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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1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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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삶 속에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또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우리는 한숨을 쉴 때도 있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으며, 또 때로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은 마치 기쁨 대신에 슬픔과 괴로움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 보다는 절망이, 감사 보다는 근심과 염려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볼 때에는 별로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걱정과 근심의 단계를 넘어서 아예 자포자기 상태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를 이을 자식, 즉 아들이 없다는 것은 생명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갖는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마 매우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좋다는 약은 다 먹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들이 다 헛수고였습니다.

  사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감격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여지껏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 아마 이 말을 수백 번도 더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자의 특징도 사라졌습니다. 아기를 갖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쉽게 포기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희망마저 버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숨이 막히는 시각, 낮잠이라도 좀 자려는데 그 뜨거운 열기를 뚫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숨 쉬기도 힘든데 어디를 저렇게 바쁘게들 가고 있을까?’ 잠시 쉬면서 요기라도 하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아브라함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그네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길 가는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늘 강조해왔습니다. 때문에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집으로 모셔들였습니다.

  지친 나그네를 모셔들여 대접을 하다 보면 자신이 경험했던 나그네 생활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 힘들고 또 불안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인도하셨던 은혜가 늘 새롭게 떠오르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대접한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대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향을 떠나던 때 일이 생각났을지도 모릅니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이리저리 방황하던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릅니다. 지친 모습으로 길을 재촉하던 그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고 아주 만족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브라함 자신이 더 기뻤을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그는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행복한 삶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는 일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신나는 일이 없으면 신나는 일을 만들려고 노력하죠... 많은 사람들이 남이 맞춰 둔 행복 채널에 자기 채널을 맞추고 살지만 나중에 이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죠...” 아브라함은 비록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성어린 대접을 받고 난 후 갑자기 그들 가운데 한 분이 사라를 찾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사라의 이름을 알았을까?’ 범상치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우레처럼 들려오는 그 분의 확신에 찬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숨이 멎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씀인가?’ 아직까지 한 번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내년 이맘때 ... 아들이 있으리라!”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마음 속에 밀려오는 하나의 작은 속삭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을까? 지금 내 나이가 얼만데... 또 아내는 생리가 그친지도 오랜데... 조금만 빨리 오시지...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된 지금 무얼 어쩌자고 이런 말씀을 하실까?’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서 흔들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 분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꼬부랑 할머니가 다 되었는데 아기를 갖는다고? 포기한 지 오랜데 뒤늦게 내가 지금 아기를 낳는다고? 이건 사람을 놀리는 말이지... 지친 나그네를 잘 대접했으면 그냥 덕담이나 하고 가지 이렇게 사람을 놀리면 되는가?’ 사라는 장막 뒤에서 듣고 있다가 그냥 혼자서 웃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사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과연 사라는 아기를 갖게 되었고 그 아기를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나이에 아기를 갖게 하시다니, 그토록 긴 기다림 후에 아기를 주시다니...’ 하나님께서 갖게 하신 아기 때문에 사라는 이제 진짜로 웃게 되었습니다.(창 21:6 참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라는 크게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삭에게서 선민 이스라엘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글래디스 아이월드는 1902년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4세 때부터 어느 부잣집의 가정부로 일하며 겨우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공급받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가정부의 일은 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임금도 아주 적었습니다. 단조로운 가정부 생활 가운데 그녀의 유일한 낙은 공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20세가 되어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후 공상이 아닌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기에는 그녀의 자질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공부에 재능이 없어서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중국내지선교회에 지원했지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푼푼히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마침내 중국으로 갔습니다. 침낭, 옷가방 두 개, 냄비와 곤로, 프라이팬을 들고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환영하는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노새 몰이꾼들을 위한 여관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된 일과 적은 보상,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점점 더 잘 하게 되었습니다. 노새 몰이꾼들을 대하면서 중국어를 배웠고 중일 전쟁이 벌어지자 그녀는 입양한 100여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태국 국경으로 넘어와 피하기도 했습니다.

  20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역에 대한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잉글릿드 버그만이 주연을 맡았던 “여섯 번째 행복의 여관”이 그 영화이고 그 영화 시사회에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초청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택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는 훌륭한 남자였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교육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했는지... 다만 하나님께서는 저 아래를 내려다보시다가 작고 보잘것 없는 이 글래디스 아이월드를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상식과 기대를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진짜 웃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지 못해서 사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진짜 크게 웃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개그맨들조차 웃음이 아니라 씁쓸함을 안겨 주는 비틀린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웃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크게 웃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던 노부부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크게 웃을 수 있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왜 오늘 우리의 삶에, 아니 나의 삶에 웃음을 선물로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복과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마침내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온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크게 웃게 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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