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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낫게 한 그 사람 (요 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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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미국을 다녀올 때마다 인천공항에서 근무하시는 최 모 집사님의 고마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 분을 알게 되었다는 그 연분 하나 때문에 저는 그 공항에서 출입국할 때마다 문자 그대로 VIP 대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인천공항에 있는 아무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한 지위와 힘이 있고 또 그런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을 알아야 그런 해택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잘 만나고 사귀게 되어도 그처럼 덕을 톡톡히 보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과 만나게 된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점에서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에 누워 있던 인생이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된 순간부터 일약 최고의 ‘행운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삼십 팔 년 동안 병자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이란 분을 만나고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어떻게 그 인생이 완전 딴판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쟁사회에서 행운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게 됨으로써 인생 문제 해결받는 것이 진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어느 명절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에 “양문”이라고 번역된 말은 ‘양을 매매하는 시장 곁의 문’을 뜻할 수도 있고, 혹은 그 단어 자체가 “양의 연못”(Sheep Pond)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이 사건은 그 곁에 있던 “베데스다라 하는 못” 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베데스다”라는 이름에 대해도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는 “행각” 즉 ‘지붕이 있는 정자’들이 다섯 개 둘러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종 “많은 병자”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절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動)하게 하는데 그때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상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왜냐하면 천사가 연못물을 잠시 출렁거려 놓고 선착순으로 병 치료되게 해 준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 비슷한 예나 어떤 근거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런 ‘로또 당첨식’으로 신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은 기독교 일반교리나 상식에도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요한이 어떤 ‘실제로 벌어지고 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못가에 있던 ‘병자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연못물이 가끔 동한 것은 그것이 지하온천으로 연결된 간헐천 같은 것이었다든지 아니면 지하수로와 연결되어서 무슨 공기방울 같은 것이 올라왔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어떤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그리고 드물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천사가 물을 동했다고 생각했으며 그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은 낫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반응 동작이 재빠르기 위해서는 거기에 모인 병자들 중에서는 원래부터 건강한 사람 축에 들어갔을 것이니, 그 치유의 효과라는 것도 사실상 별것 아니었을 가망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면 그 물의 동함 자체도 지극히 불규칙적이며 희귀할 뿐 아니라, 그 순간 제일 먼저 들어간다고 해서 어떤 병이든지 즉시 치유된다는 보장도 실상 없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렇게 전해지고 그렇게 믿고들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 많은 병자들은 그 바늘구멍과 같은 희망을 붙잡고 그 못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적적인 신유를 믿고 그것 하나에 모든 인생 다 걸어놓고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확률이 지극히 적은 막연한 기적, 실로 미신적인 기적, 속된 표현으로 정말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 하나만이 우연히 걸릴 수 있는 그 기회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5절 이하 9하반절까지의 말씀에 “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처절하고도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삼십 팔년 된 병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의 병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 스스로 못에 들어갈 힘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3절의 “혈기 마른 자” 즉 마비증세로 수족이 오그라든 자나 중풍병자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병이 38년이나 지속되고 있었으니 이미 치유의 소망이 전무한 상태였으며, 그런 몸 가지고서는 그 ‘연못 뛰어들기 경쟁’에서 다른 병자들과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던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낱보다도 더 가느다란 가망성을 희망이라고 붙들고서 못가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참한 인생이 한순간에 180도 확 바뀌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찾아오셔서 그의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그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신 때였습니다.
  여기 ‘보시고 아셨다’는 말은 어떤 사실을 지각 작용에 의하여 판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전지성이 작동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물론 그 병자가 낫기를 원할 것은 뻔한 일인데도 그렇게 질문하신 것은, 그의 치유 의지를 일깨우고 주님을 의지해 보려는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병자는 자기의 절망적인 현실을 토로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자기가 필사적으로 연못을 향해 기어가도 자기보다 건강한 병자의 속도에는 도무지 경쟁 자체가 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 못가에는 중환자를 위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이 철저하게 이기적인 투쟁만 있었고, 그 병자는 그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제일 꼴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선언해 주시는 순간 그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효과가 있는, 기적적이면서도 완벽한 치유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38년 동안 경쟁에서 패배하는 쓴맛만 보면서 절망의 연속 가운데서만 살고 있던 그 만년 꼴찌 인생이,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신 그 한 순간에 그 베데스다 못가를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병자들을 단숨에 다 제쳐버리고 일약 일등 인생으로 도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연못에 먼저 뛰어들기’ 경쟁이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은 남을 눌러야 자기가 올라설 수 있다는 비정하기 짝이 없는 원칙, 남을 희생시킴으로써 자기가 더 호의호식할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철칙으로 통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남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 살려고, 자기만 잘 되려고 서로 밀치고 싸우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경쟁만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일등을 한다는 것은, 불신자들의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운수대통’한 인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그 낮고 희박하기 짝이 없는 성공 확률에 자기의 전 인생을 걸어놓고 살아갑니다.
  자기 사업에 일확천금의 행운이 떨어지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큰 맘 먹고 떼어 복권 몇 장 사고서는 그것 당첨되는 꿈을 꾸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될 확률보다 벼락에 맞을 확률이 서너 배 더 높다는 것 아십니까?
  다시 말하자면 로또 당첨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은 벼락 두세 번 쯤 맞고도 안 죽어야 그 상금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런 희박하기 짝이 없는 ‘운수대통’하기를 평생토록 기다리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끝내 병자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행복은 그런 로또 당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평생토록 자기 운 없음만을 한탄하며 이를 갈다가 죽었을 우리에게 예수님 편에서 먼저 찾아와 주심으로써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진짜 인생역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당신의 전지(全知)로써 우리의 모든 형편을 이미 모두 ‘보시고 알아주시며’, 그 어떤 인생문제이든지 간에 ‘일어나 걸어가라’고 한 순간에 깨끗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全能)의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운수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그냥 ‘예수님 만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행복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이겨내고 내가 더 잘 사는 것이 행운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모든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 받는 사람이 진짜 복덩어리 인생인 것입니다.
  막연한 ‘재수’만을 학수고대하다가 결국 바로 자기 누워 있는 ‘병상’에서 끝나고 마는 꼴찌 인생이 되지 말고,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전지’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인생고를 해결해 주시는 ‘전능’의 도우심으로 찾아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남은 생애를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최고로 행복하게 영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의 지식만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써 자기 죄 문제를 깨닫는 것이 진짜 잘 믿는 사람입니다.

  9하반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에 기록하기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는데,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란 일반적인 유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제사장들 그리고 그의 추종 세력들을 가리키는 말로 요한복음에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확대해석한 수많은 법조문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 잘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39가지 조문으로 규정해 놓았는데, 물론 그 조문들을 적용시키는 방법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안식일에는 샌들을 한 짝만 신고 다니지 못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한 짝을 겉옷 속에 넣어서 운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신을 신는 것은 괜찮지만 들고 다니는 것은 ‘일을 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은, 그런 경우 다른 쪽 발에 상처가 있어서 샌들을 신지 않고 있을 때에는 그런 의구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리”라는 것은 얇은 매트리스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침상 대용으로 쓰던, 일종의 ‘휴대용 잠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대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인데” 어떤 사람이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여지없는 ‘중노동’이며 “옳지 아니한” 즉 범법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쁨에 넘쳐 집으로 가고 있던 그 사람은 갑자기 ‘높은 사람’들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나를 낫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재차 질문했습니다.
  이들이 “너를 낫게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38년 동안 불치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되어서 나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너로 하여금 안식일에 노동하는 죄를 짓게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그들은 기적에서 빛을 찾기보다는 안식일에서 어두움을 찾으려 했다.”라고 주석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 병 나은 사람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즉 공생애 초기 기간 중에는 메시아에 대하여 잘못 기대하고 있는 대중들을 부채질하지 않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에 그 병 나은 사람에게만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오십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병자를 고쳐 주셨던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일부러 그 병 나은 사람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내용의 말씀이 보통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번의 사건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앞의 문맥을 보아서도 그 병자에게 그런 믿음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그냥 주님의 자비하신 마음으로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육신의 병 고침 받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시고 믿게 만드는 순서를 절대로 빼놓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 나은 사람이 이번에 두 번째로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 사람은 “자기를 고친 이”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그처럼 병 나은 사람에게 당신을 알려 주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가 나았으니”라는 말씀은,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그의 육신의 병을 고쳐 주셨던 근본적인 목적을 가르쳐 주시려 함을 뜻합니다.
  모든 병이 다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요9:3).
  하지만 때로는 죄의 결과로 병이 생길 수도 있으며 이 병자의 경우도 거기에 해당되었을 가망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미 그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틀림없는 것은 그를 치유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여기 “더 심한 것”이란 ‘더 나쁜 것’이란 뜻인데, 이것은 더 큰 병이라기보다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불치병보다 더 무섭고 나쁜 영원한 저주, 그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육신의 장애에서 벗어났다고 네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네 영혼이 병들어 지옥 권세에 메이지 아니하고 구원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만나셨던 것입니다.

  성경 지식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남의 죄 잘 찾아내는 것을 신자의 주특기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잘 믿는 신자도 아니고 제대로 믿는 신자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 한 절 앞에서도 자기 죄를 잘 찾아내고 자기 죄를 잘 회개하고 자기 죄를 미리 막을 줄 아는 것이 진짜 잘 믿는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죄’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먼저, 혹은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시키는 나쁜 버릇을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워렌 캔들러(Warren Candler)라는 감독이 어느 주일에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가지고 죄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 중에 그는 “요즘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한다고 당장 죽이지는 않으십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제가 지금쯤 어디에 있었을 것 같습니까?”라고 하자, 교인들이 다 웃었습니다.
  교인들은 지금 감독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서 ‘나도 거짓말 죄 흔히 짓는 사람이니 이미 죽어서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감독은 웃음이 멈추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정색을 하고는 “저는 바로 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빈 예배당에서 설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뒷말을 이었습니다.
  ‘당신네들 모두도 다 거짓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니 다 죽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서, 그 감독은 죄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키지 아니하는 교인들의 악습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죄는 실로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나쁜 것보다 ‘더 심한 것’을 우리의 영혼에, 그리고 우리의 내세에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은 다른 사람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저주를 가져다 줄 죄가 바로 지금 내 머릿속에서, 내 생활 속에서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을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더 심한 것’ 즉 죄의 결과로 닥쳐오게 될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세상에서 가난한 것만 심한 것인 줄 알고, 육신의 몸이 병드는 것만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이 인생살이에서 자기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일들만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것, 훨씬 더 나쁜 일을 조금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그 육신이 지옥불에 떨어지게 되고 그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이 훨씬 더 무서운 일에 대하여 너무나 둔감한 까닭에, 그런 ‘심한 것’으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죄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빈말이나 거짓말 하실 수 있는 분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38년 동안 앓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처지에 빠질 수 있다.’라고 그 병자에게, 또 오늘 우리들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그냥 겁만 주려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이토록 진지하고도 엄격하게 경고해 주시는 말씀을 진심으로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우리에게 죄를 일깨워 주시는 분이신 동시에 그 죄의 해결사도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큼 죄에 대하여 신랄하시면서도 또한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 위대하신 영혼의 의원이신 예수님께서 이 무서운 죄의 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는 이제부터 죄의 종노릇하지 말고 죄에서 자유해라, 죄의 병을 더 이상 앓지 말고 그 고질병에서 치료받아라.”라고 처방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 회개하는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못하고 자기 죄 용서함 받은 기쁨 때문에 감격의 찬송 한 절 불러보지 못한 사람은 설사 신구약 66권을 줄줄 외운다 하더라도 결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네가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보다 네 영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진짜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라고, 당신의 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을 마음을 열어 경청하며 순종함으로써 정말 예수님 바로 믿고 잘 믿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그를 ‘보시고 아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그 순간 그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가의 수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제치고 일등 인생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자기를 고친 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율법에 도통했다는 수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던 참된 구원 신앙의 길을 정확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만이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되고 영혼 구원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우리의 인생고를 지극히 잘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완전무흠하시고 거룩하심이 그 앞에 서게 된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만들고 부끄러워지게 만들고 회개하게 만들고 용서받은 확신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게 된 성도들은 ‘예수를 알 때 행복 있네 그 사랑 안에 내가 사네’라고 감격적인 고백의 찬양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선택함을 받은, 로또 당첨된 사람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세상 최고의 행복자(幸福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님 영접하셨습니까?
  지난 죄 용서함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 보여 주신 본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신앙인(信仰人)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먼저 찾아와 주시는 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나를 낫게 한 그 사람’께서 주시는 축복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고백하며 전파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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