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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덴동산의 세가지 축복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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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옆에사람과 웃으면서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
공지영의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를 돌보는 할아버지와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종마를 사랑하는지, 또 그 말이 자기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에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습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습니다. "너는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다는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했습니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최근에 우리 사회 일각에서 '당당한 이혼'이라는 말이 무슨 앞 서 가는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처럼 부각되고 있습니다. 2000년 말 기준으로 이혼 부부 중 4쌍 중의 1쌍이 15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해 온 부부였답니다.

우리는 실상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르게 창조되었는가?
상대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나의 부모나 자녀는 어느 때에 행복해 하는가?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주었습니다. 여기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 행복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에덴은 좋은 살기 좋은 장소지만 꼭 환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셨지만 마귀도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먹기 좋은 과일 나무들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먹지 말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에덴동산 안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었습니다.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덴이 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이라는 동산이 우리 개인의 삶일 수도 있고 내가 사는 가정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교회일수도 있고 일터일수도 있고 내가 사는 동네일수도 있고 내가 다니는 학교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속에서 천국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혼만 하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는 줄 압니다. 직장에 취직만 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교회에 나오면 다 사랑 받는 줄로 압니다. 행복이나 기쁨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며 가꿔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참고 기다리고 피를 흘리는 희생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행복의 가정, 에덴의 가정, 에덴의 가족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때도 천국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가서 더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기쁨과 행복의 동산이 되기 위해 3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축복은 돕는 배필입니다.
18절에 있는 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이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돕는 배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배필이라고 하는 말은 "알맞은 짝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돕는데 알맞은 짝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가정이든, 일터든, 교회든 에덴을 만들고 싶다면 돕는 배필이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눈썹이 나지 않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문신이라도 하는데 그때는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그녀는 오랜 시간 혼자로 지내다가 결국 혼기를 놓치고 어느 연탄장수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썹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매일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자기가 눈썹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 남편은 잘 속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일을 돕는 직원이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그녀가 대신 남편의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연탄을 나르는 일은 평생 처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고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잠시 쉬자고 말하면서 쉬는 동안 자신의 목에 감아두었던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속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편이 아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부인의 눈썹만을 피해 조심조심 땀을 닦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부인은 자기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사람이 변하고 언제 힘을 얻는지 아십니까?
내 부끄러움을 누군가가 덮어줄 때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아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것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셔서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가족은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가 돕는 배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로서 이 땅에 좋지 못한 것들을 좋게 만드시고 행복하지 못한 것들을 행복하게 만드시고, 기쁘지 못한 것들을 기쁘시게 만드시고,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가족이라는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완전한 결혼」이란 책머리에 보면, 백지가 몇 장 나오고 거기에 "당신의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적어 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점을 적기시작하면 한 두 개겠습니까? 얼마나 적을 말이 많습니까? 속에 맺혀있던 얘기를 조목조목 적어나가노라면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좋습니까?
다 적고난 다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만약 당신의 배우자에게서 당신이 앞 페이지에 적었던 그 점을 빼 놓으면 당신의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곧 천사이거나 신(神)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당신같이 문제 있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요. 그래서 내가 돕는 배필이 되는 그 자체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나 힘이 드는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영감~ 나 좀 업어줘!"
할아버지도 무지 힘들었지만 남자 체면에 할 수 없이 업었지요.
그런데 할머니 얄밉게 묻습니다.
"무거워?" 그러자 할아버지 담담한 목소리로
"그럼~ 무겁지! 얼굴은 철판이지, 머리는 돌이지, 간은 부었지, 많이 무겁지!"

할머니를 내려놓고 같이 걷다가 너무 지쳐버린 할아버지가
"할멈~ 나 두 좀 업어 줘!"
기가 막힌 할머니, 그래도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업어 봅니다.
이때 할아버지가 약 올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
할머니 찬찬히 자상한 목소리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너~무 가볍지!"
이쯤 되면 서로 좋은 일 하고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집니다.

결혼생활이란 서로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돕는 배필이 되어 서로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이론들을 정착시키셨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 성공을 위한 공식은 없나요?”
아인슈타인박사가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물론 있다네.” 그는 종이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공(Success)=x+y+z’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성공방정식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x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 y는 ‘함께 삶의 재미를 찾는 지혜’, z는 ‘침묵하는 여유’였습니다. 성공은 열정과 기쁨, 묵묵한 정진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그를 배우려고 하지만 실패한 사람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그를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웃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도 행복을 느낍니다. 독불장군은 성공도 행복도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단어는 ‘용기, 인내, 책임, 침착’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의 단어는 ‘핑계- 방관- 분노- 성급함’ 등입니다.

히브리어로 돕는 배필 이라는 말은 ‘에제르’인데 강한 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돕는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돕는 배필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내 힘은 이미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돕는 배필은 '남성 명사형' 로서 여자가 남자를 돕는 것 아니라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여자와 남자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보완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성격적으로도 서로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보완하라는 말입니다. 성적으로도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기 때문에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도 서로 돕는 보완의 관계로 살아야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데 에서 가정의 행복과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내의 허물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라면 남편의 위치를 포기해야 할 사람입니다. 남편의 실수를 용서할 수 없다면 아내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식, 자식의 서투름을 사랑으로 감싸줄 수 없는 부모는 가정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누군가의 허물과 약점과 실수가 보이면.... '아, 마귀가 역사를 하는 구나, 내 죄가 많아서 그렇구나. 내 눈이 타락해서 그렇구나.' 하시면서 나를 먼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순복하고, 가족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마귀를 "마귀야 물러가라!" 하면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는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도 부족한데... 나 같은 사람에게 저 사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면서 상대의 허물을 용서해야 합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약점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허물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실수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돕는 배필이니까요!

너는 나를 용서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고. 나는 너를 덮고 너는 나를 덮고. 나는 너를 감싸고 너는 나를 감싸고. - 바로 그때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돕는 배필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정이 에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축복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23절에 보게 되면 아담이 하와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아담이 이르되 "이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어떤 신랑이 결혼을 하고서 첫날밤에 자기 신부에게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을 시시하게 반복하고 싶지 않소. 오늘밤 내가 당신에게 한 이 고백은 평생 유효하니, 내가 오늘밤 한번만 고백해도 평생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로 알고 살아가길 바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지혜로운 신부가 "여보, 나는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지 몰라요. 그래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고백해 주지 않으면 난 도무지 살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고백이 에덴을 만듭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5등급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제일 하급 수준의 5등급 대화는 틀에 박힌 대화입니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4등급 대화는 사실에 대한 물음과 답변 중심의 대화입니다. '밥 먹었냐? 뭐 먹었냐?, 라면 끓여 먹었습니다.'
3등급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수준의 대화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2등급 대화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준의 대화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1 등급 대화는 칭찬과 격려로 그 영을 살리는 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제일이야. 당신 없이는 못살아. 너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고, 너는 엄마 아빠의 소망이야. 당신은 정말 소중한 존재야'
이렇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게 일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따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서로 세우라" "서로서로 용납하라." 그러지 않아요?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돌고래쇼를 보게 되면 물위에서 점프하고 이러 저리 시키는 대로 왔다 갔다하고 나면 조련사들이 "수고했다,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물고기를 줍니다. 그러면 고래들이 더 열심히 합니다. 이런 물고기도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대화는 어떻습니까? 전 어제 밤에 잠을 참 잘 잤어요.
제 딸이 어제 하는 말이 "아빠! 남편이 아빠처럼만 됐으면 좋겠어"
"아빠처럼 되면 어떻하냐? 아빠보다 더 나아야지" 했지만, 그래도 그 말이 제게 힘이 되더라구요.
제 아내가 저보고 그럽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 할꺼야"
제가 얼마나 좋으면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어?" "다시 살아날 것도 아닌데 뭐"

우리의 문제는 4등급 5등급 수준의 대화이라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의 문제는 대화의 상실입니다. 그 중에도 사랑이 담긴 인정과 격려가 없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사랑의 고백이라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라" 말씀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의 고백이 있으니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좋기만 합니다.
사랑을 하면 눈에 꺼풀이 쓰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이후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책임의 전가를 합니다.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후부터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사람을 가까이서 사귀어 보면 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존경을 잃어버리고 사랑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게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혹시 가족간에 다툼이 있잖아요. 매일매일 부딪히는 부부간에, 부모자식간에, 싸움의 논제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별로 어려운 문제 가지고는 잘 안 싸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할 수 있을 것인가?
삼위일체론이 아주 어려운데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거창한 문제 가지고 이견이 생기고 싸움 해 보신 분 계십니까?
대개가 사소한 문제지요...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이불하나 가지고도 먼저 본 사람이 개면되지.... 이불은 니가 개라 네가 개라. 하는 것이나. 힘든 것 있으면 도와주면 되잖아요. 치약을 짜는 데... 왜 가운데를 누르느냐? 뒤에서부터 짜야지... 아니 치약을 가운데 짜면 어떻고 뒤에서 짜면 어떻습니까?
가족의 귀가 시간이 조금 늦으면 걱정이야 되지요... 그러면 먼저 전화를 걸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기다리는 데 언제 쯤 올거냐?”고. 전화 한통 주면 될 텐데 “너는 손이 없냐? 발가락이 없냐?”하면서 싸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이번 달에 용돈이 많으니 적으니”하고 다투고, 운전하다 말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하면 “운전대 맡겼으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그러면서 대판 싸웁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요. 가정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마주치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쁨도 되지만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아내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아내의 투정 한마디가 남편의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부모의 감정 섞인 징계가 자식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됩니다. 자식의 반항 한번이 부모의 행복을 앗아갑니다. 며느리의 태도가 시어머니의 한마디 충고가 서로에게 상처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를 해도 잘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요즘들어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꾹 참고 안합니다.
딸하고 사위가 이사를 간다고 해서 같이 있는 동안에 잘 사는 비결이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거더라구요. "사랑합니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이 말 한마다만 잘하면 되는 겁니다.

비록 남편이 두둑한 월급봉투를 갖다 주지 않고, 힘들게 번 돈이지만 그래도 알아 달라 하지 않고 “여보, 생활비 넉넉하게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하는 이 말 한마디에 아내는 감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인들은 남편이 밥만 맛있게 먹어줘도 행복해합니다.
아내가 밥을 차려 줄 때마다 "아! 나는 밖에는 나가서 밥을 먹으면 통 입맛이 없는데, 당신이 차려주면 언제나 밥맛이 좋아!"하는 칭찬 한마디에 아내는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야! 맛있다. 끝내준다. 죽여준다" 한마디만 더하면 지나간 하루 삶의 피곤함이 싹 가셔지고 보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피곤할 때 "당신 매우 피곤하게 보이는데! 힘들지?" 하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지금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하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게 됩니다.
몸이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머리 위에 손을 살짝 얹으면서 "당신 열이 많은 것 같은데, 약 좀 사다줄까!"하게 될 때 육체의 고통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시름에 지쳐있는 부모에게 "엄마! 학교에서 오다가 친구가 사탕 하나를 주었는데 엄마 줄려고 가져왔지! " 하면서 엄마의 입 속에 사탕 하나를 넣어줄 때, 부모는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 동기 중에 경상도 친구가 있는데 정말 묵뚝뚝합니다. 사람은 정말 진국인데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학교다닐 때 "가정"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기숙사에 들어와서 전화로 "여보! 사랑해"라고 하면 되는데 다들 잘 고백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사사사사사사~하다가 사찰집사님은 잘 계셔?" 그랬답니다. 뭐가 그리 어려운지...

"사랑합니다." 사랑의 표현을 언어화 할 수 있는 부부가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는 감사의 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감사는 성숙한 크리스챤만이 할 수 있는 자기표현입니다. "미안 합니다" 이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제 탓입니다.” 책임을 지려는 마음입니다. "괜찮습니다." 너그러운 아량입니다. 이는 용서하는 마음, 즉 일상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아량의 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정말 기쁨니다" 이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는 하나 된 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이는 배우자의 행위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고 세상입니다. 다 아는 것처럼...쉽게 납득이 안 간다고 '안 된다'고 잘라 말하는 자세는 지양해야 하겠습니다.

"훌륭합니다" 이는 칭찬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곧잘 칭찬을 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는 칭찬에 매우 인색한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적어도 하루에 한번씩은 칭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칭찬과 격려의 말 한 마디에 행복의 신비가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고백은 축복입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하십시오. 가정의 행복은 사랑의 고백으로 서로를 세워주는데 있습니다. 오늘 가셔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적어도 다섯 분들에게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우리 가정이 사랑의 고백으로 에덴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들 토론 모임에 갔을 때, 결혼과 가정이 주제가 되었어요...그 때 이런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가정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이혼하지 않고 그대로 사는 비결이 뭐냐? 하는 겁니다.
모두 목회자의 가정에 관심이 많으시죠?
이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어요. 그렇지만 항상 마음에 두고 사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 가정에 대한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살면서 이혼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제 아내도 남편인 저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저도 제 아내에게서 상처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어요. 내 계획과 의지, 내 뜻으로 살아왔다면 지금의 우리 가정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았냐면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가정을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 은혜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살아온 고비마다, 넘었던 골짜기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고 허덕이던 광야 길을 건널 때마다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멸망과 죄악의 길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 지금 이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송 가운데도 제가 좋아하는 곡 중에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너를 지키시리라 약속했네〉

살아온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희 부부처럼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없습니다. 식성이... 취미나... 같은 것이 별로 없어요....우린 너무 달라요. 전 고기를 좋아하는데 아내는 생선을 좋아하고, 저는 국을 싫어하는데, 아내는 국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같은 것은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죠...
아이들이 어떻게 컸어요? 밥을 먹여서요? 누구는 밥을 안 먹이고 키우나요? 이 만큼 자라 준거지요.
아니 하나님이 키워 주신거지요. 바울의 말처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떠나면 별수 없습니다.

한 동안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머로 회자되었습니다. 그 중에 연령 대 별로 간 큰 남자를 정리해 놓은 것이 있더라구요.
20대 간 큰 남자는 아내에게 밥상 차려오라는 남자랍니다.
30대 간 큰 남자는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 남자랍니다.
40대 간 큰 남자는 외간남자가 아내를 전화로 찾을 때 누구냐고 묻는 남자랍니다.
50대 간 큰 남자는 몇 시에 들어올 거냐고 묻는 남자랍니다.
그리고 60대 간 큰 남자는 아내가 외출할 때 따라가도 되느냐고 묻는 남자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웃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힘이 더 센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가정이 잘 사는 것은 누구 하나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노력해서 우리 가정이 이만큼 됐다.’, ‘내가 이만큼 해서 그래도 자리를 잡은 거야.’ 이렇게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교만마귀가 역사를 하고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은혜로 살아갑니까? 내 노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나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요 가정이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은혜! 이것이 가정에 주신 세 번째 축복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명이 짧아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무식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사랑의 고백이, 칭찬과 격려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사모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에덴동산으로 만드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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