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폐일언하고, 우리 정부(국가)가 과연 동북아 정세의 균형자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과연 우리 정부가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균형자의 축이 될 수 있는 힘의 우위권을 보유하고 있는가?
위와 같은 두 종류(민족 공조론, 동북아 균형자론)의 우론(愚論)은 급기야 한미동맹관계와 자유우방국가와 유대를 흐려놓음은 물론이고, 국론분열의 양상마저 자아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한미동맹관계를 파기할 뿐 아니라 반민주주의 운동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무신론적인 유물론적 공산주의나 그 국가주의가 상존할 동안 민족 공조론이나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창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 위기가 초래될 징후가 보입니다. 이것은 저 무저갱에서 나온 연기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 황충 운동이 되고 말 것입니다(계 9:2~3).

이러한 때에 오늘 우리 교회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그 가운데 역사의 흥망성쇠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믿음의 주시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대판 앗수르의 정체는 안과 밖에 상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백성들 자체 안에서 유물론적이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부류들의 정체가 두렵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국시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잠재상태에서 이제 활개를 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와 그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와는 그 본래적 정체가 이질적입니다. 그러한 국가주의자들이 우리 밖에 있는 현대판 앗수르 부류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크게 각성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의 세계 통치는 결코 이 세상 군왕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 잃어버려져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구속역사의 진행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역사가 겪는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의 손길이 나타나, 복음 선교를 위한 평화와 안전의 날들이 오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아 멘 -
(석원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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