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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을 전하는 사람 (창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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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일들이 엄청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시면 반드시 하십니다.
아들이 무서워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는 “하겠다.” 하면 반드시 하시는 분입니다.
아이들은 손님 오면 더욱 난잡합니다. 부모님들이 야단쳐도 막무가내입니다. 부모님이 “너 이따가 혼내 준다.” 그러나 손님이 가면 그만입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얌전하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손님만 오면 요란합니다.
그러나 “너 이따가 혼내준다.” 그리곤 손님이 가신 뒤에 분명히 혼내 주면, 아이들은 언제든지 부모의 말을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은 “하시겠다.” 하시면 분명하게 하십니다. “따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랬는데 아담과 하와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녕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오라. 내가 너희 죄를 사해 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분은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이고, 그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이 없는 분이시니까.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어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 합니다. 믿음이란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공동번역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그런데 이 보증과 확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바라는 것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보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진장 많은 것을 바랍니다. 그런다고 그 바라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나? 아닙니다. 우리의 바람은 요망사항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믿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 “하나님 금년에 집을 한 채 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다고 집을 한 채 사게 되나?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그러면 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8장에 “네가 내 말에 순종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을 보증하고 확증시켜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큰 문제는 분명 믿음은 있지만 이 보증되고 확증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어떤 약속 어떤 말씀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냥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자기 것만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은 사람입니다. “홍수가 난다. 방주를 만들어라.”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의 별 같이 땅의 티끌 같이 후손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약속하신 아들 번제로 바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니, 이 아들로 후손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곤 이제는 번제로 드리라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별 같이, 땅의 티끌 같이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장에서 하나님은 “십일조 빼 먹지 말고 온전히 드려라. 그러면 네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실까? 안 하실까?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신다면 하시는 분이니까. 십일조를 온전히 드려 보세요.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 주실 테니……. 그래서 말라기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나 안 되나 시험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 생각, “온전히 하면 복 주시고 안 하면 안 주시나 보다.” 물론, 온전히 하면 약속대로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러나 온전히 안 하면 복 안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책망 받습니다. 말라기 3:8,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 받을 것들아!” 하나님께 그렇게 야단을 치십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라.” 그래서 그 결과. 방주를 지으면(말씀에 순종해서) 살고, 방주를 안 지으면 그만이냐? 아닙니다. 방주를 짓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 “아니오!”만 있습니다. “예!” 하면 살고, “아니오!”하면 죽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 예수 믿으면 영생, 안 믿으면 멸망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살기 위해 예수 믿겠느냐? “아니면, 안 믿고 그냥 죽겠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그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방주가 다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짐승들 한 쌍씩 배에 다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셨고,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홍수 난 것 보셨지요? 그 정도만 되어도 아우성입니다. 물이 방안에 들어 왔다고 물 퍼내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는 집을 덮고, 산을 덮고, 가장 높은 산을 덥고도 십오 규빗(약 7m) 더 높이 차올랐습니다. 물 퍼내겠어요? 아우성치겠어요? 다 죽었잖아요.
7:21, “새나 집짐승이나 들짐승이나 땅 위를 기던 벌레나 사람 등 땅 위에서 움직이던 모든 생물이 숨지고 말았다.”
22절, “마른 땅 위에서 코로 숨 쉬게 살던 것들이 다 죽고 말았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비가 내렸습니다. 물이 차오른 지 150일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줄어들기 시작한 150일이 되던 날, 방주는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곤 점점 물이 줄어들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십일이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내니 까마귀는 땅에서 물이 마르기까지 이리저지 날아다녔습니다. 이번에는 비둘기 한 마리를 내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발을 붙이고 앉는 곳을 찾아보다가 그냥 돌아 왔습니다. 일주일 뒤, 노아는 또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비둘기는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그 입에 금방 딴 감람나무 이파리를 물고 왔습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일주일 뒤 또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에 시작된 홍수가 노아 육백일 세 되던 해 정월에 끝나고, 노아는 방주의 문을 열고 땅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전 여기서 노아의 대단한 믿음을 봅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노아의 방주는 물위에 홀로 떠 있는 것입니다. 위로해 줄 친구 하나 없고, 위안과 충고 해줄 이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만약 쏟아지는 폭우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겁이 났겠는가? 만약 방주가 잘 지어져도 비 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 긴 시간, 긴 나날을 노아는 흔들리는 방주에 그냥 자신의 전 삶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제 경우 기도하면 물 흐르듯이 그냥 맡깁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키는 그분 주님께서 잡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진주 왔을 때, 주변의 목회자들이 삼남연회 진주지방이 뭐가 좋아서 또 왔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나쁠 것도 없고, 못 올 것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키는 그분이 잡고 계십니다. 그 분이 키를 움직이는 대로 내 인생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난 언제나 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바로 그곳이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삶의 키를 스스로 잡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마구 키를 돌립니다. 다행히 잘 되면 자기 머리 좋은 것을 자랑하고, 만약 안 되면(대부분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키를 잡으면 실패가 많은데) 그럴 때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키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노를 젓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를 저으셨고 하나님께서 키를 잡고 계셨습니다. 노아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노아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주에서 답답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여러분들 중에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덜커덩” 배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생겼어요. “이제 땅에 닿았구나.” 그럴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얼른 나가 문을 열어 보지 않겠어요? 그런데 노아는 일곱 달이나 더 그 방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군대 생활하신 분의 경험. 2년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1달, 1주간, 마지막 하루는 정말 힘듭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유혹 받는 때가 언제인가? “이제 다 되었구나!” 싶을 때입니다.
우리가 자만심에 빠지거나 주의를 게을리 할 때, 실제적인 의무들이 소홀히 되는 때 또는 매우 위험 할 정도로 영적인 게으름을 피울 때가 언제인가? 그때는 바로 쉴만한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그때입니다. 이제 다 왔구나 싶을 때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실패(목회도 마찬가지)는 빨리 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답답해하거나 조급해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 되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2-15에,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며 나의 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 쓸 때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 인생의 끝이 다가온 것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감옥 속에 갇혀서 이제 할 일도 없습니다. 사실 그는 그동안 할 만큼 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 앞에 서서는 떳떳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니다. 난 아직도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도바울 “나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구약의 사울 왕, 그 유명한 다윗, 솔로몬 그들은 모두가 좀 되었다 싶을 때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넘어질까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소심한 생각으로 살라는 것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철저하게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이때다.”하는 판단은 누가합니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누가 방주의 문을 닫았는가? 하나님께서 닫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방주의 문을 열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여십니다.
그럼 기다려야지요.
아라랏 산. 그 불안한 장소에 얹혀진 방주에서도 노아는 평안히 기다렸는데, 하물며 만세 반석이신 예수 안에 인생의 닻을 내린 우리들이 뭐 그리 급하고 초조하고 답답해합니까?

때가 되어서 노아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당장 뛰어 내리고 싶었지만 노아는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까마귀와 비둘기. 그냥 날 짐승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도 성서의 기록 의미를 찾아봅니다.
까마귀. 역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낸 자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 본성에 따라 떠나고 말았습니다. 까마귀는 노아가 날려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말랐는가 날아보려고. 그런데 까마귀는 그 의도를 생각지도 않고 자기 본성에 따라 땅위의 죽은 고기에 더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도, 이와 같이 1회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에 더 관심 그래서 하나님은 한번 밖에 사용 하시지 않으십니다.
비둘기. 보낸 자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쓰임을 받습니다.
그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 그것은 곧 노아와 그 식구에게 주는 새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땅에도 새싹이 돋아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땅에도 생명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방주에서 내려와도 된다는 하나님의 허락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은 비둘기 같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입에 희망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입에 생명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들을 물어다 날라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까지고 방주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닙니다. 방주 안에서 구원 받았다면 이제는 방주에서 나가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다면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구주라고 시인하는 성령 받은 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에서 임하시며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권능을 받고” 무슨 굉장한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이루셨다는 믿음이 곧 권능인 것입니다.
병자 고쳐야 권능 아닙니다. 만약 병자 고치는 것이 권능이라면, 그것이 성령의 임재라면, 병든 자는 구원 못 받았다는 결론이 됩니다. 권능은 예수 믿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니까요. 예수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병들면 어떻습니까? 또 죽으면 어떻습니까?
살아서 저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
그 구원을 또한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희망의 잎사귀 생명의 잎사귀를 물어 절망과 죽음에 있는 자들에게 날라다 주는 여러분 되십시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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