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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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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국에서 아버지 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느 큰 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시던 선배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토요일인데,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준비를 하시지 않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하시더랍니다. 옆에서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말씀을 드렸답니다. “목사님, 내일 주일인데...” 그랬더니 담임 목사님 왈, “내일 주일인데, 뭐?” “내일 주일인데, 목사님 설교 준비 안 하시고, 다른 일만 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 말을 들으시고 결국 담임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젊은 부목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말씀이 되었답니다. “이봐, 김 목사. 김 목사가 김 목사의 아버지를 누구에게 소개한다고 가정해 봐. 그냥 아버지에 대해 아는 대로 잘 소개하면 되는 것 아니야? 주일날 설교라는 것이 결국 아버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인데, 평소에 아버지에 대해 느끼고 아는 대로 소개하듯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하시더랍니다. 이런 말을 듣고 집에 와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과연 그렇더라는 겁니다. 공연히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이상한 아버지로 둔갑시키지나 않는지 목사로서 반성도 되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상(像, Image)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 친구 중에 어떤 친구는 교회는 다니지만, 어렸을 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에 심한 저항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표현하는 거기에서 육신의 친 아버지가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하나님의 이미지(image)가 겹치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면, 나는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말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묘사하는 것에 상당한 저항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가를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버지”라는 말에는 어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가 투영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 모습의 궁극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기독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말이 되겠지요.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는 선교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저 글자에 머무르지 않고, 육신의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약 5년 전, 한국의 어느 소설가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소설로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가시고기”입니다. 백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어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아빠의 이야기를 그린 내용의 소설입니다. 민물고기 중에 “가시고기(Pungitius Sinensis Sinensis, Guichenot)”라는 이름의 고기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몸에 뾰족한 가시 같은 것이 있어서 이름이 가시고기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고기는 이러한 외적인 모습 말고도 그 습성에 있어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 가시고기를 소설 속에 나오는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목소리로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이상한 물고기입니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들을 낳은 후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려요. 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요.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돌보죠. 알들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답니다.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알들을 보호해요. 알들이 깨어나고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리고 새끼 가시고기들은 아빠 가시고기를 버리고 제 갈 길로 가버리죠. 새끼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아빠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려요. 아빠 가시고기는 왜 죽어버리는 걸까요. 그 이유가 책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요? 가시고기는 언제나 아빠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백혈병이라는 불치에 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애쓰다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눈의 각막을 팔고, 골수를 이식해 줄 사람을 만나 아들의 병은 고치지만, 결국 본인은 암에 걸려 죽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작자는 이 이야기의 소재를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친구를 보고 얻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어느 날인가 딱 한번 친구는 말했습니다. ‘내 희망이 뭔지 알아?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어. 그게 참 견디기 힘들다.’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어. 그게 참 견디기 힘들다?’한 친구의 그 말이 이 소설에 매달리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바로 이러한 가시고기와 같다는 취지에서 이 작품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이란 자녀를 위해서 끊임없이 그 뭔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자녀들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까 예를 든, 저의 친구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만,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가 꽤 많은 듯싶습니다. 실망의 정도를 넘어서서 분노의 지경까지 도달한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미국 장로교 한인교회 총회에서 한국의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관계하고 있는 포항의 한동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라는 설교를 하는데, 학생들 중에 소리를 내면서까지 울며 기도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음에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 남들에게는 말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은 아버지로서 비쳐지는 현실적인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싶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라고 하는 존재는 은연 중, 하나님을 투영하는 존재로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서 알고 믿게 되는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다고 우리는 받아들입니다만, 사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몇의 예언자를 통해서 그것도 아주 적게 “아버지”로서 소개될 뿐입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임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해서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의 아주 귀하고 필수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의 목숨을 내 놓고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습으로, 그리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란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나 모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서처럼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습으로 투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저희 부모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시고, 교회에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신학대학 시절, 한번은 인간관계훈련이라는 클래스에서 자기를 소개하며 기도제목을 나누는 그러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정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인데, “장차 가정을 이루고 나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나 모습이 무엇이냐?”라는 공동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온 가족이 주일에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이 내가 제일 바라는 것”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느 학생이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정말 그게 그렇게 바라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이 학생은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가 군대에 다녀와서 3학년에 복학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사정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이 학생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이 학생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이 학생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나보다 2~3살 많았던 학생입니다. 이 학생은 자기가 솔직히 말하는데, 자기는 자기의 아버지가 위선자 같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서울의 중심가의 유명한 교회의 수석장로였습니다. 교회적으로 꽤 유명한 분이었기에, 노회에서 주는 공로상 같은 것도 많이 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고백하는 자기의 아버지는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신앙적으로 더 삐뚤어 나가게 되었고, 결국 다른 길로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강제로 이 신학대학에 입학시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다닌다고 하면서 자기는 졸업만하고 목사가 되는 코스인 신학대학원에는 진학을 안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연결되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믿는 그 모습이 우리들의 현실의 삶에도 이어져서, 우리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게 하게하는 그러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그러한 아버지 상(Image)과 마음을 우리의 모든 삶에서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아버지 상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지만, 특히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임을 증거 해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궁극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라는 표현과 “아끼지 아니하셨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란 존재의 그 내용을 볼 수 있고, “아끼지 아니하셨다”라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32절의 말씀은 바로 31절의 말씀에서 그 의미와 의도가 나타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즉, 이러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바로 자녀를 위하는 바로 그 마음에서 비롯된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너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고 “~을 위해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을 위한다”는 표현에는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하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러한 모습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간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궁극적인 모습(image)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로서 지녀야 할 모습의 방향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를 두 구절의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합니다. 하나는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또 하나는 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어느 누구도 끊지 못하게 하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귀 권세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갖은 모략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고통으로,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때로는 심한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사건에 휘말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초자연적인 환난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보여주신 그 모습 때문에 이러한 사탄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를 위하여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가정도 아버지가 바로 이러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상,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가정과 자녀들을 보호하고 굳건히 지켜낼 수 있음을 여기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만이 자녀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사랑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아까 소개해 드린 소설 “가시고기”에서 가시고기와 같은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시집을 한권 남깁니다. 그 시집 첫 장에 백혈병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 아들 다움이에게 이런 말을 써 놓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다움이가 되길 바란다. -아빠가-”

오늘 아버지날을 맞이하는 모든 아버지들에게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 상(image)이 꼭 만들어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비된 자로서 그 모델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더욱 그립고 간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도 성령을 가득 부어주시사, 저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아버지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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