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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황금률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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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그 멀고도 힘든 여정이여!>
어떤 아주머니가 이 마트에 가서 돈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내려고 가방을 여는데 보니까 TV 리모트 컨트롤이 있는 겁니다.
캐쉬어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줌마는 리모컨을 항상 들고 다니세요."
"아니요. 오늘 우리 남편이 이 마트에 같이 오자고 했는데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남편에게 골탕 먹일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리모컨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죠." 우리 남편들, 리모컨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루라도 사람을 만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인간관계는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인간관계인데 사람을 다루는 일이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기계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데 사람은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책은 그냥 읽으면 되는 데 사람 마음은 쉽게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오해가 생깁니다.

한문으로 인간이란 말은 사람 '人' 자에 사이 '間' 자가 합해서 생긴 말입니다.
사람 사이, 즉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고부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학교 선후배 관계, 직장 동료관계, 등등
가는 곳마다 수 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요즈음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세상이 참 좁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우리 감리교회 목회자의 경우 아무리 먼 해외에 나가 있다고 할지라도 한 다리만
걸치면 누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좁은 세상 속에서 한 번 관계를
잘못 맺어 놓은 사람은 언젠가 꼭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참 괴롭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절대로 거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정성을 많이 쏟아야 하고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냥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했다가는 인간관계는 금방 깨지고 맙니다.
나는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인데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바보 멍청이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소."
아내가 대답합니다.
"그건 말이에요. 당신이 내게 매력을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저를 아름답게 지으셨기 때문이고요.
내가 바보가 된 것은 당신같은 사람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랍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 그대로가 아닙니까?

가끔 라디오를 들으면 건전한 광고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한석규인가 하는 영화배우가 이런 멘트를 합니다.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아무리 봐도 당신만한 여자가 없어.
누가 당신보고 아줌마라고 그러겠어."
이렇게 긍정적인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친할수록 더 조심해야 하고 정성을 더 많이 쏟아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절대로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내 편에서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어떻습니까?
혹시 누군가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불편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회복하고 더 좋은 관계로 만들어 나갈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런 분들은 오늘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점 황금률>
우리 오늘 봉독한 마 7: 12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을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황금과 같이 귀한 율법이라고 해서 황금률이라는 이름이 부쳐진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황금을 가진 사람이 만든 율법이 황금률이다." 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황금을 가진 분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황금을 가진 예수님께서 만드신 율법이 황금률입니다.

사실, 이 황금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씩 표현만 다를 뿐,
다른 종교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의 황금률은 주로 "∼∼을 하지 말라"고 소극적인 표현을 쓰는데 반하여,
기독교의 황금률은 "∼∼을 하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 황금률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만 있었는데 구약의 양축이 율법서와 선지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핵심을 요약해 놓은 것이 황금률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황금률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마 5-7장에는 저 유명한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빛나는 명언이 수록된 어록이지요.
그런데 이 황금률은 산상수훈이 거의 끝나는 부분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앞부분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이 한 마디에 축약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산상수훈의 중요 교훈을 염두에 둘 때 황금률의 요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화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5: 21-26에서 화해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누군가 원수 맺은 일이 있을 경우,
먼저 화목한 후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을 때 참예배가 될 수 없기에
먼저 화해한 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미워함으로서 그 사람이 절대로
제 인생을 망치도록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먼저 내 영혼을 망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 안에서 화해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영혼이 살 수 있고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주님께 상달(上達)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5: 38-42에서 절대로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출 21: 23-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꼭 해(害) 받은 것만큼 동일한 정도의 해(害)를 상대방에게 끼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정의와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상대방의 차를 파손했을 때,
상대방은 내 집을 파괴하려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집 아이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상대방은 우리 집 아이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동해보복의 율법을 제정해서 과도한 복수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게 끼친 해 만큼의 해만 주어야 옳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분명히 사회정의를 구현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간관계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아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는 식으로 보복을 계속해 왔다면
우리의 눈과 이는 하나도 남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눈 없는 사람들, 이빨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온 몸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만으로 인간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정의보다 상위가치인 사랑이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해보복의 원리를 한 단계 뛰어넘어 무차별적 사랑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네 왼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마 5: 39-42).
모든 보복의 악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두 형제가 싸움을 합니다. 엄마가 싸우지 말라고 꾸짖습니다.
이 때 형이 말합니다.
"내가 동생을 때리면 동생이 나에게 또 반격을 해 오니 어떡하란 말이에요!"
맞받아쳐서 안 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정의를 뛰어 넘어 사랑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내가 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싸움은 종식됩니다. 평화가 찾아옵니다.
모든 보복의 악순환이 끝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5: 43-48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할 때,
세리도 이같이 하기 때문에 아무 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친한 사람에게만 인사를 하면 이방인들도 그리하기 때문에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행 7: 60에 보면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숨졌습니다.
눅 23: 34에 보면 예수님 역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월남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던 선교사님 한 분이 하루 종일 밖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지친 몸으로 아파트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 작은 소파 하나만 남겨둔 채 모조리 훔쳐갔습니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선교사님은 실망으로 가득차
하나님께 볼멘 소리를 해댔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월남이 싫습니다. 월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왔지만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이제 월남사람들이 모조리 싫어졌습니다.
주님, 저를 제발 다른 선교지로 보내주세요!"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월남 사람들을 사랑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월남 사람들을 사랑해서 네가 이 곳에 온 것뿐이란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햇빛과 단비를 주시고 똑같이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자, 그렇다면 황금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 사항인데
어떻게 해야지 만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지 만 황금률을 지킬 수 있습니까?>
첫째로, 황금률의 기본정신은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습니까?
우리가 이웃에게 기대하는 마음 그대로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니셔티브를 내가 먼저 취하라는 것이지요!
남에게 대접을 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인간관계가 절대로 개선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칭찬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부터 사랑하고 나부터 칭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인간관계에 왜 문제가 많습니까?
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납니까?
사랑 받으려고만 하지 먼저 사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 받으려고만 하지 먼저 남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칭찬 받으려고만 하지 먼저 남을 칭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황금률을 들으시고 황금률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부터 먼저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관관계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다음부터 인간에게 원죄가 찾아왔습니다.
원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자기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부닥칠 때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게 닥칠 이해관계부터 계산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원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치고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의 행복, 자신의 명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다 기분이 상합니다.
그것도 제 3자로부터 한 다리 건너 나쁜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우리 자신의 기분은 이다지도 중요한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 앞에 없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이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그 사람 역시 기분이 얼마나 상할까? 나도 똑같은 일을 당하면 기분이 나쁜데
그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른 사람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은 확실히 황금률을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황금률을 실천하기 원하십니까?
'나만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너도주의'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행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기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도 소중함을 늘 피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못된 자아가 꺾여질 때 우리는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마 22: 37-4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에서 순서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수직적으로 하나님 사랑이 선행된 다음에,
수평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부터 먼저 보기 시작하면 황금률은 실천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개인 사이든 나라 사이든 이웃부터 먼저 둘러보면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미국과 북한이 핵무기 문제를 놓고 서로 싸웁니다.
상대방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믿기에 대화가 잘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미국같은 강대국도 티끌같이 작은 나라일 뿐이며,
북한 역시 하나님 앞에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 나라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의 추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기 전에 먼저 우리부터 먼저 고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엄청난 모순덩어리인 우리 자신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면 이웃은 타도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 자매가 됩니다.
더 이상 정죄의 눈이 아니라 은혜의 눈으로 이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고후 5: 16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오늘 여러분이 자아의 무서운 횡포 때문에 황금률을 실천하기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먼저 발견한 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을 보십시오.
우리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도 사랑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이웃까지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향하여>
결론을 맺습니다.
구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1921-1989)가 있습니다.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에 의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브레즈네프는 사하로프를 외국으로 추방해버렸고,
사하로프의 아들 역시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 때 사하로프의 아들을 도와준 사람이 브레즈네프의 손자였습니다.
직장도 잃어버리고 생계가 막연해졌을 때 자기 할아버지의 원수인
사하로프의 아들을 돌봐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1989년에 역전이 되었습니다.
공산 정권이 몰락했을 때 브레즈네프의 손자 역시 숙청을 당했고 직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사하로프 가문은 복권이 되어서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하로프의 아들이 예전에 자기를 도와 준 은혜를 잊지 않고
브레즈네프의 손자를 챙겨주었습니다.

인간관계는 돌고 돕니다.
국가간의 외교관계가 그렇듯이 영원한 원수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사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언제가 우리의 형편이 바꾸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아름다운 기억을 남길 수 있는 복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금언(金言)이 황금률입니다.
황금과 같이 보배로운 말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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