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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의 시작 (삼상 20:3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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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다윗이 진리를 선언한다.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가장 분명한 현실이다. 그것은 죽음과 나 자신의 간격이 아주 가깝다는 것이다. 그 사이는 한 걸음뿐이다. 이 한 걸음이 어떤 이에게는 긴 세월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실제로 죽음을 마지한 사람은 누구나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았던 것을 절감한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가? 아침에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안개가 아닌가?

죽음이 언제 닥칠지 사람들은 모른다. 아무런 죽음의 징조가 보이지 않아도 죽음은 언제나 바로 앞에 있다. 롯이 소돔을 떠나던 날 재난이 쏟아지리라고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태양은 힘차게 솟아 올랐고 여느 때와 똑같이 상쾌하고 활기가 넘치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들기 시작할 때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렸다.

이내 도시 전체는 죽음이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일들은 현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지진과 홍수로 수십만명씩 떼죽음을 당했다. 며칠 전만 해도 인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러나 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삽시간에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죽음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예수 당시의 왕 헤롯은 풍채가 좋았다. 그는 고관들과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연설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금의를 걸치고 있었다. 태양이 찬란하게 그를 비출 때 그의 위용은 차라리 신의 모습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감탄했다. "살아있는 신이로다!" 바로 그 순간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쓰러져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다가 온다. 그러므로 우리와 죽음과의 간격은 오직 한 걸음뿐이라는 사실이다. 인생들을 잠시면 영원한 세계로 몰아넣는 때는 아주 신속한 한 걸음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서운 죽음의 얼굴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가? 힌두교에서는 죽음의 신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묘사한다. 이 징그러운 신을 그 누가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가?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다 그쳐지고 그저 내 존재가 세상에서 안보이는 것으로 다인가?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고 육체가 썩어 흙이 되고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육체를 벗고 나면 나는 이제 더 큰 세상으로 들어간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을 벗어나오는 것과 같다.

뱃속에서 잘못된 아이라면 세상에 나오고 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요즈음에 약물을 잘못쓰거나 술 담배 또는 마약의 결과로 기형아들이 종종 나타난다. 이 아이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뻔 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그러기에 정상적인 아이라 하더라도 태교를 시킨다고 부모들이 대단한 신경을 써서 열달을 보낸다.

세상은 각자가 신경을 써서 한 평생을 보내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정상아가 더 많다. 하지만 영원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아이들은 비정상아들이 훨씬 많은 비율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라. 자기의 영혼에 양식을 제대로 공급을 해 왔던가? 아니 자기 속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굶주려 죽어가는 애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미국의 한 의사가 "죽음 뒤의 삶"이란 작은 책을 썼다. 이 책은 수백만부를 파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것은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선언된 사람이 몇 분 후 또는 몇 십분 뒤에 회생한 경우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위에서 자기의 죽은 몸을 바라본다. 의사들이 자기를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본다.

그리고는 과거를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고 계속 위로 올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빛나는 저편으로 가다가 결국 되돌아온다는 내용이 공통적이다. 여기에서 이 의사는 인간의 영혼과 죽음 뒤에도 또 다른 생이 있음을 증언들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명의 소생된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 이후에 삶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미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죽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해당될 내용이다. 마치 주인이 돼지를 키우는 것과 같다. 가까운 곳에 죽음이 우리를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덮치고 만다. 죽음은 누구나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빛나는 저편에서 일어날 이야기를 보여준다.

성경의 예언은 한 가지도 그대로 되지 않은게 없다. 성경은 우리가 장차 당할 일들을 명확하게 가르쳐주며 경고한다. 죽음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당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덧붙여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맞아야할 일이 있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처럼 모두에게 확실한 것, 그것은 심판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행위를 심판 받는 것이다.

성경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외치고 있다. 그 심판은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영원을 무서운 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인간을 겁주기 위해서 쓰여진게 아니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계시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무슨 수를 내서라도 심판을 면하고 지옥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심판은 성경에만 보여주는게 아니다. 사람들의 당하는 사고와 고통스러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무서운 병에 든 사람들이 특별히 죄를 더 많이 지은게 아니다. 여러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옥의 그림자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잠시 당하는 그림자 같은 고통에 놀라며서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서운 지옥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전쟁이다. 전쟁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전쟁 이상으로 절대로 피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옥이다. 며칠 전에 사우나탕에 들어갔다. 처음에 견딜만 했다. 그러나 5분이 지나고 7분쯤 지나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지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지옥은 목욕탕이 아니다. 그곳은 저주와 공포의 장소다.

지옥에 떨어지면 다시 나올 수 없다. 죽을 수도 없다. 성경에는 지옥에 떨어진 어떤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붉은 옷을 입고 세상에서 거들럭 거렸다. 그러나 그는 죽어 지옥에 떨어졌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묻는다. "내가 여기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백년입니까? 천년입니까?" 대답이 들린다. "너는 거기 백년, 천년 있는게 아니다. 영원히 영원히 있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즉 세상에 사는 것이 기회라는 사실이다. 죽음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는 죽은 뒤의 세상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죽음 뒤의 삶을 준비하는 것과 이 세상을 잘 사는 것과는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다음 세상과 이 세상의 주인이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 세상을 함께 지배하신다.

지금이 기회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회이요 그 생명을 현 세상에서도 사용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세상은 다음 세상과 연결된다. 이 세상을 마칠 때 다음 세상으로 이어진다. 어거스틴은 죽으며 다음 세상을 보았다. "영광스럽구나. 영광스럽구나."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요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이렇게 영원한 세상으로 이어지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없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마치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심판이요 그 심판의 결과는 지옥이다. 심판을 피할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 나라 왕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은 단 한 가지 방법, 다시 태어나는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우선 할 일이 이것이다.

그 방법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고 했다.

이렇게 된다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는 말씀대로 된다. 즉 하나님 아들의 영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는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말은 세상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

여기 인간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디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의 이야기다. 어떤 나이 든 사람이 회중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60년동안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를 귀울였다. "내가 60년 동안 배운 것을 단 3분 동안에 설명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저처럼 60년을 헤매지 말고 간단히 배우고 신나게 사십시오."

"첫째, 사람은 자신을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선행하고 마음을 착하게 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옥을 면케 해주기 위해서 아무 것도 요구하는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을 나는 평생 걸려서야 배웠습니다. 내 가진 것으로 천국을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셋째, 가장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 스스로가 사람이 되셔서 내 구원을 위한 모든 일을 완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옥갈 댓가도 지불해주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가 행하신 것을 감사히 받아 누리는 것뿐입니다. 친구들이여,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즉시 그것을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스스로 확인해 보라. 죽음과 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언제 그것이 나에게 덮칠지 모른다. 오분 후인지도 모른다. 빨리 구원을 받아들이라. 지금부터 영원한 삶을 시작하라. 구원은 살아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임으로 시작된다. 그를 의지하고 삶으로 경험된다. 힘차게 기쁨으로 살라.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선행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이 주어졌고 심판이 면제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우리 속에 있음을 믿기에 선행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그 나라를 위해서 봉사한다. 그 나라에서 누릴 축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기도 하다.

가끔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좀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 꽃도 심고 나무도 가꾸고 싶다." 나는 대답한다. "내가 기껏 살아야 이삼십년 더 사는데 이미 살아 버린 시간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시간도 하루 밤 같은데 앞으로 남은 시간이야 더할 것 아닌가? 그러니 너무 불편하지 않으면 그냥 살자." 귀찮아서가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언제나 구원받은 사람임을 확인하자. 그리고 좀 더 영원한 계획을 세우면서 살자. 그렇다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권능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언제든지 세상의 죽음을 마지할 준비를 하자. 가까운 곳에 있는 죽음이 언제라도 덤벼들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도약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한 위대한 삶을 볼 것이다.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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